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가격 내려라? 볼 게 없다?…댓글 7천여 개 달린 ‘한국영화 위기론’ 속사정

입력 2023.03.23 (07:01) 수정 2023.03.2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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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KBS 9시 뉴스를 통해 '한국 영화 위기론'을 제기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달했습니다. 방송 뒤 7천 7백 개가 넘는 유튜브 댓글을 포함해 많은 분들이 의견을 남겨 주셨는데요. 방송 리포트에서 다 담지 못했던 인터뷰 내용 등을 중심으로, 업계의 속사정과 취재하며 느낀 고민 등을 좀더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 가격 내리면 해결? 그게 답이 아니라는 극장계

우선 가격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많은 분이 댓글에서 티켓값이 너무 비싸졌다고 지적했습니다. '타짜'와 '암살' 등을 만든 최동훈 감독이 공개적으로 티켓값 조정 필요성을 말할 정돕니다.

하지만 극장 업계는 가격 인하를 검토하기보단, 기술 특별관 등에 투자를 늘려 관객을 유인하겠단 입장입니다. 수십만 원을 오가는 클래식이나 뮤지컬 공연 등도 성황을 이루는 것처럼, 진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지갑이 열린다는 논리입니다.

일례로 누적 관객 수천만을 넘긴 '아바타 : 물의 길'의 경우 관객의 53%가 일반관보다 더 비싼 특수 상영관을 선택했습니다. 가수 임영웅의 공연 실황 등을 담은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의 경우에도 더 비싼 스크린X 관을 택한 관객의 비율이 일반관의 2배가 넘습니다.

중요한 건 '15,000원이 아깝지 않은 경험을 극장이 제공해 줄 수 있느냐'는 문젭니다. 극장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최근 응원 상영회 등 이벤트 기획에 열심인 이유입니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이용해 휴대 전화 화면으로 볼 땐 느낄 수 없는 즐거움, 즉 상영관 안에서 다 함께 환호하고 감동하는 경험은 극장만의 장점이라는 거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영화가 응원 상영회에 어울리는 것도 아닐뿐더러, 영화 자체가 재미있지 않으면 극장의 강점은 무의미합니다. '재밌으면 본다, 재미없으면 공짜로 보여줘도 안 본다'는 댓글은 핵심을 찌릅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공동대표인 윤제균 감독.한국영화감독조합 공동대표인 윤제균 감독.

■ 볼 게 없다? "아예 개봉작 없을지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난제입니다. 재미가 없어서 영화관에 안 가면, 흥행이 안 된단 이유로 영화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사라지고, 그러면 또다시 좋은 작품을 보기 힘들어지는 흐름이죠.

무엇보다 소비자 입장에선 굳이 영화를 볼 이유가 줄고 있습니다. 2시간을 집중해야 하는 영화에 비해, '숏폼' 유튜브 컨텐츠를 비롯해 더 빠르고 재미있는 컨텐츠가 많으니까요.

한국영화감독조합 공동대표 자격으로 인터뷰를 요청한 윤제균 감독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일부러 찾아가는 '맛집'이 아니라 수많은 뷔페 음식 중 하나가 됐다는 비유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영화 위기론은 수차례 반복됐지만, '이번엔 차원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20년 넘게 영화만 했는데, 이때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차원이 다른 어려움인 것 같아요. 투자가 속된 말로 거의 씨가 말랐기 때문에…."

코로나 19로 영화 제작비의 70~80%를 대 왔던 펀드나 창업투자사가 떠나면서 대기업 투자 의존도가 더욱 강화됐고, 모험을 꺼리는 자본 논리에 따라 신규 영화 투자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는 겁니다. 내년 후반기엔 극장에 걸 한국 영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윤 감독은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감독들의 밥그릇 챙기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감독들, 배우들은 말씀하시는 대로 드라마 하면 됩니다. 거기(OTT)는 돈이 많이 몰려있고 투자가 많이 이뤄지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건 한국 영화입니다. (중략) 영화는 어떤 수많은 콘텐츠들의 어떤 뿌리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해요. 콘텐츠를 만드는 근간이 흔들리면 나무 전체가 흔들리듯이, 영화의 수준이 낮아지면 다른 컨텐츠들도 하향 평준화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물론, 이 호소에 동의할지는 관객의 몫입니다.

박동수 영화평론가.박동수 영화평론가.

■ 영화의 위기? "거품이 빠지는 시기"

잠시 개인적인 이야길 하자면, 취재를 하며 지금이 어쩌면 한국영화만이 아니라 '극장 영화' 자체의 위기일지 모르겠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국내 영화 산업 매출의 대부분을 극장이 차지하는 수익 구조상, 그간 '극장의 위기'는 '영화의 위기'로 자동 치환됐습니다. 윤제균 감독의 호소 역시 대작들이 줄줄이 극장 흥행에 실패하며 나온 얘기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극장 자체가 중요해지지 않는 시기가 오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OTT를 통해 해외 시장에서 인기를 얻는 것처럼, 영화만의 생존 방식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극장 매출 비율은 코로나19 삼 년을 거치며 60%대까지 내려왔고, OTT 시장은 꾸준히 성장셉니다.

그래서, 극장에 대한 '추억 보정' 없이 객관적 진단을 내려줄 평론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스마트폰 네이티브' 세대인 1995년생 박동수 평론가를 만난 이유입니다.

박 평론가는 '양적 거품'이란 말로 현 상황을 진단했습니다. '상영관이 10개면 8개는 같은 영화를 트는'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독과점과, 즐길 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비교적 싼 값에 즐길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성장을 이어왔을 뿐이라는 겁니다.

2010년대부터 시즌마다 4~5편씩 대작들이 출혈 경쟁을 벌이며 맞붙을 만큼 몸집을 키운 한국 영화계가 원래 시장 규모에 맞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이 될 거라고도 했습니다.

사실 2004년 영화 '실미도'가 '꿈의 고지'로 여겨지던 천만 관객을 달성한 뒤로, 한국 영화는 2019년 한 해에 천만 영화가 5편이나 나올 만큼 호황을 누렸습니다.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횟수 4.37회로 세계 1위를 기록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는 영화 자체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는 게 박 평론가의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극장에 가는 이유 1순위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데이트나 가족 나들이를 위해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문화는 있지만, 영화 자체를 보러 극장에 달려가는 관객은 사실 많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극장 문화는 있어도 관객 문화는 없고, 극장 스스로도 다양한 선택을 보장하며 '관객들의 공간'이 되기 위한 고민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비판도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나온 결론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증명하라'는 근본적 요구입니다.

"극장은 기본적으로 서로 모르는 2백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똑같은 걸 보는 형태잖아요. 그게 어떻게 하면 기억에 남고 재밌는 경험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줘야 하는 거죠. 그게 좋은 영화와도 맞물리는 거기도 하겠고요."

먼 훗날, 이 시기는 과연 어떻게 기억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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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가격 내려라? 볼 게 없다?…댓글 7천여 개 달린 ‘한국영화 위기론’ 속사정
    • 입력 2023-03-23 07:01:12
    • 수정2023-03-29 13:43:31
    취재후·사건후
지난 20일, KBS 9시 뉴스를 통해 '한국 영화 위기론'을 제기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달했습니다. 방송 뒤 7천 7백 개가 넘는 유튜브 댓글을 포함해 많은 분들이 의견을 남겨 주셨는데요. 방송 리포트에서 다 담지 못했던 인터뷰 내용 등을 중심으로, 업계의 속사정과 취재하며 느낀 고민 등을 좀더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 가격 내리면 해결? 그게 답이 아니라는 극장계

우선 가격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많은 분이 댓글에서 티켓값이 너무 비싸졌다고 지적했습니다. '타짜'와 '암살' 등을 만든 최동훈 감독이 공개적으로 티켓값 조정 필요성을 말할 정돕니다.

하지만 극장 업계는 가격 인하를 검토하기보단, 기술 특별관 등에 투자를 늘려 관객을 유인하겠단 입장입니다. 수십만 원을 오가는 클래식이나 뮤지컬 공연 등도 성황을 이루는 것처럼, 진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지갑이 열린다는 논리입니다.

일례로 누적 관객 수천만을 넘긴 '아바타 : 물의 길'의 경우 관객의 53%가 일반관보다 더 비싼 특수 상영관을 선택했습니다. 가수 임영웅의 공연 실황 등을 담은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의 경우에도 더 비싼 스크린X 관을 택한 관객의 비율이 일반관의 2배가 넘습니다.

중요한 건 '15,000원이 아깝지 않은 경험을 극장이 제공해 줄 수 있느냐'는 문젭니다. 극장도 이를 알고 있습니다. 최근 응원 상영회 등 이벤트 기획에 열심인 이유입니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이용해 휴대 전화 화면으로 볼 땐 느낄 수 없는 즐거움, 즉 상영관 안에서 다 함께 환호하고 감동하는 경험은 극장만의 장점이라는 거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영화가 응원 상영회에 어울리는 것도 아닐뿐더러, 영화 자체가 재미있지 않으면 극장의 강점은 무의미합니다. '재밌으면 본다, 재미없으면 공짜로 보여줘도 안 본다'는 댓글은 핵심을 찌릅니다.

한국영화감독조합 공동대표인 윤제균 감독.
■ 볼 게 없다? "아예 개봉작 없을지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난제입니다. 재미가 없어서 영화관에 안 가면, 흥행이 안 된단 이유로 영화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사라지고, 그러면 또다시 좋은 작품을 보기 힘들어지는 흐름이죠.

무엇보다 소비자 입장에선 굳이 영화를 볼 이유가 줄고 있습니다. 2시간을 집중해야 하는 영화에 비해, '숏폼' 유튜브 컨텐츠를 비롯해 더 빠르고 재미있는 컨텐츠가 많으니까요.

한국영화감독조합 공동대표 자격으로 인터뷰를 요청한 윤제균 감독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일부러 찾아가는 '맛집'이 아니라 수많은 뷔페 음식 중 하나가 됐다는 비유를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영화 위기론은 수차례 반복됐지만, '이번엔 차원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20년 넘게 영화만 했는데, 이때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차원이 다른 어려움인 것 같아요. 투자가 속된 말로 거의 씨가 말랐기 때문에…."

코로나 19로 영화 제작비의 70~80%를 대 왔던 펀드나 창업투자사가 떠나면서 대기업 투자 의존도가 더욱 강화됐고, 모험을 꺼리는 자본 논리에 따라 신규 영화 투자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는 겁니다. 내년 후반기엔 극장에 걸 한국 영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윤 감독은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감독들의 밥그릇 챙기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감독들, 배우들은 말씀하시는 대로 드라마 하면 됩니다. 거기(OTT)는 돈이 많이 몰려있고 투자가 많이 이뤄지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건 한국 영화입니다. (중략) 영화는 어떤 수많은 콘텐츠들의 어떤 뿌리 같은 거라고 생각을 해요. 콘텐츠를 만드는 근간이 흔들리면 나무 전체가 흔들리듯이, 영화의 수준이 낮아지면 다른 컨텐츠들도 하향 평준화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물론, 이 호소에 동의할지는 관객의 몫입니다.

박동수 영화평론가.
■ 영화의 위기? "거품이 빠지는 시기"

잠시 개인적인 이야길 하자면, 취재를 하며 지금이 어쩌면 한국영화만이 아니라 '극장 영화' 자체의 위기일지 모르겠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국내 영화 산업 매출의 대부분을 극장이 차지하는 수익 구조상, 그간 '극장의 위기'는 '영화의 위기'로 자동 치환됐습니다. 윤제균 감독의 호소 역시 대작들이 줄줄이 극장 흥행에 실패하며 나온 얘기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극장 자체가 중요해지지 않는 시기가 오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OTT를 통해 해외 시장에서 인기를 얻는 것처럼, 영화만의 생존 방식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극장 매출 비율은 코로나19 삼 년을 거치며 60%대까지 내려왔고, OTT 시장은 꾸준히 성장셉니다.

그래서, 극장에 대한 '추억 보정' 없이 객관적 진단을 내려줄 평론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스마트폰 네이티브' 세대인 1995년생 박동수 평론가를 만난 이유입니다.

박 평론가는 '양적 거품'이란 말로 현 상황을 진단했습니다. '상영관이 10개면 8개는 같은 영화를 트는'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독과점과, 즐길 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비교적 싼 값에 즐길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성장을 이어왔을 뿐이라는 겁니다.

2010년대부터 시즌마다 4~5편씩 대작들이 출혈 경쟁을 벌이며 맞붙을 만큼 몸집을 키운 한국 영화계가 원래 시장 규모에 맞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이 될 거라고도 했습니다.

사실 2004년 영화 '실미도'가 '꿈의 고지'로 여겨지던 천만 관객을 달성한 뒤로, 한국 영화는 2019년 한 해에 천만 영화가 5편이나 나올 만큼 호황을 누렸습니다.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횟수 4.37회로 세계 1위를 기록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는 영화 자체의 매력 때문이 아니라는 게 박 평론가의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극장에 가는 이유 1순위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데이트나 가족 나들이를 위해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문화는 있지만, 영화 자체를 보러 극장에 달려가는 관객은 사실 많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극장 문화는 있어도 관객 문화는 없고, 극장 스스로도 다양한 선택을 보장하며 '관객들의 공간'이 되기 위한 고민을 게을리하고 있다는 비판도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나온 결론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증명하라'는 근본적 요구입니다.

"극장은 기본적으로 서로 모르는 2백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똑같은 걸 보는 형태잖아요. 그게 어떻게 하면 기억에 남고 재밌는 경험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줘야 하는 거죠. 그게 좋은 영화와도 맞물리는 거기도 하겠고요."

먼 훗날, 이 시기는 과연 어떻게 기억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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