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 5·18]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겠다” 28년 만에 지킨 시민군과의 약속

입력 2023.03.1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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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광주 금남로에서 찍은 시민군의 모습.1980년 5월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광주 금남로에서 찍은 시민군의 모습.

1980년 5월 광주에서 찍힌 한 장의 흑백사진. 한 청년이 기관총이 장착된 차량에 올라탄 채 카메라를 응시합니다. 매서운 눈빛엔 경계심이 가득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실형을 확정받은 보수논객 지만원 씨는 이 사진 속 청년을 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군, 이른바 '광수 1호'라고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실은 이 사진 속 인물은 우리에게 '김 군'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지난 2019년 강상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 군'을 통해 이 사진이 유명해졌고, 42년 만에 북한 특수군이 아닌 시민군 '차복환'씨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이창성 씨입니다.

제가 찍은 사진 중에 가장 강렬하게 찍은 사진입니다. 22일 아침에 금남로에서 찍은 건데, 내가 사진 찍으니까 날 그냥 총 쏠 듯이 노려보더라고. 그래서 이거다 싶어가지고 망원으로 확 찍었어요.

이창성 씨는 1980년 5월, 카메라 한 대를 들고 광주로 급파됐습니다. 광주 곳곳을 누비며 시민군과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카메라 렌즈에 담았습니다. 이창성 기자의 이야기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전해드립니다.

■ 1980년 5월, 광주로 급파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취재 중인 이창성 사진기자1980년 5월 광주에서 취재 중인 이창성 사진기자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군인들이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학생들을 붙잡아서 막 머리를 곤봉으로 내려치고 무릎 꿇려가지고 끌고 가고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 당시 전남매일신문의 나경택 기자가 그 사진을 찍어서 그날 신문에 보도했죠. 그 다음날부터 서울 신문에 보도가 되는데, 그때 부장들 회의에서 "광주가 아무래도 심각하게 돌아간다. 큰일났다." 절 보고 빨리 광주에 내려가라고...

그날 밤, 이창성 사진기자는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컴컴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호판을 보니 부산 트럭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불을 지른 겁니다. 이 씨는 '이때다' 싶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어디선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이 기자는 그길로 골목을 따라 도망쳤습니다. 이 씨는 그게 광주에서의 최초의 기억이라고 회고합니다.

■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녹록치 않았던 취재 환경

이창성 기자가 직접 찍은 광주 시민들이 수레에 시신을 싣고 시위에 나서는 모습.이창성 기자가 직접 찍은 광주 시민들이 수레에 시신을 싣고 시위에 나서는 모습.

그 뒤로도 취재는 쉽지 않았습니다.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시위 양상이 20일 저녁부터 급변하더니 21일, 시민과 계엄군 사이의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이미 시민군은 몇천 명으로 불어난 상태였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됐고,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날았고, 거리 위로는 군홧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서울에서 파견된 취재기자들에게 '몸을 피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여기 취재기자들이 연락이 오는거야. "형님 빨리 피하십시오. 안 됩니다. 여기 있으면 큰일 납니다. 그 얘기를 듣고 다 피했다고. 나뿐이 아니고 서울에서 온 기자, 여기 취재하는 기자 다 피해서 아무도 시민군하고 군인하고 격돌하는 장면을 찍지 못해서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게 가장 부끄럽고, 나 역시 지금 생각하면 천추의 한이 될 정도로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때 용기 있게 그 자리를 못 지켰는지. 왜 기자가 자기 사명을 다 못하고 겁이 나서 달아났는지...

이창성 씨는 동료들과 함께 옛 전남도청 바로 옆 여관방으로 피신했습니다. 여러 차례 총성이 울리더니 상황이 마무리된 듯 했습니다. 이 씨는 상황을 살피려 옥상으로 쫓아 올라갔습니다. 순간 목격한 장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쪼그려 앉아 상황을 구경하던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던 것입니다. 이 씨는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습니다. 이 사진은 1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지면에 실릴 수 있었습니다.

■ 밤새도록 번뇌...시민군 지휘본부를 찾아가다

그날 밤, 이창성 씨는 밤새도록 고민했습니다. 현장에 있는 기자가 취재를 못 하는 현실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숙에 있는데, 밤새 교전하는 총소리가 나요. 기자들은 한발짝 나갈 수가 없어요. 나가면 죽으니까. 여인숙 앞에 거울이 깨지고, 울부 짖는 소리가 들리고... 근데 우리 기자들이 여기 와가지고 취재를 못하고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밤새도록 번뇌를 했습니다. 이럴 수 있는가? 새벽에 딱 먼 동이 틀 때 나 혼자 카메라 없이 그냥 나왔어요.

거리로 나오니 시민군들의 차가 보였습니다. 그 차를 얻어 탔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밥도 같이 먹으며 친구가 됐습니다. 반드시 취재하고 싶다며 어디 가서 협조를 받아야 하느냐 물으니 "같이 지휘본부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옛 전남도청에 꾸려진 지휘본부에 찾아갔습니다. 스무 명 남짓한 청년들이 열띤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민군은 이창성 씨에게 "왜 왔냐"고 물었습니다. 이창성 씨는 사력을 다해 설득했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남겨야 된다. 언젠가 여러분들의 역사적인 투쟁, 희생을 내가 꼭 세상에 내놓겠다.

1980년 5월, 이창성 사진기자가 직접 카메라에 담은 시민군의 모습1980년 5월, 이창성 사진기자가 직접 카메라에 담은 시민군의 모습

이창성 씨는 결국 취재 협조를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호위병 1명과 함께 취재가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경계하던 시민군들도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이창성 씨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씨가 곳곳을 누비고 다니자 다른 취재기자들과 사진기자들도 취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버스에 올라타 구호를 외치는 모습, 무장한 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시민군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습니다.

■그해 오월, 28년 만에 지켜진 시민군과의 약속

이창성 사진기자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28년 만에 펴낸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이창성 사진기자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28년 만에 펴낸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

하지만 그때 당시 촬영한 사진들은 모두 다 지면에 실릴 수 없었습니다. 이 씨는 '형편없는 사진'만 실렸다고 회고합니다. 그렇게 25일, '아비규환'이던 광주를 뒤로하고 이창성 씨는 서울로 철수했습니다. 그리곤 이틀 뒤인 27일 계엄군이 도청진압작전을 시행한다는 소식에 자진해서 광주로 되돌아옵니다.

그때 내가 제일 가슴 아팠던 것은 도청 지휘부에 가서 만났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어요. 내 사진에 나온 클로즈업 된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어. 내 사진에 나온 사람들이. 왜? 그 사람들은 가장 앞장서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니까. 지금도 5.18을 생각하면, 제 가슴이 아파요.
이창성 기자의 사진속에 담긴 광주 공동체의 모습.이창성 기자의 사진속에 담긴 광주 공동체의 모습.

광주 시민은 위대하고 자랑스럽다. 5.18을 생각하면, 시민운동으로서 참 세계에서 드문 민주화 투쟁이거든요. 이렇게 많은 희생을 하고 그랬잖아요. 역사라는게 참 누군가가 희생해야되고, 또 누군가가 앞장을 서야 하고, 그랬기 때문에 변화가 있는 거고, 발전이 있는 거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래요. 광주 시민은 자랑스럽다.

이창성 사진기자는 시민군에게도 "헛된 죽음이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씨의 사진 속 시민군들은 이제 고인이 되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씨의 사진은 영원히 남아 또 하나의 진실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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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채록 5·18]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겠다” 28년 만에 지킨 시민군과의 약속
    • 입력 2023-03-16 15:53:43
    취재K
1980년 5월 이창성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가 광주 금남로에서 찍은 시민군의 모습.
1980년 5월 광주에서 찍힌 한 장의 흑백사진. 한 청년이 기관총이 장착된 차량에 올라탄 채 카메라를 응시합니다. 매서운 눈빛엔 경계심이 가득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실형을 확정받은 보수논객 지만원 씨는 이 사진 속 청년을 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군, 이른바 '광수 1호'라고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실은 이 사진 속 인물은 우리에게 '김 군'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지난 2019년 강상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 군'을 통해 이 사진이 유명해졌고, 42년 만에 북한 특수군이 아닌 시민군 '차복환'씨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당시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이창성 씨입니다.

제가 찍은 사진 중에 가장 강렬하게 찍은 사진입니다. 22일 아침에 금남로에서 찍은 건데, 내가 사진 찍으니까 날 그냥 총 쏠 듯이 노려보더라고. 그래서 이거다 싶어가지고 망원으로 확 찍었어요.

이창성 씨는 1980년 5월, 카메라 한 대를 들고 광주로 급파됐습니다. 광주 곳곳을 누비며 시민군과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카메라 렌즈에 담았습니다. 이창성 기자의 이야기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전해드립니다.

■ 1980년 5월, 광주로 급파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취재 중인 이창성 사진기자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군인들이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학생들을 붙잡아서 막 머리를 곤봉으로 내려치고 무릎 꿇려가지고 끌고 가고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 당시 전남매일신문의 나경택 기자가 그 사진을 찍어서 그날 신문에 보도했죠. 그 다음날부터 서울 신문에 보도가 되는데, 그때 부장들 회의에서 "광주가 아무래도 심각하게 돌아간다. 큰일났다." 절 보고 빨리 광주에 내려가라고...

그날 밤, 이창성 사진기자는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컴컴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트럭 한 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호판을 보니 부산 트럭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불을 지른 겁니다. 이 씨는 '이때다' 싶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어디선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이 기자는 그길로 골목을 따라 도망쳤습니다. 이 씨는 그게 광주에서의 최초의 기억이라고 회고합니다.

■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녹록치 않았던 취재 환경

이창성 기자가 직접 찍은 광주 시민들이 수레에 시신을 싣고 시위에 나서는 모습.
그 뒤로도 취재는 쉽지 않았습니다.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던 시위 양상이 20일 저녁부터 급변하더니 21일, 시민과 계엄군 사이의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이미 시민군은 몇천 명으로 불어난 상태였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됐고,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날았고, 거리 위로는 군홧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서울에서 파견된 취재기자들에게 '몸을 피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여기 취재기자들이 연락이 오는거야. "형님 빨리 피하십시오. 안 됩니다. 여기 있으면 큰일 납니다. 그 얘기를 듣고 다 피했다고. 나뿐이 아니고 서울에서 온 기자, 여기 취재하는 기자 다 피해서 아무도 시민군하고 군인하고 격돌하는 장면을 찍지 못해서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게 가장 부끄럽고, 나 역시 지금 생각하면 천추의 한이 될 정도로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때 용기 있게 그 자리를 못 지켰는지. 왜 기자가 자기 사명을 다 못하고 겁이 나서 달아났는지...

이창성 씨는 동료들과 함께 옛 전남도청 바로 옆 여관방으로 피신했습니다. 여러 차례 총성이 울리더니 상황이 마무리된 듯 했습니다. 이 씨는 상황을 살피려 옥상으로 쫓아 올라갔습니다. 순간 목격한 장면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쪼그려 앉아 상황을 구경하던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던 것입니다. 이 씨는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습니다. 이 사진은 15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지면에 실릴 수 있었습니다.

■ 밤새도록 번뇌...시민군 지휘본부를 찾아가다

그날 밤, 이창성 씨는 밤새도록 고민했습니다. 현장에 있는 기자가 취재를 못 하는 현실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숙에 있는데, 밤새 교전하는 총소리가 나요. 기자들은 한발짝 나갈 수가 없어요. 나가면 죽으니까. 여인숙 앞에 거울이 깨지고, 울부 짖는 소리가 들리고... 근데 우리 기자들이 여기 와가지고 취재를 못하고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밤새도록 번뇌를 했습니다. 이럴 수 있는가? 새벽에 딱 먼 동이 틀 때 나 혼자 카메라 없이 그냥 나왔어요.

거리로 나오니 시민군들의 차가 보였습니다. 그 차를 얻어 탔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밥도 같이 먹으며 친구가 됐습니다. 반드시 취재하고 싶다며 어디 가서 협조를 받아야 하느냐 물으니 "같이 지휘본부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옛 전남도청에 꾸려진 지휘본부에 찾아갔습니다. 스무 명 남짓한 청년들이 열띤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민군은 이창성 씨에게 "왜 왔냐"고 물었습니다. 이창성 씨는 사력을 다해 설득했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남겨야 된다. 언젠가 여러분들의 역사적인 투쟁, 희생을 내가 꼭 세상에 내놓겠다.

1980년 5월, 이창성 사진기자가 직접 카메라에 담은 시민군의 모습
이창성 씨는 결국 취재 협조를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호위병 1명과 함께 취재가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경계하던 시민군들도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이창성 씨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씨가 곳곳을 누비고 다니자 다른 취재기자들과 사진기자들도 취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버스에 올라타 구호를 외치는 모습, 무장한 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시민군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습니다.

■그해 오월, 28년 만에 지켜진 시민군과의 약속

이창성 사진기자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28년 만에 펴낸 사진집 〈28년 만의 약속〉
하지만 그때 당시 촬영한 사진들은 모두 다 지면에 실릴 수 없었습니다. 이 씨는 '형편없는 사진'만 실렸다고 회고합니다. 그렇게 25일, '아비규환'이던 광주를 뒤로하고 이창성 씨는 서울로 철수했습니다. 그리곤 이틀 뒤인 27일 계엄군이 도청진압작전을 시행한다는 소식에 자진해서 광주로 되돌아옵니다.

그때 내가 제일 가슴 아팠던 것은 도청 지휘부에 가서 만났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어요. 내 사진에 나온 클로즈업 된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어. 내 사진에 나온 사람들이. 왜? 그 사람들은 가장 앞장서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니까. 지금도 5.18을 생각하면, 제 가슴이 아파요.
이창성 기자의 사진속에 담긴 광주 공동체의 모습.
광주 시민은 위대하고 자랑스럽다. 5.18을 생각하면, 시민운동으로서 참 세계에서 드문 민주화 투쟁이거든요. 이렇게 많은 희생을 하고 그랬잖아요. 역사라는게 참 누군가가 희생해야되고, 또 누군가가 앞장을 서야 하고, 그랬기 때문에 변화가 있는 거고, 발전이 있는 거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래요. 광주 시민은 자랑스럽다.

이창성 사진기자는 시민군에게도 "헛된 죽음이 아니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씨의 사진 속 시민군들은 이제 고인이 되어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씨의 사진은 영원히 남아 또 하나의 진실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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