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영화 속 ‘부동산 왕’과 ‘빌라왕’의 공통점은?…영화 ‘라스트 홈’

입력 2023.03.12 (08:01) 수정 2023.04.1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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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스트 홈’(2014)의 한 장면. 강제 퇴거된 가족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 Broad Green Pictures영화 ‘라스트 홈’(2014)의 한 장면. 강제 퇴거된 가족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 Broad Green Pictures

※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 근 4년을 서울 강서구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살았다. 처음으로 은행 빚을 져서 입주한 신축이었다. 낡은 노량진 다세대주택을 벗어나 번듯한 투룸 오피스텔로 옮겨왔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펴졌다. 모든 게 새것인 집안을 취향껏 꾸밀 때면 성공이라도 한 듯 우쭐했지만, 가끔씩 잔걱정이 몰려드는 밤이면 집주인 아주머니께 별일은 없으신지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살피거나 건물 등기부 등본을 떼 보곤 했다. 남에게 목돈을 맡기고 사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전세살이의 숙명이었을까.

그런 까닭에 최근 몇 달간 이곳 강서구 일대 전세 사기 소식이 집중 보도될 때마다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정들었던 우리 동네가 사실은 시한폭탄과 다를 바 없는 '깡통 전세'로 가득한 곳이었다니. 속지 않곤 못 배기겠다 싶을 만큼 수법도 철저하다. 실제로 작정하고 치는 사기에 당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난 9일 KBS 단독 보도에 따르면 이렇게 사기 조직과 연계된 악성 임대인, 속칭 '빌라왕'의 수가 176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이 산 집을 다 합치면 2만 6천 채가 넘는다. 평생 내 집 장만이 소원이었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얻은 재산이다.

[연관기사] [단독] 최초 확인, ‘사기 조직 연계 빌라왕’ 176명…2만 7천 채 굴렸다(2023. 3. 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22969

2014년 미국 영화 '라스트 홈'에도 집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심지어 이들이 소유권을 잃고 집 밖으로 퇴거 되는 가장 잔혹한 순간, 즉 강제집행 현장을 연달아 보여준다. 그럴 리 없다, 착오가 있었을 거다,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나가냐…. 충격을 받아들일 새도 없이 집행관들은 순식간에 밀고 들어오고, 딱 2분간 필요한 것만 들고 나오라고 고함을 지른다. 심지어 챙긴 짐을 앞마당에 내려놓을 수도 없다. 왜? 엄밀히 따지면 마당도 더는 내 소유가 아니니까. 보다 보면 절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현실 공포'를 안겨주는 이 작품은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배경으로 집과 사람의 문제를 들여다 본다.

주인공 데니스(왼쪽)은 부동산업자 릭(오른쪽)의 밑에서 자본주의의 생리를 배운다. © Broad Green Pictures주인공 데니스(왼쪽)은 부동산업자 릭(오른쪽)의 밑에서 자본주의의 생리를 배운다. © Broad Green Pictures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이렇게 집을 잃고 순식간에 변두리 모텔로 쫓겨난 '싱글 파더' 데니스(앤드루 가필드)다. 은행 빚을 못 갚아 담보 잡힌 집을 빼앗긴 그는 '먹고 살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내쫓은 부동산 브로커 릭(마이클 섀넌)의 밑으로 들어간다. 원수 밑에서라도 일하겠다는 데니스의 근성을 높이 산 릭은 자신이 터득한 미국 자본주의의 생리를 차근차근 가르친다. “100명 중 1명만 방주에 타는 거야. 나머지 99명은 가라앉는 거지.” 미국은 한 번도 패자를 구제한 적 없고, 오직 승자의,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나라라는 게 가르침의 핵심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강제 퇴거를 벌이고, 차를 모는 짧은 사이에도 길 양쪽 집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릭에게 집은 그저 돈벌이 수단이다. 어차피 곧 이사갈 거라며 자기 집에도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데니스는 대대로 살아온 옛집을 잊지 못한다. 릭 밑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그 집을 다시 사들이겠다는 게 목표다. 그러나 ‘부동산에 감정을 싣지 말라’는 엄혹한 가르침 속에서 데니스는 조금씩 변해 가고, 어느 순간 그는 본말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으리으리한 대 저택을 가졌지만, 정작 곁에 있어 줄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여기까지 쓰면 전형적인 ‘스카페이스’ 류 줄거리지만, 다행히 ‘라스트 홈’은 조금 다른 결말을 택한다. 그렇다고 잘못을 뉘우치고 가족들에게 돌아간다는 뻔한 해피엔딩도 아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직접적으로 감독의 문제의식을 외치는 장면이 한 차례 지나가고, 데니스가 한 번 더 윤리적 선택 앞에서 고민한다는 얘기까지만 전하겠다. 영화 중반까지 보면 대충 어떻게 전개될지 보이는 내용이긴 하지만. 궁금하다면 유튜브와 왓챠, 티빙 등 여러 OTT 플랫폼에서 볼 수 있다.

한국에선 ‘라스트 홈’이란 제목으로 공개됐지만, 영화의 원제는 ‘99 homes’다. 99채의 집을 가져도, 진정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갈 ‘내 집’이 없다면 모두 공허하다는 톨스토이적 메시지일까. 영화 ‘화이트 타이거’ 등 꾸준히 같은 결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 라민 바흐라니 감독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건 철학적 성찰보다는 약탈적 금융 제도의 생생한 묘사다. 정의는 멀고 이권은 눈앞에 있으며, 법과 제도는 허점투성이라는 사실. 영화 속 배경은 미국이지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허술한 대출·보증보험 심사와 감정 절차, 악성 임대인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법적 효력 없는 등기부 등본 등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산더미인데, 정부는 과연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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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영화 속 ‘부동산 왕’과 ‘빌라왕’의 공통점은?…영화 ‘라스트 홈’
    • 입력 2023-03-12 08:01:46
    • 수정2023-04-18 10:01:09
    씨네마진국
영화 ‘라스트 홈’(2014)의 한 장면. 강제 퇴거된 가족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 Broad Green Pictures
※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 근 4년을 서울 강서구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살았다. 처음으로 은행 빚을 져서 입주한 신축이었다. 낡은 노량진 다세대주택을 벗어나 번듯한 투룸 오피스텔로 옮겨왔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펴졌다. 모든 게 새것인 집안을 취향껏 꾸밀 때면 성공이라도 한 듯 우쭐했지만, 가끔씩 잔걱정이 몰려드는 밤이면 집주인 아주머니께 별일은 없으신지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살피거나 건물 등기부 등본을 떼 보곤 했다. 남에게 목돈을 맡기고 사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전세살이의 숙명이었을까.

그런 까닭에 최근 몇 달간 이곳 강서구 일대 전세 사기 소식이 집중 보도될 때마다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정들었던 우리 동네가 사실은 시한폭탄과 다를 바 없는 '깡통 전세'로 가득한 곳이었다니. 속지 않곤 못 배기겠다 싶을 만큼 수법도 철저하다. 실제로 작정하고 치는 사기에 당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난 9일 KBS 단독 보도에 따르면 이렇게 사기 조직과 연계된 악성 임대인, 속칭 '빌라왕'의 수가 176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이 산 집을 다 합치면 2만 6천 채가 넘는다. 평생 내 집 장만이 소원이었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산산이 무너뜨리고 얻은 재산이다.

[연관기사] [단독] 최초 확인, ‘사기 조직 연계 빌라왕’ 176명…2만 7천 채 굴렸다(2023. 3. 9.)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22969

2014년 미국 영화 '라스트 홈'에도 집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나온다. 심지어 이들이 소유권을 잃고 집 밖으로 퇴거 되는 가장 잔혹한 순간, 즉 강제집행 현장을 연달아 보여준다. 그럴 리 없다, 착오가 있었을 거다,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나가냐…. 충격을 받아들일 새도 없이 집행관들은 순식간에 밀고 들어오고, 딱 2분간 필요한 것만 들고 나오라고 고함을 지른다. 심지어 챙긴 짐을 앞마당에 내려놓을 수도 없다. 왜? 엄밀히 따지면 마당도 더는 내 소유가 아니니까. 보다 보면 절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현실 공포'를 안겨주는 이 작품은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배경으로 집과 사람의 문제를 들여다 본다.

주인공 데니스(왼쪽)은 부동산업자 릭(오른쪽)의 밑에서 자본주의의 생리를 배운다. © Broad Green Pictures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이렇게 집을 잃고 순식간에 변두리 모텔로 쫓겨난 '싱글 파더' 데니스(앤드루 가필드)다. 은행 빚을 못 갚아 담보 잡힌 집을 빼앗긴 그는 '먹고 살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내쫓은 부동산 브로커 릭(마이클 섀넌)의 밑으로 들어간다. 원수 밑에서라도 일하겠다는 데니스의 근성을 높이 산 릭은 자신이 터득한 미국 자본주의의 생리를 차근차근 가르친다. “100명 중 1명만 방주에 타는 거야. 나머지 99명은 가라앉는 거지.” 미국은 한 번도 패자를 구제한 적 없고, 오직 승자의,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나라라는 게 가르침의 핵심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강제 퇴거를 벌이고, 차를 모는 짧은 사이에도 길 양쪽 집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릭에게 집은 그저 돈벌이 수단이다. 어차피 곧 이사갈 거라며 자기 집에도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데니스는 대대로 살아온 옛집을 잊지 못한다. 릭 밑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그 집을 다시 사들이겠다는 게 목표다. 그러나 ‘부동산에 감정을 싣지 말라’는 엄혹한 가르침 속에서 데니스는 조금씩 변해 가고, 어느 순간 그는 본말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으리으리한 대 저택을 가졌지만, 정작 곁에 있어 줄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여기까지 쓰면 전형적인 ‘스카페이스’ 류 줄거리지만, 다행히 ‘라스트 홈’은 조금 다른 결말을 택한다. 그렇다고 잘못을 뉘우치고 가족들에게 돌아간다는 뻔한 해피엔딩도 아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직접적으로 감독의 문제의식을 외치는 장면이 한 차례 지나가고, 데니스가 한 번 더 윤리적 선택 앞에서 고민한다는 얘기까지만 전하겠다. 영화 중반까지 보면 대충 어떻게 전개될지 보이는 내용이긴 하지만. 궁금하다면 유튜브와 왓챠, 티빙 등 여러 OTT 플랫폼에서 볼 수 있다.

한국에선 ‘라스트 홈’이란 제목으로 공개됐지만, 영화의 원제는 ‘99 homes’다. 99채의 집을 가져도, 진정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갈 ‘내 집’이 없다면 모두 공허하다는 톨스토이적 메시지일까. 영화 ‘화이트 타이거’ 등 꾸준히 같은 결의 영화를 만들고 있는 라민 바흐라니 감독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건 철학적 성찰보다는 약탈적 금융 제도의 생생한 묘사다. 정의는 멀고 이권은 눈앞에 있으며, 법과 제도는 허점투성이라는 사실. 영화 속 배경은 미국이지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허술한 대출·보증보험 심사와 감정 절차, 악성 임대인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법적 효력 없는 등기부 등본 등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산더미인데, 정부는 과연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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