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인분 밥 차리는 공장 경비원, 위법인가요?

입력 2023.03.24 (18:50) 수정 2023.03.2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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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경’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용역업체를 통해 고용된 비정규직 경비원 (출처: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 홈페이지)‘청경’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용역업체를 통해 고용된 비정규직 경비원 (출처: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 홈페이지)

은행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는 '정 청경'이 등장한다. 청경이라 불리지만, 주된 업무는 순찰이나 감시가 아니다. ATM 사용이 서툰 어르신들을 대신한 돈을 뽑아주는 등 갖가지 민원 응대에서부터 은행 직원들에게 김밥, 커피, 숙취 해소제를 사다 주는 심부름을 하느라 쉴 틈이 없다. 지점 간부의 구두를 고쳐오는가 하면 지점장 승용차의 세차를 대신해 준다.

■ 경비원 극단 선택 뒤 접수된 한 통의 제보

아파트 관리소장의 갑질을 견디다 못한 한 경비원이 극단 선택으로 숨졌다는 보도가 나간 뒤, KBS에는 한 통의 제보가 접수됐다. 분해서 잠을 못 이룬다는 60대 남성의 사연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지난해 3월부터 경남의 한 제조공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는데 회사 대표에게 경례를 똑바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리자에게 밉보였고, 계약 만료를 석 달 앞두고 해고됐다는 주장이었다.

경남의 한 제조공장 경비원으로 일하다 8개월 만에 해고를 당한 경비원경남의 한 제조공장 경비원으로 일하다 8개월 만에 해고를 당한 경비원

덧붙여 자신이 경비 업무 외 부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아침마다 한파 속에서 직원들에게 출근 인사를 해야 했던 일, 새벽마다 각 사무실에 신문을 돌려야 했던 일, 화장실 휴지통을 비우는 일, 야간 근무조를 위해 매일 저녁 최대 30인분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이었다.

■ 30인분 밥상 위법일까? 경찰 조사

KBS 보도 ‘인사 강요, 허드렛일’ 공장 경비원 사각지대가 나간 이튿날 경남경찰청은 용역업체를 상대로 '경비업법' 위반 사항이 있는지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경비업법 제7조 5항에서 경비업체는 경비 업무를 제외한 다른 업무를 경비원에 지시해서는 안 되며, 이를 위반할 경우 업체 허가를 취소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틀 뒤인 오늘(24일) 경찰청은 전혀 다른 내용의 공문을 각 경찰서에 내려보냈다. "경비업법 제7조 5항의 적용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 '업무 외 노동' 허가 취소는 위헌

헌재가 해당 조항을 '헌법 불합치'로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경비원으로 하여금 경비업무에 전념하게 하여 국민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대한 위험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입법목적의 정당성 및 수단의 적합성은 인정된다."

"다만, 경비업무의 전념성이 훼손되는 정도를 고려하지 아니한 채 비경비업무를 종사하도록 하는 것을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침해의 최소성에 위배된다."

■경비원이 이 일을 해도 돼? 하면 안 돼?

감시 단속적 근로의 특성상, 경비원에게 경비 업무 외 일을 일체 못하도록 한다면 60대 이상 고령층을 누가 경비원으로 채용하겠느냐는 볼멘소리도 터져 나온다. 되레 이런 형태의 규제가 고령 경비원들의 '대량 해고'를 부른다는 우려의 시각도 있다.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2021년부터는 이른바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라 불리는 '공동주택관리법'이 개정됐다. 아파트 경비원의 허용 업무와 제한 업무를 명시화한 것이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출처/게티이미지뱅크

예를 들어 아파트 경비원은 잡초 제거나 낙엽 청소는 할 수 있지만, 건물 내 청소를 해서는 안 된다. 재활용품 분리배출을 감시할 수는 있지만, 개별 세대의 대형 폐기물 운반까지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법은 아파트 경비원에만 적용될 뿐, 은행이나 공장 등 다른 시설 경비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 공동주택 외 시설 경비원 '사각지대'

그러니까 드라마 속 정 청경의 심부름과 공장 경비원의 '밥 시중'은 지금까지 법으로 금지된 행위였고, 경찰이 이 일을 시키는 용역업체에 대해 '허가 취소'라는 방식으로 규제해 왔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최근 헌재가 '위헌'이라고 결정 내린 것이다. 아파트 외 시설 경비원들의 '업무 외' 노동은 완전한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공동주택 외 시설 경비원 노동의 허용 범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상식선에서 관행으로 해오고는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위법인 일들에 대해 어디까지 허용할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감시 단속적 근로자의 주된 임무가 만에 하나 있을 사고를 대비하는 일이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이건 경비원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오가는 일상의 공간과 일터의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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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4 18:50:14
    • 수정2023-03-24 18:55:00
    취재K
‘청경’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용역업체를 통해 고용된 비정규직 경비원 (출처: jtbc 드라마 사랑의 이해 홈페이지)
은행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사랑의 이해'에는 '정 청경'이 등장한다. 청경이라 불리지만, 주된 업무는 순찰이나 감시가 아니다. ATM 사용이 서툰 어르신들을 대신한 돈을 뽑아주는 등 갖가지 민원 응대에서부터 은행 직원들에게 김밥, 커피, 숙취 해소제를 사다 주는 심부름을 하느라 쉴 틈이 없다. 지점 간부의 구두를 고쳐오는가 하면 지점장 승용차의 세차를 대신해 준다.

■ 경비원 극단 선택 뒤 접수된 한 통의 제보

아파트 관리소장의 갑질을 견디다 못한 한 경비원이 극단 선택으로 숨졌다는 보도가 나간 뒤, KBS에는 한 통의 제보가 접수됐다. 분해서 잠을 못 이룬다는 60대 남성의 사연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지난해 3월부터 경남의 한 제조공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는데 회사 대표에게 경례를 똑바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리자에게 밉보였고, 계약 만료를 석 달 앞두고 해고됐다는 주장이었다.

경남의 한 제조공장 경비원으로 일하다 8개월 만에 해고를 당한 경비원
덧붙여 자신이 경비 업무 외 부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아침마다 한파 속에서 직원들에게 출근 인사를 해야 했던 일, 새벽마다 각 사무실에 신문을 돌려야 했던 일, 화장실 휴지통을 비우는 일, 야간 근무조를 위해 매일 저녁 최대 30인분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이었다.

■ 30인분 밥상 위법일까? 경찰 조사

KBS 보도 ‘인사 강요, 허드렛일’ 공장 경비원 사각지대가 나간 이튿날 경남경찰청은 용역업체를 상대로 '경비업법' 위반 사항이 있는지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경비업법 제7조 5항에서 경비업체는 경비 업무를 제외한 다른 업무를 경비원에 지시해서는 안 되며, 이를 위반할 경우 업체 허가를 취소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틀 뒤인 오늘(24일) 경찰청은 전혀 다른 내용의 공문을 각 경찰서에 내려보냈다. "경비업법 제7조 5항의 적용을 중지하라"는 것이다.

■ '업무 외 노동' 허가 취소는 위헌

헌재가 해당 조항을 '헌법 불합치'로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경비원으로 하여금 경비업무에 전념하게 하여 국민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대한 위험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입법목적의 정당성 및 수단의 적합성은 인정된다."

"다만, 경비업무의 전념성이 훼손되는 정도를 고려하지 아니한 채 비경비업무를 종사하도록 하는 것을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침해의 최소성에 위배된다."

■경비원이 이 일을 해도 돼? 하면 안 돼?

감시 단속적 근로의 특성상, 경비원에게 경비 업무 외 일을 일체 못하도록 한다면 60대 이상 고령층을 누가 경비원으로 채용하겠느냐는 볼멘소리도 터져 나온다. 되레 이런 형태의 규제가 고령 경비원들의 '대량 해고'를 부른다는 우려의 시각도 있다.

논란이 끊이지 않으면서 2021년부터는 이른바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라 불리는 '공동주택관리법'이 개정됐다. 아파트 경비원의 허용 업무와 제한 업무를 명시화한 것이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예를 들어 아파트 경비원은 잡초 제거나 낙엽 청소는 할 수 있지만, 건물 내 청소를 해서는 안 된다. 재활용품 분리배출을 감시할 수는 있지만, 개별 세대의 대형 폐기물 운반까지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법은 아파트 경비원에만 적용될 뿐, 은행이나 공장 등 다른 시설 경비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 공동주택 외 시설 경비원 '사각지대'

그러니까 드라마 속 정 청경의 심부름과 공장 경비원의 '밥 시중'은 지금까지 법으로 금지된 행위였고, 경찰이 이 일을 시키는 용역업체에 대해 '허가 취소'라는 방식으로 규제해 왔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최근 헌재가 '위헌'이라고 결정 내린 것이다. 아파트 외 시설 경비원들의 '업무 외' 노동은 완전한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공동주택 외 시설 경비원 노동의 허용 범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상식선에서 관행으로 해오고는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위법인 일들에 대해 어디까지 허용할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감시 단속적 근로자의 주된 임무가 만에 하나 있을 사고를 대비하는 일이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이건 경비원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오가는 일상의 공간과 일터의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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