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대처와 우유, 그리고 한국의 농식품부

입력 2023.03.3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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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대처에게 지독하게 따라붙은 별명은 '우유 도둑'(Milk snatcher)이었습니다. 교육부 장관 시절 7세 이상 아이들의 무상 우유 급식을 중단했다가 얻은 별명입니다.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조치였지만, 이 일 때문에 대처는 집권 초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총리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녀에겐 노동 개혁으로 영국병을 고친 '철의 여인'이란 빛도 있지만, '우유 도둑'이란 그늘도 있던 셈입니다.

■ 갑자기 중단된 '다자녀 무상 우유'

KBS는 34개 지자체에서 다자녀 무상 우유 지원이 중단됐다는 내용을 지난 27일 보도했습니다. 바쁘실 분들을 위해 기사 핵심 내용을 요약해드리면 ① 5년 전 잘못된 정책 설계로 다자녀 가정에 대한 모호한 지원 기준이 생겨났고, ② 그 일로 올해까지 지원 중단·형평성 문제 등 전국 곳곳에서 혼선이 생겼는데 ③ 이 과정에서 농식품부와 지자체·교육청은 적극적으로 개선할 의지가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농식품부는 보도 다음날 A4 용지 5장 짜리, 4,000자가 넘는 반박자료를 내놨습니다. 이 역시 바쁘실 분들을 위해 핵심 내용을 요약해드리면 ① 우유 지원은 다자녀가 아닌 취약계층이 우선인 사업이고 ② 지자체 예산 범위 내에서 다자녀를 지원하도록 했으니 농식품부는 잘못이 없으며 ③ 다자녀를 위한 공모 사업도 진행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내용입니다. (농식품부 홈페이지에서 전문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5년 받다 끊겼는데 사과와 설명은 없다

농식품부의 반박은 기사 핵심에서 벗어났고, 그마저도 사실과 어긋납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은 KBS 보도는 '전국 모든 다자녀 가정에게 무상 우유를 꼭 지원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아니란 겁니다. 취재를 하며 만난 다자녀 가정 학부모 모두 "식비 부담이 크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을 지원하는 게 맞다"라고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복지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데 이의는 없습니다.

다만, 이미 주던 걸 끊을 때는 사과와 설득이 있어야 합니다. 없던 걸 백지화하는 것보다, 받던 걸 끊는 게 저항감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길게는 5년간 무상 우유를 받던 다자녀 가정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올해 지원 대상 제외'이란 가정통신문을 새 학기 개학을 앞두고 받았습니다. 월 몇 만 원이 비록 큰 돈은 아닐 수 있겠지만, 갑작스런 통보에 기분 상할 법합니다. 그런데도 농식품부의 4,000글자짜리 반박 자료에서 학부모들이 느꼈을 당혹스러움에 대한 사과는 한 마디조차 없었습니다.


■ 5년 전 오락가락 지침, 누가 만들었나?

복지의 기본 원칙, 수혜 대상을 정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무상 우유급식 사업 지침에 '지자체 예산범위'란 말을 넣었으니 상관없다는 설명은 지자체에 책임을 떠넘기려는 핑계일 뿐입니다. 중앙 부처는 복지 정책의 가이드라인이 될 지침을 발표할 때 가용 범위(우유 사업은 국비와 지방비 6:4 비율로, 국비가 470억 원 소요됩니다) 내에서 돈이 얼마나 쓰일지, 수혜 대상은 얼마나 될지,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없는지 꼼꼼이 따져봐야 합니다.


농식품부는 5년 전 사업지침 '지원 대상'에 다자녀 가구를 넣었다 빼는 과정에서 현장의 혼란이 있었다면서도(제 주장이 아니라 반박 자료 안에 농식품부가 직접 쓴 내용입니다) KBS가 담당 과장에게 "왜 혼란은 예측하지 못했느냐", "어떠한 검토를 거쳤느냐", "누가 결정을 했느냐" 등을 묻자 "그 때 일은 잘 모른다"라는 말 외에 아무 답변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 '도서·벽지 학생 지원'이 다자녀 위한 것?

심지어 '다자녀 지원을 위한 공모사업을 진행했다'라는 농식품부 반박은 사실과 다릅니다. KBS가 입수한 당시 사업 공모 계획을 보면 '도서·벽지 학생들의 영양 공백 우려를 감안해 정부 재정 지원', '농산어촌 및 도서 지역을 우선 지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공모 계획 7장 어디를 봐도 '다자녀'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자녀 지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의 공모 사업이란 얘깁니다.

이런 내용 때문에 도시 지역인 경기 군포시와 안양시는 공모에 신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기 외곽 지역인 연천군청은 3,500만 원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으려 신청했다가 탈락했습니다. 방금 언급한 지자체에 사시는 다자녀 가구 분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올해부터 무상 우유 지원이 끊긴 것입니다.


■ '우유 도둑' 논란은 현재 진행형

농식품부가 장문의 반박 자료를 발표한 그 시각, 저출산고령화위원회는 다자녀 가구의 기준을 현재의 3자녀 이상에서 2자녀 이상으로 낮추고, 더 많은 혜택을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년간 280조 원을 쏟아놓고 실패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라고 공무원들을 다그쳤습니다.


마가렛 대처는 훗날 본인의 자서전(The Downing Street Years)에 서 무상 우유 중단 정책을 언급하며 " 나는 당시 신념에 사로 잡혀 대중과 소통이 부족했다, 국민과 미디어·반대파에 대한 설득 없이 내 주장만 강조했다"라며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정치인이었기에 영국의 성공한 총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우유 도둑'은 반세기 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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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가렛 대처와 우유, 그리고 한국의 농식품부
    • 입력 2023-03-31 11:33:33
    취재K

마가렛 대처에게 지독하게 따라붙은 별명은 '우유 도둑'(Milk snatcher)이었습니다. 교육부 장관 시절 7세 이상 아이들의 무상 우유 급식을 중단했다가 얻은 별명입니다.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조치였지만, 이 일 때문에 대처는 집권 초 영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총리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녀에겐 노동 개혁으로 영국병을 고친 '철의 여인'이란 빛도 있지만, '우유 도둑'이란 그늘도 있던 셈입니다.

■ 갑자기 중단된 '다자녀 무상 우유'

KBS는 34개 지자체에서 다자녀 무상 우유 지원이 중단됐다는 내용을 지난 27일 보도했습니다. 바쁘실 분들을 위해 기사 핵심 내용을 요약해드리면 ① 5년 전 잘못된 정책 설계로 다자녀 가정에 대한 모호한 지원 기준이 생겨났고, ② 그 일로 올해까지 지원 중단·형평성 문제 등 전국 곳곳에서 혼선이 생겼는데 ③ 이 과정에서 농식품부와 지자체·교육청은 적극적으로 개선할 의지가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농식품부는 보도 다음날 A4 용지 5장 짜리, 4,000자가 넘는 반박자료를 내놨습니다. 이 역시 바쁘실 분들을 위해 핵심 내용을 요약해드리면 ① 우유 지원은 다자녀가 아닌 취약계층이 우선인 사업이고 ② 지자체 예산 범위 내에서 다자녀를 지원하도록 했으니 농식품부는 잘못이 없으며 ③ 다자녀를 위한 공모 사업도 진행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내용입니다. (농식품부 홈페이지에서 전문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5년 받다 끊겼는데 사과와 설명은 없다

농식품부의 반박은 기사 핵심에서 벗어났고, 그마저도 사실과 어긋납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은 KBS 보도는 '전국 모든 다자녀 가정에게 무상 우유를 꼭 지원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아니란 겁니다. 취재를 하며 만난 다자녀 가정 학부모 모두 "식비 부담이 크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을 지원하는 게 맞다"라고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복지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데 이의는 없습니다.

다만, 이미 주던 걸 끊을 때는 사과와 설득이 있어야 합니다. 없던 걸 백지화하는 것보다, 받던 걸 끊는 게 저항감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길게는 5년간 무상 우유를 받던 다자녀 가정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올해 지원 대상 제외'이란 가정통신문을 새 학기 개학을 앞두고 받았습니다. 월 몇 만 원이 비록 큰 돈은 아닐 수 있겠지만, 갑작스런 통보에 기분 상할 법합니다. 그런데도 농식품부의 4,000글자짜리 반박 자료에서 학부모들이 느꼈을 당혹스러움에 대한 사과는 한 마디조차 없었습니다.


■ 5년 전 오락가락 지침, 누가 만들었나?

복지의 기본 원칙, 수혜 대상을 정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무상 우유급식 사업 지침에 '지자체 예산범위'란 말을 넣었으니 상관없다는 설명은 지자체에 책임을 떠넘기려는 핑계일 뿐입니다. 중앙 부처는 복지 정책의 가이드라인이 될 지침을 발표할 때 가용 범위(우유 사업은 국비와 지방비 6:4 비율로, 국비가 470억 원 소요됩니다) 내에서 돈이 얼마나 쓰일지, 수혜 대상은 얼마나 될지,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없는지 꼼꼼이 따져봐야 합니다.


농식품부는 5년 전 사업지침 '지원 대상'에 다자녀 가구를 넣었다 빼는 과정에서 현장의 혼란이 있었다면서도(제 주장이 아니라 반박 자료 안에 농식품부가 직접 쓴 내용입니다) KBS가 담당 과장에게 "왜 혼란은 예측하지 못했느냐", "어떠한 검토를 거쳤느냐", "누가 결정을 했느냐" 등을 묻자 "그 때 일은 잘 모른다"라는 말 외에 아무 답변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 '도서·벽지 학생 지원'이 다자녀 위한 것?

심지어 '다자녀 지원을 위한 공모사업을 진행했다'라는 농식품부 반박은 사실과 다릅니다. KBS가 입수한 당시 사업 공모 계획을 보면 '도서·벽지 학생들의 영양 공백 우려를 감안해 정부 재정 지원', '농산어촌 및 도서 지역을 우선 지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공모 계획 7장 어디를 봐도 '다자녀'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자녀 지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의 공모 사업이란 얘깁니다.

이런 내용 때문에 도시 지역인 경기 군포시와 안양시는 공모에 신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기 외곽 지역인 연천군청은 3,500만 원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으려 신청했다가 탈락했습니다. 방금 언급한 지자체에 사시는 다자녀 가구 분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올해부터 무상 우유 지원이 끊긴 것입니다.


■ '우유 도둑' 논란은 현재 진행형

농식품부가 장문의 반박 자료를 발표한 그 시각, 저출산고령화위원회는 다자녀 가구의 기준을 현재의 3자녀 이상에서 2자녀 이상으로 낮추고, 더 많은 혜택을 주겠다 약속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년간 280조 원을 쏟아놓고 실패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라고 공무원들을 다그쳤습니다.


마가렛 대처는 훗날 본인의 자서전(The Downing Street Years)에 서 무상 우유 중단 정책을 언급하며 " 나는 당시 신념에 사로 잡혀 대중과 소통이 부족했다, 국민과 미디어·반대파에 대한 설득 없이 내 주장만 강조했다"라며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정치인이었기에 영국의 성공한 총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우유 도둑'은 반세기 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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