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시청률 지상주의’ 꼬집은 풍자극, 반세기 뒤 ‘다큐’가 되다

입력 2023.03.26 (08:00) 수정 2023.03.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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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네트워크'(1976)의 한 장면. 출처 IMDB.영화 '네트워크'(1976)의 한 장면. 출처 IMDB.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보도국이 시청률 때문에 저를 해고했습니다. 이 프로그램 외에 인생의 보람이라곤 없으니, 일주일 뒤 이 자리에서 자살하렵니다." 수십 년간 신뢰받던 뉴스 진행자가 어느 날 생방송 도중 폭탄 선언을 던진다. 이미 뱉은 말,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그에게 방송국은 마지막 기회를 준다. 제대로 사과하고 퇴장하라는 지시를 받고 앵커석에 앉은 그는, 이번엔 더욱 놀랄 말을 쏟아낸다. "33년간 헛소리(bullshit)만 늘어놓고 살았어요. 이젠 더이상 수작 부릴 말도 떨어졌습니다." 실제 사건에 영감을 받아 쓰인 시드니 루멧의 1976년 작품 '네트워크'의 도입부다.

방송국 문 닫게 생겼다는 곡소리가 나오려는 찰나, 대중의 뜨거운 반응이 몰려든다. 시청률이 치솟는 건 물론, 콧대 높은 지면마저 기사를 쏟아내자 편성국 간부는 소리 지른다. "하워드 빌이 한 말에 국민들이 공감한다는 거예요! 이건 하늘이 준 기회라고요!" 뉴스 자체가 개수작이라는 자기 고백에 사람들은 호기심과 공감을 느끼고, 방송국은 급기야 하워드를 전면에 세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비바람에 젖은 잠옷 차림으로 스튜디오에 앉아 세상은 썩었으니 다 같이 분노하자고 소리치는 장광설이 인기를 얻은 뒤다. "당장 창문을 열고 소리치세요. 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미 전역에 송출된 그의 목소리를 따라 사람들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똑같이 외친다. 과연 하워드는 괜찮은 걸까? 아니 그보다, 방송국은 이래도 되는 걸까?

영화 '네트워크'(1976)의 한 장면. 출처 IMDB.영화 '네트워크'(1976)의 한 장면. 출처 IMDB.

'제아무리 좋은 방송도 남들이 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방송국에 입사하고 난 뒤, 선배들에게 전해 듣던 불문율이다. 얼마나 의미 있는 내용이든 눈길을 끌지 못하면 헛수고라는 취지였다. 애써 취재한 내용이 묻히지 않도록 효과적 제작 기술을 익히는 건 응당 해야 할 일이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내가 만든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에도 상한선이 필요하다. '시청률이 잘 나와야만 좋은 프로그램이다'라는 역과 대우의 함정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앉으나 서나 시청률 생각에 말 그대로 '흥분'하는 편성국 간부 다이애나(페이 더너웨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단순히 시청률 지상주의만 꼬집었다기에는 루멧의 '네트워크'는 현대 사회의 온갖 속성을 꿰뚫어 본 통렬한 풍자극이다. 반지성주의를 등에 업고 분노를 부추기는 현대 정치인들과, 언론 비판으로 인기를 얻는 또 다른 언론의 모습, 신앙과 철학을 대체한 자본 논리 등 마치 예언서처럼 50년 뒤 현재를 묘사한다. 2005년 이 작품을 TV 쇼로 각색하려던 배우 조지 클루니가 영화를 본 젊은이들 누구도 '네트워크'를 풍자극으로 인식하지 않아 결국 계획을 취소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영화에 담긴 모든 일이 더는 과장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단다.

이번 주에 소개할 영화로 이 작품을 떠올린 이유가 있다. 최근 화제가 된 넷플릭스 시리즈 '나는 신이다'와 생방송 폭로를 이어간 전두환 씨 손자 전우원 씨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폭로한 '나는 신이다'를 만든 조성현 PD는 작품의 재연 장면 등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란 비판에 거꾸로 질문을 던지며 논란을 일축했다. 자신이 만난 JMS 피해자 메이플이 JTBC '뉴스룸'에도 나온 적 있는데, 그 인터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냐는 반문이었다. 전 씨의 폭로를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자신부터 벌을 받겠다며 카메라 앞에서 약물을 투여하던 그의 건강이 염려돼서다. 사이비 종교의 폐단을 고발하겠단 의도, 남들은 물론 제 잘못까지 폭로에 나선 용기 등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언론이 자꾸만 뭔가를 부추기기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자면, 대의를 위해 '이 정도쯤은' 하고 넘기는 태도,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며 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경향, 그러느라 점점 더 높아지는 자극에 대한 역치 등이 아닐까. 생각이 복잡해 지난주 써야 할 글을 이제야 올렸는데, 부디 많은 사람이 이 걸작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다. OTT 서비스 '왓챠'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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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6 08:00:04
    • 수정2023-03-26 13:51:46
    씨네마진국
영화 '네트워크'(1976)의 한 장면. 출처 IMDB.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보도국이 시청률 때문에 저를 해고했습니다. 이 프로그램 외에 인생의 보람이라곤 없으니, 일주일 뒤 이 자리에서 자살하렵니다." 수십 년간 신뢰받던 뉴스 진행자가 어느 날 생방송 도중 폭탄 선언을 던진다. 이미 뱉은 말,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그에게 방송국은 마지막 기회를 준다. 제대로 사과하고 퇴장하라는 지시를 받고 앵커석에 앉은 그는, 이번엔 더욱 놀랄 말을 쏟아낸다. "33년간 헛소리(bullshit)만 늘어놓고 살았어요. 이젠 더이상 수작 부릴 말도 떨어졌습니다." 실제 사건에 영감을 받아 쓰인 시드니 루멧의 1976년 작품 '네트워크'의 도입부다.

방송국 문 닫게 생겼다는 곡소리가 나오려는 찰나, 대중의 뜨거운 반응이 몰려든다. 시청률이 치솟는 건 물론, 콧대 높은 지면마저 기사를 쏟아내자 편성국 간부는 소리 지른다. "하워드 빌이 한 말에 국민들이 공감한다는 거예요! 이건 하늘이 준 기회라고요!" 뉴스 자체가 개수작이라는 자기 고백에 사람들은 호기심과 공감을 느끼고, 방송국은 급기야 하워드를 전면에 세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비바람에 젖은 잠옷 차림으로 스튜디오에 앉아 세상은 썩었으니 다 같이 분노하자고 소리치는 장광설이 인기를 얻은 뒤다. "당장 창문을 열고 소리치세요. 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미 전역에 송출된 그의 목소리를 따라 사람들은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똑같이 외친다. 과연 하워드는 괜찮은 걸까? 아니 그보다, 방송국은 이래도 되는 걸까?

영화 '네트워크'(1976)의 한 장면. 출처 IMDB.
'제아무리 좋은 방송도 남들이 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방송국에 입사하고 난 뒤, 선배들에게 전해 듣던 불문율이다. 얼마나 의미 있는 내용이든 눈길을 끌지 못하면 헛수고라는 취지였다. 애써 취재한 내용이 묻히지 않도록 효과적 제작 기술을 익히는 건 응당 해야 할 일이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내가 만든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에도 상한선이 필요하다. '시청률이 잘 나와야만 좋은 프로그램이다'라는 역과 대우의 함정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앉으나 서나 시청률 생각에 말 그대로 '흥분'하는 편성국 간부 다이애나(페이 더너웨이)처럼 되지 않으려면.

단순히 시청률 지상주의만 꼬집었다기에는 루멧의 '네트워크'는 현대 사회의 온갖 속성을 꿰뚫어 본 통렬한 풍자극이다. 반지성주의를 등에 업고 분노를 부추기는 현대 정치인들과, 언론 비판으로 인기를 얻는 또 다른 언론의 모습, 신앙과 철학을 대체한 자본 논리 등 마치 예언서처럼 50년 뒤 현재를 묘사한다. 2005년 이 작품을 TV 쇼로 각색하려던 배우 조지 클루니가 영화를 본 젊은이들 누구도 '네트워크'를 풍자극으로 인식하지 않아 결국 계획을 취소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영화에 담긴 모든 일이 더는 과장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단다.

이번 주에 소개할 영화로 이 작품을 떠올린 이유가 있다. 최근 화제가 된 넷플릭스 시리즈 '나는 신이다'와 생방송 폭로를 이어간 전두환 씨 손자 전우원 씨 때문이다.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폭로한 '나는 신이다'를 만든 조성현 PD는 작품의 재연 장면 등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란 비판에 거꾸로 질문을 던지며 논란을 일축했다. 자신이 만난 JMS 피해자 메이플이 JTBC '뉴스룸'에도 나온 적 있는데, 그 인터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냐는 반문이었다. 전 씨의 폭로를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자신부터 벌을 받겠다며 카메라 앞에서 약물을 투여하던 그의 건강이 염려돼서다. 사이비 종교의 폐단을 고발하겠단 의도, 남들은 물론 제 잘못까지 폭로에 나선 용기 등을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언론이 자꾸만 뭔가를 부추기기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자면, 대의를 위해 '이 정도쯤은' 하고 넘기는 태도,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며 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경향, 그러느라 점점 더 높아지는 자극에 대한 역치 등이 아닐까. 생각이 복잡해 지난주 써야 할 글을 이제야 올렸는데, 부디 많은 사람이 이 걸작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바람이다. OTT 서비스 '왓챠'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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