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곗돈 수억 먹튀”…한국에 요즘도 이런 사기가?

입력 2023.03.13 (14:5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2월, 30대 주부 A 씨와 서울 노원경찰서에서 마주쳤습니다.

무슨 일로 경찰서를 찾았냐고 물었습니다. A 씨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계주가 4,000만 원을 들고 튀었어요"

A 씨에 따르면, 피해자는 다수였습니다. 미처 연락이 안 되는 피해자들까지 합하면 피해액은 얼추 수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요약하면, 지인들의 계 모임에서 계주 1명이 계원 모두를 등쳤다는 얘기. 전형적인 '곗돈 사기'였습니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이런 '곗돈 사기'가 일어난다고?

10여 년 전이기만 했어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곗돈 사기는 잦았고, 주요 뉴스로도 보도됐으니까요.


[연관 기사] 100억 대 ‘강남 귀족계’ 또 터졌다…계주 잠적 (2012년 6월 18일, 9시 뉴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489607

더구나 A 씨를 포함한 피해자들은 30대 여성들이었습니다. 고령의 노인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아무래도 고개가 갸웃했습니다.

■ 무대는 한국, 주인공은 베트남인들

의문이 풀린 건, 이들의 국적을 알게 된 뒤였습니다.

모두 베트남 여성들이었습니다. 대부분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0년 넘는 한국 생활을 경험했지만, 경찰서는 다들 처음이었습니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습니다.

1,000만 원대에서 4,000만 원대까지... 그 피해 금액도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에게는 꼭 찾아야 하는 돈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해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소중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 믿고 맡긴 돈…'경매계(Hụi)' 가 뭐길래?

사건은 지난해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은 모두 베트남 여성 계주 B 씨의 권유로 계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의 계는 베트남에서 흔한 '경매계(Hụi)' 였습니다. '낙찰계'라는 말로도 불립니다.

방식은 우리나라의 낙찰계와 꽤 닮았습니다.

계주는 국내 체류 중인 베트남 동포들을 상대로 계원을 모았습니다. 메신저를 통해 주요 내용을 공지했고, 10명 이상 모이면 계가 성립됐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계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방마다 내야 하는 금액도, 주기도, 참가자 수도 모두 다릅니다.


■ "은행을 안 믿어서"

예를 들겠습니다.

3월 1일에 10명이 참여해, 한 달에 100만 원씩 내는 계를 시작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계주는 참가자들에게 3월 1일 7시부터 7시 10분까지 딱 10분 동안만 '낙찰'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때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한 참가자가 곗돈을 먼저 받습니다.

낙찰가가 30만 원이라면, 낙찰받은 사람 이외의 참가자들은 원래 내야 할 100만 원에서 낙찰가 30만 원을 제외한 70만 원씩 계주에게 보냅니다.

계주는 이 돈을 모아 수수료 일부를 떼고, 낙찰자에게 보냅니다. 이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바로 사고가 나는 겁니다.

먼저 곗돈을 챙긴 사람은 이후 계 모임이 끝날 때까지 100만 원씩 계주에게 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일찍 낙찰받는 사람은 목돈을 빨리 얻지만, 길게 보면 타가는 돈보다 넣는 돈이 더 많습니다.

반면, 늦게 받는 사람은 이자를 더해 더 많은 돈을 타가지만,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상호 신뢰가 필수적입니다. 과거 우리의 계 모임과 동일합니다.

베트남에선 잦은 전쟁 탓에 은행을 못 믿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계 모임으로 목돈을 만드는 일이 아직도 흔한 이유입니다. 예전에 우리도 같은 이유로 계 모임이 흥했습니다.


■ 언제부턴가 끊긴 돈…"계주가 수상하다"

B 씨가 조직한 계는 초기엔 순항했습니다. 5만 원, 10만 원, 적은 금액부터 시작한 계 모임은 점차 곗돈의 액수도 커졌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계를 늘려나가더니 몇백만 원이 넘는 계가 여러 개 생겼어요."

수백만 원에 달하는 계를 여러 개 운영하던 계주 B 씨, 경찰 조사로 통장이 압류됐다는 등 갖은 이유를 대며 3개월만 기다려달라고 말했습니다.

3개월이 지난 뒤 참가자들이 받은 건 곗돈이 아닌 B 씨의 '개인회생신청서'였습니다.

B 씨는 곗돈을 돌려줄 수 없다며 자신을 찾아오면 경찰을 부를 거라며 오히려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연락도 잘 안 됐습니다. 피해자들은 많게는 수천만 원에 달하는 돈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 베트남인 사건…한국 경찰 대응은?

피해자들은 한국 법과 실상에 어둡습니다. 경찰에 신고할 마음조차 먹지 못했습니다.

서류접수부터 경찰 진술까지, 생업을 제쳐두고 경찰서에 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툰 한국말은 안 그래도 어려운 절차를 더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던 중 이들에게 한국인 C 씨가 나타났습니다.

“다들 신고도 못 하고 겁만 내고 있는 거예요. 언니 믿고 한번 해보자고 했죠”
- 한국인 C 씨


베트남어 통역 일을 하던 C 씨도 같은 계주에게 피해를 본 상황이었습니다.

C 씨는 직접 피해 여성들을 찾아 한명 한명 설득했고, 지난달 말 경찰서를 찾아 계주를 고소했습니다.

경찰은 피의자인 계주를 한차례 불러 조사했고,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언어 장벽·문화 장벽에 결국 경찰 신고를 꺼리기 때문에 이들은 좋은 표적이 되곤 합니다.

이들은 한국땅에 와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하나같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충고하는데 이런 낙찰계 멀리하세요. 이런 낙찰계는 제발 하지 마세요."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곗돈 수억 먹튀”…한국에 요즘도 이런 사기가?
    • 입력 2023-03-13 14:57:46
    취재K

지난 2월, 30대 주부 A 씨와 서울 노원경찰서에서 마주쳤습니다.

무슨 일로 경찰서를 찾았냐고 물었습니다. A 씨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계주가 4,000만 원을 들고 튀었어요"

A 씨에 따르면, 피해자는 다수였습니다. 미처 연락이 안 되는 피해자들까지 합하면 피해액은 얼추 수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요약하면, 지인들의 계 모임에서 계주 1명이 계원 모두를 등쳤다는 얘기. 전형적인 '곗돈 사기'였습니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이런 '곗돈 사기'가 일어난다고?

10여 년 전이기만 했어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곗돈 사기는 잦았고, 주요 뉴스로도 보도됐으니까요.


[연관 기사] 100억 대 ‘강남 귀족계’ 또 터졌다…계주 잠적 (2012년 6월 18일, 9시 뉴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489607

더구나 A 씨를 포함한 피해자들은 30대 여성들이었습니다. 고령의 노인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아무래도 고개가 갸웃했습니다.

■ 무대는 한국, 주인공은 베트남인들

의문이 풀린 건, 이들의 국적을 알게 된 뒤였습니다.

모두 베트남 여성들이었습니다. 대부분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0년 넘는 한국 생활을 경험했지만, 경찰서는 다들 처음이었습니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습니다.

1,000만 원대에서 4,000만 원대까지... 그 피해 금액도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에게는 꼭 찾아야 하는 돈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해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소중한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 믿고 맡긴 돈…'경매계(Hụi)' 가 뭐길래?

사건은 지난해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은 모두 베트남 여성 계주 B 씨의 권유로 계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의 계는 베트남에서 흔한 '경매계(Hụi)' 였습니다. '낙찰계'라는 말로도 불립니다.

방식은 우리나라의 낙찰계와 꽤 닮았습니다.

계주는 국내 체류 중인 베트남 동포들을 상대로 계원을 모았습니다. 메신저를 통해 주요 내용을 공지했고, 10명 이상 모이면 계가 성립됐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계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방마다 내야 하는 금액도, 주기도, 참가자 수도 모두 다릅니다.


■ "은행을 안 믿어서"

예를 들겠습니다.

3월 1일에 10명이 참여해, 한 달에 100만 원씩 내는 계를 시작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계주는 참가자들에게 3월 1일 7시부터 7시 10분까지 딱 10분 동안만 '낙찰'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때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한 참가자가 곗돈을 먼저 받습니다.

낙찰가가 30만 원이라면, 낙찰받은 사람 이외의 참가자들은 원래 내야 할 100만 원에서 낙찰가 30만 원을 제외한 70만 원씩 계주에게 보냅니다.

계주는 이 돈을 모아 수수료 일부를 떼고, 낙찰자에게 보냅니다. 이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바로 사고가 나는 겁니다.

먼저 곗돈을 챙긴 사람은 이후 계 모임이 끝날 때까지 100만 원씩 계주에게 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일찍 낙찰받는 사람은 목돈을 빨리 얻지만, 길게 보면 타가는 돈보다 넣는 돈이 더 많습니다.

반면, 늦게 받는 사람은 이자를 더해 더 많은 돈을 타가지만,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상호 신뢰가 필수적입니다. 과거 우리의 계 모임과 동일합니다.

베트남에선 잦은 전쟁 탓에 은행을 못 믿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계 모임으로 목돈을 만드는 일이 아직도 흔한 이유입니다. 예전에 우리도 같은 이유로 계 모임이 흥했습니다.


■ 언제부턴가 끊긴 돈…"계주가 수상하다"

B 씨가 조직한 계는 초기엔 순항했습니다. 5만 원, 10만 원, 적은 금액부터 시작한 계 모임은 점차 곗돈의 액수도 커졌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계를 늘려나가더니 몇백만 원이 넘는 계가 여러 개 생겼어요."

수백만 원에 달하는 계를 여러 개 운영하던 계주 B 씨, 경찰 조사로 통장이 압류됐다는 등 갖은 이유를 대며 3개월만 기다려달라고 말했습니다.

3개월이 지난 뒤 참가자들이 받은 건 곗돈이 아닌 B 씨의 '개인회생신청서'였습니다.

B 씨는 곗돈을 돌려줄 수 없다며 자신을 찾아오면 경찰을 부를 거라며 오히려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연락도 잘 안 됐습니다. 피해자들은 많게는 수천만 원에 달하는 돈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 베트남인 사건…한국 경찰 대응은?

피해자들은 한국 법과 실상에 어둡습니다. 경찰에 신고할 마음조차 먹지 못했습니다.

서류접수부터 경찰 진술까지, 생업을 제쳐두고 경찰서에 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툰 한국말은 안 그래도 어려운 절차를 더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던 중 이들에게 한국인 C 씨가 나타났습니다.

“다들 신고도 못 하고 겁만 내고 있는 거예요. 언니 믿고 한번 해보자고 했죠”
- 한국인 C 씨


베트남어 통역 일을 하던 C 씨도 같은 계주에게 피해를 본 상황이었습니다.

C 씨는 직접 피해 여성들을 찾아 한명 한명 설득했고, 지난달 말 경찰서를 찾아 계주를 고소했습니다.

경찰은 피의자인 계주를 한차례 불러 조사했고, 피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언어 장벽·문화 장벽에 결국 경찰 신고를 꺼리기 때문에 이들은 좋은 표적이 되곤 합니다.

이들은 한국땅에 와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하나같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충고하는데 이런 낙찰계 멀리하세요. 이런 낙찰계는 제발 하지 마세요."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