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키우고 인플레가 집어삼킨 혁신은행

입력 2023.03.20 (08:00) 수정 2023.03.20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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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은행 SVB는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윤종원 전 기업은행장은 본인의 소셜미디어에 "SVB가 담보나 (현재의) 재무지표가 아닌 미래 성장성에 기초한 벤처대출을 소개했는데, 시범 도입해보겠다. (2022.4)"고 올렸다.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SVB가 그만큼 주목받았다는 얘기다. 금융과 벤처기업 협업의 선두에 있었다. 대출과 투자의 형식을 적절히 섞어 은행은 리스크를 줄이고, 혁신기업은 이자 부담을 줄였다. 실리콘밸리 혁신기업의 거의 절반이 SVB와 거래했다.

지속 가능한 사회적 투자, 지역사회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다. 다양성도 앞서나갔다. 직원과 임원 중에 여성이나 유색인종 비율이 높았다.

이렇게 눈부셨던 SVB는 왜 순식간에 몰락했을까. 이 점을 탐구해나가는 것이 기사의 목적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 시대 금융 자본주의의 본질과 특수성을 포착해보려 한다.


■ ①초연결

이런 뱅크런은 없었다. 공시 한 번에 단 하루의 뱅크런이 있었고, 은행은 바로 폐쇄됐다.

운명의 날은 3월 8일이었다. 8-K 공시(재무상태에 대한 예고 없는 공시)가 발단이었다. SVB는 "예금이 빠져나가 자본확충을 해야 한다. 또 최근에 예금 인출에 대응하느라 채권을 팔아야 했는데, 그로 인해 18억 달러(2조 3천억 원)의 손실을 보았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뱅크런이었다. 예금이 빛의 속도로 빠져나갔다. 예금자들은 하루에 무려 50조 원 이상을 빼려했다. 초현실적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초연결 시대를 언급했다. 주요 벤쳐 캐피탈사(VC) 관계자들이 소셜미디어에 '나 뺐어, 너희들도 빼는 게 좋을걸'이라고 올렸고, 그걸 본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켜고 뱅킹앱에 접속했다. 이들은 클릭 몇 번으로 21세기의 뱅크런을 만들어냈다.

상황을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소수계좌에 집중된 예금이다. WSJ은 불과 3만 7천 개 계좌에 절대다수 예금이 들어있었다고 했다. 이 3만 7천개 계좌가 뇌관이 됐다. 예금자 보호는 계좌당 3억 원 까지 밖에 안 되는데, 수백 혹은 수천억 원이 든 계좌가 있으면 당연히 서둘러 움직일 수 밖에 없다. SVB는 초연결 시대에 뱅크런이 발생할 최적의 조건을 다 갖춘 은행이었던 셈이다.

■ ②초유동성

그러나 몰락의 순간만 보면 설명은 불충분해진다. 파산의 전모는 좀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한다.

아주 멀리 갈 필요는 없다. 3년 전, 2020년 코로나 19 대유행이다. 전염병에 사람들은 활동을 멈췄는데, 기술기업들은 물을 만났다.

초저금리 시대, 초유동성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시장이 만개했고, 미국의 빅테크 주가는 묻지마 상승했다. 스타트업의 전성시대가 왔다. 기업공개 IPO가 폭발했고, 실리콘 밸리에는 돈이 넘쳤다.

이들의 주거래 은행 SVB의 자산은 빛의 속도로 불어났다. 예금 잔액은 3년 만에 거의 네 배가 되었다. 스타트업 기업을 상대하는 매우 특수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SVB가 미국 16대 은행이 된 것은 이 초유동성의 시대 덕분이다.


■ ③차질이 생긴 은행업의 본질

예금자와 대출자 사이에는 근본적 갈등이 있다. 예금자는 (높은) 이자를 받고 싶고, 동시에 (언제든) 원할 때 돈을 찾고 싶다. 대출자는 (낮은) 이자에 빌려 (가급적 오래) 안 갚고 싶다. 이렇게 인센티브가 정반대인 두 집단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것이 금융중개기관, 은행의 역할이다.

초유동성의 시기에 급속히 성장한 SVB는 바로 이 은행업의 본질에서 난관에 부딪힌다. 예금은 빛의 속도로 느는데, 대출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선 스타트업들은 이자 내는 은행 돈은 필요가 없다. 은행 입장에서도 ‘위험성이 큰 스타트업 기업’에 무작정 돈을 빌려주기도 쉽지 않다.

그 결과 SVB의 예금과 대출 사이에는 큰 갭이 생기기 시작한다. 2017년 210억 달러 수준이던 예금과 대출의 차이는 2021년 1,200억 달러 수준까지 크게 벌어진다.


보통의 시중 은행들이라면 '주택담보대출'을 늘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기업 금융 중심인 SVB에게 주담대는 전문분야가 아니다. SVB는 대신 안전한 투자처를 찾게 되었다. 최고의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나 우량한 주택저당증권(MBS)에 넣었다.

실제로 해당 부문 투자는 240억 달러(2018)에서 490억(2020) 달러를 거쳐 1,280억(2021) 달러까지 급팽창한다. 3년 만에 1,000억 달러 이상 늘었다.

그렇게 SVB는 2021년, 빌려준 돈(690억 달러) 보다 투자한 돈(1,280억 달러)이 약 2배 많은 은행이 되었다.

■④'누구도 예상 못 한' 초고속 금리 인상

이듬해인 2022년, 가혹한 상황이 전개된다. 연준이 인플레이션 예상에서 완전히 실패한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급속한 금리 인상에 나선 것이다. 연초 제로금리 수준이던 기준금리는 연말에 4.5%가 된다. 4%p 넘게 치솟았다.

큰 인상 폭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예상치 못했다'는 점이다. 연준조차 2022년을 시작할 때는 올려봐야 0.25%p~0.5%p 정도 인상을 예상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초고속 긴축, SVB에게 특히 더 가혹했다. 우선은 스타트업 거품이 급속히 꺼졌다. 당장 버는 돈이 없는데, 추가 투자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옥석 가리기의 시간, 쌓은 예금으로 버틴다. 예금을 찾아서 직원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SVB 예금잔고는 급속히 줄었다. 여윳돈이 말라가는데 고객들은 계속 돈을 달라 한다.

그러자 채권 투자가 문제가 된다. 부실해진건 아니다. 미 국채는 여전히 초우량 자산이다. 문제는 초저금리 상황이던 2021년에 투자한 채권은 표시 금리가 낮아서 금리 상승기에는 제값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고객 돈을 돌려줘야 하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헐값매각 했고, ‘2조 3천억 달러 손해를 봤다’는 3월 9일의 공시는 바로 이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누가 ‘2022년에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긴축이 벌어질 것'이라고 귓뜸 만 해줬더라면, 예상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⑤ 다음 타자는 누구인가?

일단 긴축의 시대가 도래하면 사람들은 다음 타자를 찾는다. 미국의 16번째 대형 은행에서 뱅크런이 일어났다. 시그니처 뱅크도 연이어 파산한다. 뱅크런의 시대가 돌아온 것이냐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이때 예금자와 투자자들의 금과옥조는 이것이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내가 가장 먼저 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노벨위원회,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 때의 일러스트노벨위원회,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 때의 일러스트

다음 타자가 호명된다. 우선 대서양 건너편 크레디트 스위스CS가 입길에 오른다. CS는 UBS와 함께 ‘금융허브’ 스위스를 대표하는 양대 금융기관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거의 피해 입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은행’이기도 하니 충격적인 일이다.

다만, 지난 수 년간 벌어진 일을 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CS가 수년간 어리석은 투자(그린실, 아케고스)로 거대한 손실을 입고, 부도덕한(돈세탁, 직원 사찰) 경영상 실책을 반복하면서 허약해졌다고 평가한다. 특히 한국계 빌 황이 이끈 아케고스 캐피털이 무너질 때(2021.3) CS는 글로벌 은행 가운데 가장 많은 55억 달러, 약 7조 원의 손실을 봤다.

경쟁자 UBS와의 주가를 비교한 그래프를 보면 2021년 3월부터 달라지는 두 은행의 운명이 확연히 드러난다. CS는 지속적인 주가 폭락과 경영 부실, 예금인출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결국 경쟁자였던 UBS가 CS를 32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미국에서는 서열 14위, 퍼스트 리퍼블릭이 다음 타자다. 한 때 메릴린치 품에 있었던 이 은행은 부유층 자금관리와 모기지 부문이 주종목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은행이 SVB와 유사해서 우려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SVB처럼 최근 3년 동안 잔고가 크게 부풀었고, 소수의 큰 고객이 맡긴 돈이 많다. 유동성이 낮은 부동산대출 노출도가 높아 단기간에 인출사태가 벌어질 경우 대응하기 어렵다. 주가가 폭락했고 예금 인출 사태에도 노출됐다.

■⑥ 위기 수습의 열쇠는 '신뢰'

노벨 위원회는 지난해 미국 연준의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 외 3인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주면서, 이들의 공로가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인류의 역량을 키운 점’이라고 표현했다. 거칠게 말해서 뱅크런 막는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핵심은 신뢰다.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백약이 무효다. 신뢰 회복이 우선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의 뒤에 있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주어야 한다. 돈의 규모는 그 다음 문제다.

처방전은 다양하다. 미 정부는 SVB 예금을 지급보증했다. 스위스는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CS를(스위스 금융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퍼스트 리퍼블릭을 지키는 데는 미국 금융의 별 JP모건이 나섰다. 은행 10여 곳을 규합해 함께 300억 달러를 투입한다고 선언했다. WSJ은 이 계획의 뒤에 미 재무부와 JP모건의 CEO 다이먼의 협의가 있었다며, 돈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월스트리트 은행은 건재하다'는 신뢰의 메시지라고 했다.


■ 2008년과 다른가?

그러나 상황은 진행 중이다. 뱅크런의 조짐은 여전하다. SVB를 닮은 퍼스트 리퍼블릭, 지속적으로 부실을 쌓은 CS, 그 뒤에 또 다른 타자가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세계는 2008년이 재현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한다.

미래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만은 지적할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모두가 걱정 하여야 할 광범위한 부실’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2008년에는 부실 부동산 대출(서브프라임)이라는 ‘근본적인 불량감자’가 있었다. 부실한 대출을 가지고 아무도 이해 못할 복잡한 파생금융 기법을 동원해 갑자기 ‘신종 특급 우량감자’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감독기관은 부실했다. 거짓말이었는데,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들은 탐욕으로 무장하고 그 불량 감자 위에 거대한 모래성을 쌓고 폭탄 돌리기를 했다. 진실이 드러난 순간 전 세계 금융기관은 모두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전 세계 자본 흐름의 90 퍼센트 이상이 줄었다. 마치 거대한 어떤 무게중심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금융시스템 전체가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붕괴, 애덤 투즈)

이번 사태에선 아직 그런 '근원적 불량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크레디트스위스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다. 트럼프 정부의 규제 완화가 일부 문제일 수는 있지만,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세계의 금융기관(SIFI) 감시는 여전히 철저하다.

아직은 초연결과 초유동성, 그리고 SVB의 독특한 상황, 아무도 예상 못한 급속한 금리인상 같은 것, 그리고 코로나가 키우고 인플레가 집어삼킨 혁신은행의 별 SVB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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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가 키우고 인플레가 집어삼킨 혁신은행
    • 입력 2023-03-20 08:00:23
    • 수정2023-03-20 08:08:59
    취재K

실리콘밸리은행 SVB는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윤종원 전 기업은행장은 본인의 소셜미디어에 "SVB가 담보나 (현재의) 재무지표가 아닌 미래 성장성에 기초한 벤처대출을 소개했는데, 시범 도입해보겠다. (2022.4)"고 올렸다.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SVB가 그만큼 주목받았다는 얘기다. 금융과 벤처기업 협업의 선두에 있었다. 대출과 투자의 형식을 적절히 섞어 은행은 리스크를 줄이고, 혁신기업은 이자 부담을 줄였다. 실리콘밸리 혁신기업의 거의 절반이 SVB와 거래했다.

지속 가능한 사회적 투자, 지역사회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다. 다양성도 앞서나갔다. 직원과 임원 중에 여성이나 유색인종 비율이 높았다.

이렇게 눈부셨던 SVB는 왜 순식간에 몰락했을까. 이 점을 탐구해나가는 것이 기사의 목적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 시대 금융 자본주의의 본질과 특수성을 포착해보려 한다.


■ ①초연결

이런 뱅크런은 없었다. 공시 한 번에 단 하루의 뱅크런이 있었고, 은행은 바로 폐쇄됐다.

운명의 날은 3월 8일이었다. 8-K 공시(재무상태에 대한 예고 없는 공시)가 발단이었다. SVB는 "예금이 빠져나가 자본확충을 해야 한다. 또 최근에 예금 인출에 대응하느라 채권을 팔아야 했는데, 그로 인해 18억 달러(2조 3천억 원)의 손실을 보았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뱅크런이었다. 예금이 빛의 속도로 빠져나갔다. 예금자들은 하루에 무려 50조 원 이상을 빼려했다. 초현실적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초연결 시대를 언급했다. 주요 벤쳐 캐피탈사(VC) 관계자들이 소셜미디어에 '나 뺐어, 너희들도 빼는 게 좋을걸'이라고 올렸고, 그걸 본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켜고 뱅킹앱에 접속했다. 이들은 클릭 몇 번으로 21세기의 뱅크런을 만들어냈다.

상황을 악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소수계좌에 집중된 예금이다. WSJ은 불과 3만 7천 개 계좌에 절대다수 예금이 들어있었다고 했다. 이 3만 7천개 계좌가 뇌관이 됐다. 예금자 보호는 계좌당 3억 원 까지 밖에 안 되는데, 수백 혹은 수천억 원이 든 계좌가 있으면 당연히 서둘러 움직일 수 밖에 없다. SVB는 초연결 시대에 뱅크런이 발생할 최적의 조건을 다 갖춘 은행이었던 셈이다.

■ ②초유동성

그러나 몰락의 순간만 보면 설명은 불충분해진다. 파산의 전모는 좀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한다.

아주 멀리 갈 필요는 없다. 3년 전, 2020년 코로나 19 대유행이다. 전염병에 사람들은 활동을 멈췄는데, 기술기업들은 물을 만났다.

초저금리 시대, 초유동성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시장이 만개했고, 미국의 빅테크 주가는 묻지마 상승했다. 스타트업의 전성시대가 왔다. 기업공개 IPO가 폭발했고, 실리콘 밸리에는 돈이 넘쳤다.

이들의 주거래 은행 SVB의 자산은 빛의 속도로 불어났다. 예금 잔액은 3년 만에 거의 네 배가 되었다. 스타트업 기업을 상대하는 매우 특수한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SVB가 미국 16대 은행이 된 것은 이 초유동성의 시대 덕분이다.


■ ③차질이 생긴 은행업의 본질

예금자와 대출자 사이에는 근본적 갈등이 있다. 예금자는 (높은) 이자를 받고 싶고, 동시에 (언제든) 원할 때 돈을 찾고 싶다. 대출자는 (낮은) 이자에 빌려 (가급적 오래) 안 갚고 싶다. 이렇게 인센티브가 정반대인 두 집단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것이 금융중개기관, 은행의 역할이다.

초유동성의 시기에 급속히 성장한 SVB는 바로 이 은행업의 본질에서 난관에 부딪힌다. 예금은 빛의 속도로 느는데, 대출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선 스타트업들은 이자 내는 은행 돈은 필요가 없다. 은행 입장에서도 ‘위험성이 큰 스타트업 기업’에 무작정 돈을 빌려주기도 쉽지 않다.

그 결과 SVB의 예금과 대출 사이에는 큰 갭이 생기기 시작한다. 2017년 210억 달러 수준이던 예금과 대출의 차이는 2021년 1,200억 달러 수준까지 크게 벌어진다.


보통의 시중 은행들이라면 '주택담보대출'을 늘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기업 금융 중심인 SVB에게 주담대는 전문분야가 아니다. SVB는 대신 안전한 투자처를 찾게 되었다. 최고의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나 우량한 주택저당증권(MBS)에 넣었다.

실제로 해당 부문 투자는 240억 달러(2018)에서 490억(2020) 달러를 거쳐 1,280억(2021) 달러까지 급팽창한다. 3년 만에 1,000억 달러 이상 늘었다.

그렇게 SVB는 2021년, 빌려준 돈(690억 달러) 보다 투자한 돈(1,280억 달러)이 약 2배 많은 은행이 되었다.

■④'누구도 예상 못 한' 초고속 금리 인상

이듬해인 2022년, 가혹한 상황이 전개된다. 연준이 인플레이션 예상에서 완전히 실패한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급속한 금리 인상에 나선 것이다. 연초 제로금리 수준이던 기준금리는 연말에 4.5%가 된다. 4%p 넘게 치솟았다.

큰 인상 폭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예상치 못했다'는 점이다. 연준조차 2022년을 시작할 때는 올려봐야 0.25%p~0.5%p 정도 인상을 예상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초고속 긴축, SVB에게 특히 더 가혹했다. 우선은 스타트업 거품이 급속히 꺼졌다. 당장 버는 돈이 없는데, 추가 투자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옥석 가리기의 시간, 쌓은 예금으로 버틴다. 예금을 찾아서 직원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SVB 예금잔고는 급속히 줄었다. 여윳돈이 말라가는데 고객들은 계속 돈을 달라 한다.

그러자 채권 투자가 문제가 된다. 부실해진건 아니다. 미 국채는 여전히 초우량 자산이다. 문제는 초저금리 상황이던 2021년에 투자한 채권은 표시 금리가 낮아서 금리 상승기에는 제값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고객 돈을 돌려줘야 하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헐값매각 했고, ‘2조 3천억 달러 손해를 봤다’는 3월 9일의 공시는 바로 이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누가 ‘2022년에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긴축이 벌어질 것'이라고 귓뜸 만 해줬더라면, 예상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⑤ 다음 타자는 누구인가?

일단 긴축의 시대가 도래하면 사람들은 다음 타자를 찾는다. 미국의 16번째 대형 은행에서 뱅크런이 일어났다. 시그니처 뱅크도 연이어 파산한다. 뱅크런의 시대가 돌아온 것이냐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이때 예금자와 투자자들의 금과옥조는 이것이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내가 가장 먼저 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노벨위원회,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 때의 일러스트
다음 타자가 호명된다. 우선 대서양 건너편 크레디트 스위스CS가 입길에 오른다. CS는 UBS와 함께 ‘금융허브’ 스위스를 대표하는 양대 금융기관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거의 피해 입지 않은 거의 유일한 은행’이기도 하니 충격적인 일이다.

다만, 지난 수 년간 벌어진 일을 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CS가 수년간 어리석은 투자(그린실, 아케고스)로 거대한 손실을 입고, 부도덕한(돈세탁, 직원 사찰) 경영상 실책을 반복하면서 허약해졌다고 평가한다. 특히 한국계 빌 황이 이끈 아케고스 캐피털이 무너질 때(2021.3) CS는 글로벌 은행 가운데 가장 많은 55억 달러, 약 7조 원의 손실을 봤다.

경쟁자 UBS와의 주가를 비교한 그래프를 보면 2021년 3월부터 달라지는 두 은행의 운명이 확연히 드러난다. CS는 지속적인 주가 폭락과 경영 부실, 예금인출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결국 경쟁자였던 UBS가 CS를 32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미국에서는 서열 14위, 퍼스트 리퍼블릭이 다음 타자다. 한 때 메릴린치 품에 있었던 이 은행은 부유층 자금관리와 모기지 부문이 주종목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은행이 SVB와 유사해서 우려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SVB처럼 최근 3년 동안 잔고가 크게 부풀었고, 소수의 큰 고객이 맡긴 돈이 많다. 유동성이 낮은 부동산대출 노출도가 높아 단기간에 인출사태가 벌어질 경우 대응하기 어렵다. 주가가 폭락했고 예금 인출 사태에도 노출됐다.

■⑥ 위기 수습의 열쇠는 '신뢰'

노벨 위원회는 지난해 미국 연준의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 외 3인에게 노벨 경제학상을 주면서, 이들의 공로가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인류의 역량을 키운 점’이라고 표현했다. 거칠게 말해서 뱅크런 막는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핵심은 신뢰다.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백약이 무효다. 신뢰 회복이 우선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의 뒤에 있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주어야 한다. 돈의 규모는 그 다음 문제다.

처방전은 다양하다. 미 정부는 SVB 예금을 지급보증했다. 스위스는 중앙은행이 돈을 풀어 CS를(스위스 금융을)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퍼스트 리퍼블릭을 지키는 데는 미국 금융의 별 JP모건이 나섰다. 은행 10여 곳을 규합해 함께 300억 달러를 투입한다고 선언했다. WSJ은 이 계획의 뒤에 미 재무부와 JP모건의 CEO 다이먼의 협의가 있었다며, 돈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월스트리트 은행은 건재하다'는 신뢰의 메시지라고 했다.


■ 2008년과 다른가?

그러나 상황은 진행 중이다. 뱅크런의 조짐은 여전하다. SVB를 닮은 퍼스트 리퍼블릭, 지속적으로 부실을 쌓은 CS, 그 뒤에 또 다른 타자가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세계는 2008년이 재현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한다.

미래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만은 지적할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모두가 걱정 하여야 할 광범위한 부실’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다.

2008년에는 부실 부동산 대출(서브프라임)이라는 ‘근본적인 불량감자’가 있었다. 부실한 대출을 가지고 아무도 이해 못할 복잡한 파생금융 기법을 동원해 갑자기 ‘신종 특급 우량감자’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감독기관은 부실했다. 거짓말이었는데,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들은 탐욕으로 무장하고 그 불량 감자 위에 거대한 모래성을 쌓고 폭탄 돌리기를 했다. 진실이 드러난 순간 전 세계 금융기관은 모두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전 세계 자본 흐름의 90 퍼센트 이상이 줄었다. 마치 거대한 어떤 무게중심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금융시스템 전체가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붕괴, 애덤 투즈)

이번 사태에선 아직 그런 '근원적 불량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크레디트스위스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다. 트럼프 정부의 규제 완화가 일부 문제일 수는 있지만,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세계의 금융기관(SIFI) 감시는 여전히 철저하다.

아직은 초연결과 초유동성, 그리고 SVB의 독특한 상황, 아무도 예상 못한 급속한 금리인상 같은 것, 그리고 코로나가 키우고 인플레가 집어삼킨 혁신은행의 별 SVB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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