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중엽 건축된 고구려의 ‘대동문’, 北에 있는 우리 역사 문화 유적

입력 2023.04.0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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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대동문 주변 "명절 날 다채로운 민속놀이가 이뤄지는 곳"

북한이 조선중앙TV와 유튜브를 통한 대외 선전 채널에서 평양의 대동문을 다시 한번 자세히 소개했다. 채널은 대동강 기슭에 겸재 정선이 화폭 안에 담은 관서 8경 중에 하나 연광정(練光亭)이 있고 그 옆 평양시 중심부인 중구역에 대동문 공원이 있다고 소재와 위치를 자세히 알렸다.

영상 속 리포터는 대동문 주변에는 18세기에 지은 평양정도 함께 있어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명소로, 특히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과 같은 민속 명절엔 아이들의 다채로운 민속놀이가 이뤄지고 있다고 소개한다.

리포터는 또 북한의 〈조선 민족 유산 보존사〉를 취재해 6세기 중엽 고구려가 쌓은 옛 수도성인 평양성 소개를 담았다.

평양성은 서기 552년부터 586년까지 35년간에 걸쳐 도시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한 북성과 내성, 중성과 외성까지 4개의 성으로 구성됐고, 전체 둘레 24km(60리)에 걸쳐 축조됐다. 평양성 주변엔 33개의 성문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짓고 가장 웅장하게 세운 대동문은 왕궁이 자리 잡고 있던 내성의 동쪽 관문이라고 설명하며, 서쪽의 정해문, 남쪽의 주작문, 북쪽의 칠성문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19세기 평양성 지도·대동문은 4개의 성 중에 내성의 동쪽에 있는 관문이다. (출처 : 조선중앙TV )19세기 평양성 지도·대동문은 4개의 성 중에 내성의 동쪽에 있는 관문이다. (출처 : 조선중앙TV )

■ "전쟁 시 군사 지휘처로 사용...주변 경관·건축미도 빼어나"

대동문은 고려 초기인 947년과 1392년을 비롯해 여러 차례 보수되고 고쳐 세워졌다. 현재의 대동문은 총 높이 19m, 화강석 축대 높이 6.5m 위에 2층 문루가 올라서 있는 형태다. 축대 길이는 26.3m에 너비 14.25 m로, 네 모서리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점차 넓어져 안정감을 느끼도록 설계됐다. 화강석 축대 가운데에는 홍예문(虹霓門, 무지개 문)을 냈다.

북한 〈조선 민족 유산 보존사〉 손은일 부사장은 "평양성은 동쪽으로 대동강과 서쪽의 보통강으로 둘러싸여서 자연 해자를 이루고 있는 천연 요새입니다. 이 대동문은 대동강에서 평양성으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이기 때문에 고구려 시기는 물론이고 고려 시기를 거쳐 조선 시대에 걸쳐서 여러 번 중수됐고 이 과정에 세련된 건축미를 가지게 됐습니다. 현존하는 건축물은 조선 전기의 건축 양식으로 모루(모로) 단청을 칠한 일반 문루와 달리 대동문은 외부에 비단 무늬를 뜻하는 금단청을 입힘으로써 웅장함과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대동문의 2층 문루는 성문의 웅장함을 더욱 돋워 주는 건축물이다. 옛날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 지휘 처로 사용된 대동문은 건축학적으로 볼 때도 웅장하면서 안정감을 주고 부드러우면서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어 우리 민족의 성문 건축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고 이어간다.

우하단은 일제 강점기에 찍은 대동문 사진. 누각 1층의  전체가 누대인 것과 문루의 높이 등에서 한눈에 봐도 현재 대동문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하단은 일제 강점기에 찍은 대동문 사진. 누각 1층의 전체가 누대인 것과 문루의 높이 등에서 한눈에 봐도 현재 대동문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현재의 대동문은 '북한이 다시 지은 것' 이란 설명은 하지 않아.

대동문 지붕 형식은 전통적인 합각식 지붕(팔작 지붕)으로 우진각 지붕이나 맞배 지붕 등 옛 지붕 형식 중에서도 제일 경쾌하고 우아하며 2층 문루는 16개의 흘림 기둥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뤄져 있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제 4권에서 대동문을 묘사한 유홍준 교수는 " 대동문 모서리 기둥은 중간 기둥보다 더 굵고 높게 세우면서도 안 쪽으로 조금 기울이는 '안 기울임식' 기둥으로 이것은 지붕의 무게를 견디고 건물의 균형을 바로잡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북한의 손은일 부사장과 같은 설명을 한다.

채널은 그러나 이 대동문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됐으며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돼 북한이 다시 지었다는 설명은 제외하고 있어 궁금증을 낳고 있다. 다만 영상 속에서 현재의 대동문이 조선 왕조 시대인 1635년 개건(改建)되고 1850년에 중수한 것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대동문 옆에는 1852년 세워진 〈대동문 중수 기적비〉가 있는데, 이 중수비에는 대동문을 1850년 8월 한 달 동안 공사해 중수를 끝낸 내용과 당시 중수 관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설명을 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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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세기 중엽 건축된 고구려의 ‘대동문’, 北에 있는 우리 역사 문화 유적
    • 입력 2023-04-01 07:05:07
    취재K

■ 평양 대동문 주변 "명절 날 다채로운 민속놀이가 이뤄지는 곳"

북한이 조선중앙TV와 유튜브를 통한 대외 선전 채널에서 평양의 대동문을 다시 한번 자세히 소개했다. 채널은 대동강 기슭에 겸재 정선이 화폭 안에 담은 관서 8경 중에 하나 연광정(練光亭)이 있고 그 옆 평양시 중심부인 중구역에 대동문 공원이 있다고 소재와 위치를 자세히 알렸다.

영상 속 리포터는 대동문 주변에는 18세기에 지은 평양정도 함께 있어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명소로, 특히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과 같은 민속 명절엔 아이들의 다채로운 민속놀이가 이뤄지고 있다고 소개한다.

리포터는 또 북한의 〈조선 민족 유산 보존사〉를 취재해 6세기 중엽 고구려가 쌓은 옛 수도성인 평양성 소개를 담았다.

평양성은 서기 552년부터 586년까지 35년간에 걸쳐 도시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한 북성과 내성, 중성과 외성까지 4개의 성으로 구성됐고, 전체 둘레 24km(60리)에 걸쳐 축조됐다. 평양성 주변엔 33개의 성문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짓고 가장 웅장하게 세운 대동문은 왕궁이 자리 잡고 있던 내성의 동쪽 관문이라고 설명하며, 서쪽의 정해문, 남쪽의 주작문, 북쪽의 칠성문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19세기 평양성 지도·대동문은 4개의 성 중에 내성의 동쪽에 있는 관문이다. (출처 : 조선중앙TV )
■ "전쟁 시 군사 지휘처로 사용...주변 경관·건축미도 빼어나"

대동문은 고려 초기인 947년과 1392년을 비롯해 여러 차례 보수되고 고쳐 세워졌다. 현재의 대동문은 총 높이 19m, 화강석 축대 높이 6.5m 위에 2층 문루가 올라서 있는 형태다. 축대 길이는 26.3m에 너비 14.25 m로, 네 모서리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점차 넓어져 안정감을 느끼도록 설계됐다. 화강석 축대 가운데에는 홍예문(虹霓門, 무지개 문)을 냈다.

북한 〈조선 민족 유산 보존사〉 손은일 부사장은 "평양성은 동쪽으로 대동강과 서쪽의 보통강으로 둘러싸여서 자연 해자를 이루고 있는 천연 요새입니다. 이 대동문은 대동강에서 평양성으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이기 때문에 고구려 시기는 물론이고 고려 시기를 거쳐 조선 시대에 걸쳐서 여러 번 중수됐고 이 과정에 세련된 건축미를 가지게 됐습니다. 현존하는 건축물은 조선 전기의 건축 양식으로 모루(모로) 단청을 칠한 일반 문루와 달리 대동문은 외부에 비단 무늬를 뜻하는 금단청을 입힘으로써 웅장함과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대동문의 2층 문루는 성문의 웅장함을 더욱 돋워 주는 건축물이다. 옛날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 지휘 처로 사용된 대동문은 건축학적으로 볼 때도 웅장하면서 안정감을 주고 부드러우면서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어 우리 민족의 성문 건축을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고 이어간다.

우하단은 일제 강점기에 찍은 대동문 사진. 누각 1층의  전체가 누대인 것과 문루의 높이 등에서 한눈에 봐도 현재 대동문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현재의 대동문은 '북한이 다시 지은 것' 이란 설명은 하지 않아.

대동문 지붕 형식은 전통적인 합각식 지붕(팔작 지붕)으로 우진각 지붕이나 맞배 지붕 등 옛 지붕 형식 중에서도 제일 경쾌하고 우아하며 2층 문루는 16개의 흘림 기둥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이뤄져 있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제 4권에서 대동문을 묘사한 유홍준 교수는 " 대동문 모서리 기둥은 중간 기둥보다 더 굵고 높게 세우면서도 안 쪽으로 조금 기울이는 '안 기울임식' 기둥으로 이것은 지붕의 무게를 견디고 건물의 균형을 바로잡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북한의 손은일 부사장과 같은 설명을 한다.

채널은 그러나 이 대동문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됐으며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돼 북한이 다시 지었다는 설명은 제외하고 있어 궁금증을 낳고 있다. 다만 영상 속에서 현재의 대동문이 조선 왕조 시대인 1635년 개건(改建)되고 1850년에 중수한 것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대동문 옆에는 1852년 세워진 〈대동문 중수 기적비〉가 있는데, 이 중수비에는 대동문을 1850년 8월 한 달 동안 공사해 중수를 끝낸 내용과 당시 중수 관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설명을 따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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