[무등의 아침] “광주 3·1 운동의 숨은 주역 김범수…6·25 비극 속 독립 서훈도 못 받아”

입력 2023.03.0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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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광주 3.1 운동의 숨은 주역 김범수 선생...1917년 경성의전 진학한 수재"
"화순 출신 정광호와 장성에서 2.8 독립선언서 인쇄...3.1 만세 시위 때 민중에 배포"
"광주 3.1 만세 시위로 대구 감옥에서 복역...총 책임자 김복현과 함께 3년형 선고"
"경성의전 복학 뒤 광주에서 남선의원 개업...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진료 약속 실천"
"좌우 합작 통일 정부 꿈꾼 민족주의자...6.25 전란 와중에 사망, 독립 운동 서훈도 못 받아"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aycz1-YC9e8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지금 3월이 지나가고 있는데요. 지난주에는 3.1운동을 모의하고 준비했던 민족 대표 33인 중에 우리 고장 출신, 지강 양한묵 선생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늘부터는 광주 3.1운동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영웅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는데 오늘 먼저 경성의전 의과대학생이었던 김범수 선생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광주 3.1운동의 숨은 주역 김범수 선생 이야기군요. 일반인에게는 조금 낯선 인물인데 광주 출신인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김범수 선생은 광주 3.1운동 당시 말씀드렸던 것처럼 경성의전,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생인데요. 광주 3.1운동 시에 불을 지핀 주역입니다. 1899년 광산군 서방면 신안리 재매 마을에서 태어났는데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김범수 선생, 왼쪽에서 세 번째)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김범수 선생, 왼쪽에서 세 번째)

지금 지번으로 보니까 신안동 333번지이고 도로명 주소로는 서암대로 93번지에서 태어나신 분이지요.

◇ 윤주성: 신안동이면 북구인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윤주성: 김범수 선생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경성의전에 진학했다면 대단한 수재였을 것 같네요?

◆ 노성태: 네. 광주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 경성의전에 진학했던 수재였지만 이전에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는 잘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우가 김언수라고 하는 분이 서석초등학교 당시 광주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보면 광주 보통학교를 다녔을 가능성은 높은데 '광주 서석 100년사' 졸업생 명부를 들여다보면 김범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 윤주성: 김범수 선생을 원장님께서는 광주 3.1운동의 숨은 영웅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 노성태: 하나는 메이지 대학생이었던 화순 출신 정광호가 2.8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서울에 와서 김범수를 만났고요. 그 김범수와 함께 장성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그것을 3.1운동 때 배포했던 활동을 했었고요. 또 하나는 서울과 광주를 잇는 견인차 역할을 김범수가 담당을 합니다. 어찌 보면 말씀드렸던 것처럼 3.1운동에 불을 지핀 그런 분이시지요.

◇ 윤주성: 2.8 독립선언서 인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1919년 2월 2일 메이지 대학에 유학 중이었던 정광호가 2.8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귀국해서 찾아간 곳이 경성 김범수의 하숙집이었습니다. 정광호는 김범수 등 전남 출신들과 만나 2.8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하기로 뜻을 모은 후에 박일구의 처가였던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게 되는데 이때 김범수는 광주 보통학교 교사이면서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이던 김태열을 만나서 장성으로 함께 이동, 2.8 독립선언서 600여 장을 인쇄했고 이 독립선언서는 말씀드렸던 것처럼 서울과 광주 만세 시위 당시에 일반 민중에게 배포가 됩니다.

◇ 윤주성: 서울 3.1만세 시위와 광주 3.10만세 시위 당시 뿌려진 2.8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핵심 인물이 김범수 선생이군요. 광주 3.1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도 설명해주시겠어요?

◆ 노성태: 1919년 3월 2일 광주북문안교회 장로였던 최흥종 그리고 교인이었던 김복현이 서울로 올라가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담양 출신 국기열의 주선으로 청량리 산기슭에서 만난 분이 지금 또 말씀드린 경성의전 학생이었던 김범수 등 전남 유학생이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광주만세 시위가 논의가 됐고 광주에서 올라갔던 최흥종, 김복현이 광주의 총 책임자로 인증을 받게 됩니다. 그 활동의 주역 그 현장에 있었던 주역이 김범수 선생이었지요.

◇ 윤주성: 광주 3.1만세 시위에서 김범수 선생의 역할과 위상이 느껴지는데 결국 체포돼서 옥살이를 하셨다고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김범수는 체포되어서 김복현이라고 하는 분이 아까 서울에 올라갔던 주역인데 김복현 외 21인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광주지방법원은 김범수에게 3년 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3년형은 광주3.1운동 관련 재판을 받았던 104명 중에 최고 형량이었던 것이지요. 김범수는 이에 불복해서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했지만 3년의 형량이 변동이 없었고요. 광주 3.1운동의 총책임자였던 김복현과 함께 3년형을 선고받았던 김범수, 광주 3.1운동에 거듭 말씀드리지만 알려지지 않은 숨은 주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윤주성: 김범수 선생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이후 모습은 어떻습니까?

◆ 노성태: 3년형이 확정돼서 대구 감옥에 복역 중 1년 6월로 감형이 되어서 1920년 9월에 출옥했고 출옥한 이후에 경성의전에 복학한 뒤 의사가 됩니다. 광주3.1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후 의사가 되어서 고향 광주에서 개업하자 김범수의 개업은 당시 광주에서 커다란 뉴스가 됩니다. 그래서 1924년 11월 17일 자 동아일보에는 남선의원 독지, 이런 제목을 달고 다음 기사가 실리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광주 시내 전 광산의원 자리에 영업을 개시한 남선의원은 의사 김범수 씨가 경영한바 내외 설비와 입원실도 완비되었으므로 일반 환자에게 편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씨(김범수)는 특별히 무산환자를 위하여 실비 혹은 무료진료에 응하겠다고 한다"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 윤주성: 광주 3.1운동의 주역 김범수 선생 광주에서 의사가 됐는데 무료 진료를 한 것이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무산환자는 가난한 환자라는 뜻인데요. 가난한 환자에게는 실비 혹은 무료 진료에 응하겠다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는 간호사에게 늘 입버릇처럼 신발에 흙이 묻어 있는 환자, 가난한 환자겠지요. 이 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아서도 안 되고 내쫓아서도 안 된다 이렇게 주의를 줬다고 합니다. 실제 그는 약속한 대로 가난한 자들의 무료 치료 약속을 꾸준히 실천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윤주성: 가난한 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던 김범수 선생, 광주에서 큰 존경을 받았을 것 같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당시 김범수 선생은 광주에서 꽤 인기 있었고 저명한 의사로 존경을 받고 있는데 1929년 11월 1일 자 중외일보에 이런 기사가 뜹니다. 남선의원, 이것은 김범수 선생 병원이지요. "남선의원이라면 누구나 연상하는바 광주 수재라고 평판 받는 김범수 군의 병원일 줄 안다. 군은 경선의전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에 남선의원의 외과 의사로 근무한 의학적 기술보다 3.1운동의 희생에서 맛본 인간의 고통에서 묻어나온 인간미, 그것이 남이 추종할 수 있는 소유자인 만치 광주 인기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의사로서의 삶은 민족과 민중을 향한 사랑이었고 저는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 윤주성: 해방 이후 통일 정부를 꿈꾸는 정치가 활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활동이었나요?

◆ 노성태: 김범수 선생은 해방 직후에 많은 분이 알고 계시는 여운형이 이끌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기에 참여해서 전남 지부 조직부장을 맡아서 좌우를 초월한 통일 정부 수립을 염원했고 또 좌파와 우파 일부가 힘을 합쳐서 46년 3월 결성된 민족민주주의전선 전남 지부 결성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김범수 선생은 통일 정부를 꿈꾸고 좌우 합작을 주장했던 민족주의자였는데 그가 했었던 말을 들어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조선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도, 좌도 없고 남도 북도 없다. 오직 3천만 민족이 다 같이 합작할 것뿐이다. 따라서 광주에 있어서도 좌우 합작은 필연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말씀을 남기셨던 분이시지요.

◇ 윤주성: 김범수 선생, 의사에서 통일 정부를 꿈꾼 정치가이기도 했는데 6.25 동란 와중에 결국 희생됐다고요?

◆ 노성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처가가 있는 동네가 화순 북면 원리인데요. 피난갔지만 의사임을 알아본 백아산의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사령부에 의해서 강제 징집이 됩니다. 강제 징집이 되었지만 중환자 비트에서 죽어가던 북한의 인민군들의 부상병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치료 도중 1951년 4월 부상자들을 돌보다 국군토벌대의 공격 중 사망을 하는데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무튼 광주 3.1운동의 주역이면서 환자에게 치료비도 받지 않았던 참의사였고 또 해방 직후에는 좌우를 넘어 통일 정부를 꿈꾸었던 민족주의자였지만 아직까지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 윤주성: 광주 3.1운동의 숨은 주역 김범수 선생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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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광주 3·1 운동의 숨은 주역 김범수…6·25 비극 속 독립 서훈도 못 받아”
    • 입력 2023-03-08 13: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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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3.1 운동의 숨은 주역 김범수 선생...1917년 경성의전 진학한 수재"<br />"화순 출신 정광호와 장성에서 2.8 독립선언서 인쇄...3.1 만세 시위 때 민중에 배포"<br />"광주 3.1 만세 시위로 대구 감옥에서 복역...총 책임자 김복현과 함께 3년형 선고"<br />"경성의전 복학 뒤 광주에서 남선의원 개업...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 진료 약속 실천"<br />"좌우 합작 통일 정부 꿈꾼 민족주의자...6.25 전란 와중에 사망, 독립 운동 서훈도 못 받아"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aycz1-YC9e8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지금 3월이 지나가고 있는데요. 지난주에는 3.1운동을 모의하고 준비했던 민족 대표 33인 중에 우리 고장 출신, 지강 양한묵 선생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늘부터는 광주 3.1운동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영웅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는데 오늘 먼저 경성의전 의과대학생이었던 김범수 선생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광주 3.1운동의 숨은 주역 김범수 선생 이야기군요. 일반인에게는 조금 낯선 인물인데 광주 출신인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김범수 선생은 광주 3.1운동 당시 말씀드렸던 것처럼 경성의전,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생인데요. 광주 3.1운동 시에 불을 지핀 주역입니다. 1899년 광산군 서방면 신안리 재매 마을에서 태어났는데요.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김범수 선생, 왼쪽에서 세 번째)
지금 지번으로 보니까 신안동 333번지이고 도로명 주소로는 서암대로 93번지에서 태어나신 분이지요.

◇ 윤주성: 신안동이면 북구인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윤주성: 김범수 선생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경성의전에 진학했다면 대단한 수재였을 것 같네요?

◆ 노성태: 네. 광주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 경성의전에 진학했던 수재였지만 이전에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는 잘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우가 김언수라고 하는 분이 서석초등학교 당시 광주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보면 광주 보통학교를 다녔을 가능성은 높은데 '광주 서석 100년사' 졸업생 명부를 들여다보면 김범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 윤주성: 김범수 선생을 원장님께서는 광주 3.1운동의 숨은 영웅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 노성태: 하나는 메이지 대학생이었던 화순 출신 정광호가 2.8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서울에 와서 김범수를 만났고요. 그 김범수와 함께 장성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그것을 3.1운동 때 배포했던 활동을 했었고요. 또 하나는 서울과 광주를 잇는 견인차 역할을 김범수가 담당을 합니다. 어찌 보면 말씀드렸던 것처럼 3.1운동에 불을 지핀 그런 분이시지요.

◇ 윤주성: 2.8 독립선언서 인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1919년 2월 2일 메이지 대학에 유학 중이었던 정광호가 2.8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귀국해서 찾아간 곳이 경성 김범수의 하숙집이었습니다. 정광호는 김범수 등 전남 출신들과 만나 2.8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하기로 뜻을 모은 후에 박일구의 처가였던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게 되는데 이때 김범수는 광주 보통학교 교사이면서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이던 김태열을 만나서 장성으로 함께 이동, 2.8 독립선언서 600여 장을 인쇄했고 이 독립선언서는 말씀드렸던 것처럼 서울과 광주 만세 시위 당시에 일반 민중에게 배포가 됩니다.

◇ 윤주성: 서울 3.1만세 시위와 광주 3.10만세 시위 당시 뿌려진 2.8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핵심 인물이 김범수 선생이군요. 광주 3.1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도 설명해주시겠어요?

◆ 노성태: 1919년 3월 2일 광주북문안교회 장로였던 최흥종 그리고 교인이었던 김복현이 서울로 올라가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담양 출신 국기열의 주선으로 청량리 산기슭에서 만난 분이 지금 또 말씀드린 경성의전 학생이었던 김범수 등 전남 유학생이었습니다. 이 만남에서 광주만세 시위가 논의가 됐고 광주에서 올라갔던 최흥종, 김복현이 광주의 총 책임자로 인증을 받게 됩니다. 그 활동의 주역 그 현장에 있었던 주역이 김범수 선생이었지요.

◇ 윤주성: 광주 3.1만세 시위에서 김범수 선생의 역할과 위상이 느껴지는데 결국 체포돼서 옥살이를 하셨다고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김범수는 체포되어서 김복현이라고 하는 분이 아까 서울에 올라갔던 주역인데 김복현 외 21인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광주지방법원은 김범수에게 3년 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3년형은 광주3.1운동 관련 재판을 받았던 104명 중에 최고 형량이었던 것이지요. 김범수는 이에 불복해서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했지만 3년의 형량이 변동이 없었고요. 광주 3.1운동의 총책임자였던 김복현과 함께 3년형을 선고받았던 김범수, 광주 3.1운동에 거듭 말씀드리지만 알려지지 않은 숨은 주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윤주성: 김범수 선생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이후 모습은 어떻습니까?

◆ 노성태: 3년형이 확정돼서 대구 감옥에 복역 중 1년 6월로 감형이 되어서 1920년 9월에 출옥했고 출옥한 이후에 경성의전에 복학한 뒤 의사가 됩니다. 광주3.1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후 의사가 되어서 고향 광주에서 개업하자 김범수의 개업은 당시 광주에서 커다란 뉴스가 됩니다. 그래서 1924년 11월 17일 자 동아일보에는 남선의원 독지, 이런 제목을 달고 다음 기사가 실리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광주 시내 전 광산의원 자리에 영업을 개시한 남선의원은 의사 김범수 씨가 경영한바 내외 설비와 입원실도 완비되었으므로 일반 환자에게 편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씨(김범수)는 특별히 무산환자를 위하여 실비 혹은 무료진료에 응하겠다고 한다"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 윤주성: 광주 3.1운동의 주역 김범수 선생 광주에서 의사가 됐는데 무료 진료를 한 것이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무산환자는 가난한 환자라는 뜻인데요. 가난한 환자에게는 실비 혹은 무료 진료에 응하겠다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는 간호사에게 늘 입버릇처럼 신발에 흙이 묻어 있는 환자, 가난한 환자겠지요. 이 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아서도 안 되고 내쫓아서도 안 된다 이렇게 주의를 줬다고 합니다. 실제 그는 약속한 대로 가난한 자들의 무료 치료 약속을 꾸준히 실천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윤주성: 가난한 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던 김범수 선생, 광주에서 큰 존경을 받았을 것 같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당시 김범수 선생은 광주에서 꽤 인기 있었고 저명한 의사로 존경을 받고 있는데 1929년 11월 1일 자 중외일보에 이런 기사가 뜹니다. 남선의원, 이것은 김범수 선생 병원이지요. "남선의원이라면 누구나 연상하는바 광주 수재라고 평판 받는 김범수 군의 병원일 줄 안다. 군은 경선의전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에 남선의원의 외과 의사로 근무한 의학적 기술보다 3.1운동의 희생에서 맛본 인간의 고통에서 묻어나온 인간미, 그것이 남이 추종할 수 있는 소유자인 만치 광주 인기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의사로서의 삶은 민족과 민중을 향한 사랑이었고 저는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 윤주성: 해방 이후 통일 정부를 꿈꾸는 정치가 활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활동이었나요?

◆ 노성태: 김범수 선생은 해방 직후에 많은 분이 알고 계시는 여운형이 이끌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기에 참여해서 전남 지부 조직부장을 맡아서 좌우를 초월한 통일 정부 수립을 염원했고 또 좌파와 우파 일부가 힘을 합쳐서 46년 3월 결성된 민족민주주의전선 전남 지부 결성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김범수 선생은 통일 정부를 꿈꾸고 좌우 합작을 주장했던 민족주의자였는데 그가 했었던 말을 들어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조선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도, 좌도 없고 남도 북도 없다. 오직 3천만 민족이 다 같이 합작할 것뿐이다. 따라서 광주에 있어서도 좌우 합작은 필연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말씀을 남기셨던 분이시지요.

◇ 윤주성: 김범수 선생, 의사에서 통일 정부를 꿈꾼 정치가이기도 했는데 6.25 동란 와중에 결국 희생됐다고요?

◆ 노성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처가가 있는 동네가 화순 북면 원리인데요. 피난갔지만 의사임을 알아본 백아산의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사령부에 의해서 강제 징집이 됩니다. 강제 징집이 되었지만 중환자 비트에서 죽어가던 북한의 인민군들의 부상병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치료 도중 1951년 4월 부상자들을 돌보다 국군토벌대의 공격 중 사망을 하는데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무튼 광주 3.1운동의 주역이면서 환자에게 치료비도 받지 않았던 참의사였고 또 해방 직후에는 좌우를 넘어 통일 정부를 꿈꾸었던 민족주의자였지만 아직까지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 윤주성: 광주 3.1운동의 숨은 주역 김범수 선생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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