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사기’로 ‘피싱범죄자’가 된 20대 대학생, 그 날 이후

입력 2023.03.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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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입니다. 보이스피싱 사건 피의자로 조사받으러 오셔야 합니다."

지난해 11월 29일, 20대 여성 정수연(가명) 씨는 경찰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돼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난데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 정수연(가명) 씨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한 사람, '이성 만남 앱'을 통해 만난 남자친구 김 모 씨였습니다.

■ 대학생에서 피싱 범죄자로

지난해 11월 초, 정 씨의 핸드폰에 '이성 만남 앱' 알림이 울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전 28살 김OO이고요. 패션 업체 대표를 맡고 있어요."
- 김모 씨, 카카오톡에서

앱을 통해 나누던 대화는 카카오톡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온종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연인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사랑해", "보고 싶어" 여느 연인들처럼 달콤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정 씨는 김 씨에게 내밀한 상처까지 털어놓았습니다. 우울증으로 치료받은 이야기, 가정폭력으로 힘들었던 어린 시절….

김 씨는 어떤 고백에도 "괜찮다"며 보듬어 주었습니다.

정 씨는 김 씨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지낸 기간도 짧고, 직접 만난 적도 없었지만 금세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김 씨가 정 씨에게 일자리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김 씨가 새로 시작하는 사업의 투자금을 받아오는 일이라고 했어요. 투자자들을 만나 돈을 받고 서류에 서명을 받아오면 된다고요."
- 정수연(가명) 씨

정 씨는 김 씨의 절친한 동생이라는 권 모 씨 밑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권 씨에게는 카카오톡으로 업무 지시를 받았습니다.

일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정 씨는 매일 권 씨가 알려준 장소에 가 투자자들과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수연 대리입니다. 한지민 팀장님 부탁으로 왔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면 투자자들은 정 씨에게 현금을 건넸고, 정 씨는 그 돈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습니다.

투자자들과 만나는 장소도, 건네는 인사말도 매번 바뀌었습니다. 정 씨는 그렇게 2주 동안 4명의 '투자자'를 만났습니다.

하루 일당은 적게는 10만 원, 많게는 40만 원을 받았습니다. 권 씨는 "더 많게는 50만 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수연(가명) 씨가 권 모 씨와 나눴던 실제 카카오톡 대화 내용정수연(가명) 씨가 권 모 씨와 나눴던 실제 카카오톡 대화 내용

그러나 정 씨가 했던 일, 실은 '보이스피싱 수거책'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을 만났던 게 아니라 보이스피싱 ‘피해자’들과 접촉했던 것이고, 투자금을 받은 게 아니라 피해금을 수거했던 겁니다.

돈을 받아 전하기만 하는 쉬운 일에 높은 일당을 받는 게 이상하지 않았을까.

"돈이 너무 급했던 상황이라 ‘왜 이렇게 많이 줄까’ 하는 의심보다는, ‘빨리 벌어서 내 생활에 보태야겠다’는 생각 밖에 못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오른손에 장애가 있어서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는 못 하거든요. 그래서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행복했어요. 당시 김 씨에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로."

- 정수연(가명) 씨

■ 범죄자가 된 그 날 이후

경찰의 소환 통보를 받은 뒤, 정 씨는 김 씨에게 따졌습니다.

돌아온 답은 적반하장이었습니다. 왜 잡혔냐고 타박했습니다.


협박도 이어졌습니다. "수거책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사귀는 동안 보낸 신체 사진과 신상을 유포하겠다"고 했습니다.

김 씨는 정 씨 어머니에게 실제로 사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정 씨는 현재까지 경찰서 2곳에서 피의자 조사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죄자가 된 현실이 괴롭기만 합니다.

"경찰서에서는 제 범행 얘기만 하더라고요. 갑자기 그냥 범죄자가 되어 버렸죠.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 정수연(가명) 씨

■ 범죄자가 될지 모를 누군가에게

경찰 관계자는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속아 보이스피싱 수거책이 되는 일이 매우 흔하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김 씨는 정 씨에게 “너 같은 애들 10명도 더 있다”며 자랑하듯 말했습니다. 김 씨에게 속아 수거책으로 이용되는 여성들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김 씨가 카카오톡 대화 목록을 보여줬어요. 거기에 다른 여성들이 ‘정수연/22/서울 거주’ 이런 식으로 줄줄이 저장돼 있고…."
- 정수연(가명) 씨

정 씨는 자신에게 돈을 건넸던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김 씨에게 속아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다른 여성들, 어쩌면 '성 착취' 협박 때문에 범죄인 걸 알면서도 계속 가담하고 있을 여성들이 걱정된다고도 했습니다.

“혹시나 김 씨가 협박해서 일하라고 강요한다면, 그냥 용기있게 싫다고 하고 자진해서 경찰에 신고했으면 좋겠어요.”
- 정수연(가명) 씨

경찰은 정 씨뿐 아니라 수거책으로 가담한 다른 피의자도 추적하고 있습니다. 수사를 마치는 대로 정 씨를 검찰에 송치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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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사기’로 ‘피싱범죄자’가 된 20대 대학생, 그 날 이후
    • 입력 2023-03-16 08:00:13
    취재K

“경찰입니다. 보이스피싱 사건 피의자로 조사받으러 오셔야 합니다."

지난해 11월 29일, 20대 여성 정수연(가명) 씨는 경찰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돼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난데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 정수연(가명) 씨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한 사람, '이성 만남 앱'을 통해 만난 남자친구 김 모 씨였습니다.

■ 대학생에서 피싱 범죄자로

지난해 11월 초, 정 씨의 핸드폰에 '이성 만남 앱' 알림이 울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전 28살 김OO이고요. 패션 업체 대표를 맡고 있어요."
- 김모 씨, 카카오톡에서

앱을 통해 나누던 대화는 카카오톡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온종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연인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사랑해", "보고 싶어" 여느 연인들처럼 달콤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정 씨는 김 씨에게 내밀한 상처까지 털어놓았습니다. 우울증으로 치료받은 이야기, 가정폭력으로 힘들었던 어린 시절….

김 씨는 어떤 고백에도 "괜찮다"며 보듬어 주었습니다.

정 씨는 김 씨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지낸 기간도 짧고, 직접 만난 적도 없었지만 금세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김 씨가 정 씨에게 일자리 하나를 제안했습니다.

"김 씨가 새로 시작하는 사업의 투자금을 받아오는 일이라고 했어요. 투자자들을 만나 돈을 받고 서류에 서명을 받아오면 된다고요."
- 정수연(가명) 씨

정 씨는 김 씨의 절친한 동생이라는 권 모 씨 밑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권 씨에게는 카카오톡으로 업무 지시를 받았습니다.

일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정 씨는 매일 권 씨가 알려준 장소에 가 투자자들과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수연 대리입니다. 한지민 팀장님 부탁으로 왔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면 투자자들은 정 씨에게 현금을 건넸고, 정 씨는 그 돈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습니다.

투자자들과 만나는 장소도, 건네는 인사말도 매번 바뀌었습니다. 정 씨는 그렇게 2주 동안 4명의 '투자자'를 만났습니다.

하루 일당은 적게는 10만 원, 많게는 40만 원을 받았습니다. 권 씨는 "더 많게는 50만 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수연(가명) 씨가 권 모 씨와 나눴던 실제 카카오톡 대화 내용
그러나 정 씨가 했던 일, 실은 '보이스피싱 수거책'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을 만났던 게 아니라 보이스피싱 ‘피해자’들과 접촉했던 것이고, 투자금을 받은 게 아니라 피해금을 수거했던 겁니다.

돈을 받아 전하기만 하는 쉬운 일에 높은 일당을 받는 게 이상하지 않았을까.

"돈이 너무 급했던 상황이라 ‘왜 이렇게 많이 줄까’ 하는 의심보다는, ‘빨리 벌어서 내 생활에 보태야겠다’는 생각 밖에 못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오른손에 장애가 있어서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는 못 하거든요. 그래서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행복했어요. 당시 김 씨에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로."

- 정수연(가명) 씨

■ 범죄자가 된 그 날 이후

경찰의 소환 통보를 받은 뒤, 정 씨는 김 씨에게 따졌습니다.

돌아온 답은 적반하장이었습니다. 왜 잡혔냐고 타박했습니다.


협박도 이어졌습니다. "수거책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사귀는 동안 보낸 신체 사진과 신상을 유포하겠다"고 했습니다.

김 씨는 정 씨 어머니에게 실제로 사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정 씨는 현재까지 경찰서 2곳에서 피의자 조사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죄자가 된 현실이 괴롭기만 합니다.

"경찰서에서는 제 범행 얘기만 하더라고요. 갑자기 그냥 범죄자가 되어 버렸죠.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 정수연(가명) 씨

■ 범죄자가 될지 모를 누군가에게

경찰 관계자는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속아 보이스피싱 수거책이 되는 일이 매우 흔하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김 씨는 정 씨에게 “너 같은 애들 10명도 더 있다”며 자랑하듯 말했습니다. 김 씨에게 속아 수거책으로 이용되는 여성들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김 씨가 카카오톡 대화 목록을 보여줬어요. 거기에 다른 여성들이 ‘정수연/22/서울 거주’ 이런 식으로 줄줄이 저장돼 있고…."
- 정수연(가명) 씨

정 씨는 자신에게 돈을 건넸던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김 씨에게 속아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다른 여성들, 어쩌면 '성 착취' 협박 때문에 범죄인 걸 알면서도 계속 가담하고 있을 여성들이 걱정된다고도 했습니다.

“혹시나 김 씨가 협박해서 일하라고 강요한다면, 그냥 용기있게 싫다고 하고 자진해서 경찰에 신고했으면 좋겠어요.”
- 정수연(가명) 씨

경찰은 정 씨뿐 아니라 수거책으로 가담한 다른 피의자도 추적하고 있습니다. 수사를 마치는 대로 정 씨를 검찰에 송치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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