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서 ‘자폐 아들 양육’ 고백한 판사 아버지

입력 2023.04.01 (08:00) 수정 2023.04.0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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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잘생기고 순한 아이였던 둘째가 자폐 진단을 받고 나서 우리 가족의 생활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자고 싶을 때 마음대로 잘 수 없고 쉬고 싶을 때 편히 쉴 수가 없으며 둘째랑 같이 외출을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 고단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김형두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 모두발언 중)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진행된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후보자 본인이 모두발언으로 밝힌 가족들의 사연, 헌법재판관 후보자이자 자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말에 여야 구분 없이 모두 집중했습니다. 어제부터 임기를 시작한, 김형두 신임 헌법재판관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약 10분간 이어진 모두발언에서 김 재판관은 이따금씩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멈췄습니다. 이날 김 재판관의 인사청문회는 국회 의사정보시스템 등에서 생중계 됐습니다. 김 재판관은 KBS와 통화에서 자폐아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회의 관심을, 국민 앞에서 촉구하고 싶었다고 전했습니다.

■ 판사 아버지도…"꼬집히고 물리고, 고단한 장애 부모의 삶"

자폐증이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 상태라는 의미의 발달장애입니다. 자폐 진단을 받은 김 재판관의 둘째 아들은 올해로 28살 청년입니다. 신장 184cm에 체중 90kg의 건강한 성인 남성이지만, 실제 정신연령은 7살 정도입니다. 가끔 엄마와 아빠를 꼬집거나 깨물기도 하는데, 부모보다 훌쩍 큰 아들을 이기기는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김 재판관은 청문회 모두발언에서 "지금도 제 처와 저의 몸에는 둘째로부터 꼬집히거나 물려서 생긴 상처 그리고 흉터가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 하루 종일 둘째를 돌봐야 하는 힘겹고 고단한 생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내 처지가 어렵더라도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재판관의 아들은 주 3회, 장애인 보호 작업장에 나가 일을 합니다. 20여 년 전 교사직을 내려놓고 아들을 돌보는 데 전념 중인 김 재판관의 아내 혹은 활동 보조인이 출퇴근을 돕습니다. 장애인 자립을 돕는 제도는 여전히 부족한 현실인데다, 일상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 탓에 상처받을 때가 많습니다.

김 재판관은 인사청문회 전 국회에 제출한 서면답변서에서 "자폐성 장애인들은 투표권 행사도 어렵고 자기 의사 표현도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사항을 내기 어렵다"며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있는 만큼 국회의 관심과 배려를 부탁드리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 "사회적 약자 어려움, 온몸으로 직접 체험…소수자와 약자 위한 재판하겠다"

인사청문회에서는 김 재판관이 그간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내린 판결도 조명됐습니다.

2008년, 춘천지법 강릉지원 판사였던 김 재판관은 수어를 배우지 못한 농인 절도범에게 농아인 생활공동체를 안내하고, 선처에 가까운 가벼운 처벌을 내렸습니다. 당시 김 재판관은 판결문에 "피고인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국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서에 이 같은 내용을 전한 김 재판관은 "석방된 피고인은 이후 농아인 생활공동체 일원으로 살아가며 재범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재판을 맡는 판사로서는 개개의 재판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무게를 언제나 유념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김 재판관의 가정사가,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청문회에서는 김 재판관 모친의 편법 부동산 재테크 의혹, 검찰 수사권 축소 법안과 관련한 견해, 정부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 해법에 관한 의견을 묻는 질의가 쏟아졌고, 모호한 답변에 관한 질타도 있었습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전체회의를 열고 김 재판관에 대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했습니다.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소양과 자질에 대한 일부 우려가 담겼지만, 여야는 김 재판관에 대해 '적격' 의견을 보고서에 담기로 합의했습니다. 후보자 신분을 벗어난 김 재판관은 어제(지난달 31일) 헌법재판소에서 취임식을 열었습니다.

김 재판관은 취임식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자, 약자의 인권이 보호되는 사회를 이뤄나가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청문 과정에서 현안과 관련한 구체적 언급을 피했던 김 재판관은 "후보자가 아닌, 재판관으로서는 소신 있게 의견을 밝히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후보자로서, 재판관으로서 공언한 이 다짐에 얼마나 진정성이 담겼는지는, 앞으로의 6년 임기 동안 김 재판관이 증명해야 할 몫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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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문회서 ‘자폐 아들 양육’ 고백한 판사 아버지
    • 입력 2023-04-01 08:00:23
    • 수정2023-04-01 11:29:56
    취재K

"유난히도 잘생기고 순한 아이였던 둘째가 자폐 진단을 받고 나서 우리 가족의 생활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자고 싶을 때 마음대로 잘 수 없고 쉬고 싶을 때 편히 쉴 수가 없으며 둘째랑 같이 외출을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 고단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김형두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 모두발언 중)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진행된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후보자 본인이 모두발언으로 밝힌 가족들의 사연, 헌법재판관 후보자이자 자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말에 여야 구분 없이 모두 집중했습니다. 어제부터 임기를 시작한, 김형두 신임 헌법재판관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약 10분간 이어진 모두발언에서 김 재판관은 이따금씩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멈췄습니다. 이날 김 재판관의 인사청문회는 국회 의사정보시스템 등에서 생중계 됐습니다. 김 재판관은 KBS와 통화에서 자폐아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회의 관심을, 국민 앞에서 촉구하고 싶었다고 전했습니다.

■ 판사 아버지도…"꼬집히고 물리고, 고단한 장애 부모의 삶"

자폐증이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것 같은 상태라는 의미의 발달장애입니다. 자폐 진단을 받은 김 재판관의 둘째 아들은 올해로 28살 청년입니다. 신장 184cm에 체중 90kg의 건강한 성인 남성이지만, 실제 정신연령은 7살 정도입니다. 가끔 엄마와 아빠를 꼬집거나 깨물기도 하는데, 부모보다 훌쩍 큰 아들을 이기기는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김 재판관은 청문회 모두발언에서 "지금도 제 처와 저의 몸에는 둘째로부터 꼬집히거나 물려서 생긴 상처 그리고 흉터가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 하루 종일 둘째를 돌봐야 하는 힘겹고 고단한 생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내 처지가 어렵더라도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재판관의 아들은 주 3회, 장애인 보호 작업장에 나가 일을 합니다. 20여 년 전 교사직을 내려놓고 아들을 돌보는 데 전념 중인 김 재판관의 아내 혹은 활동 보조인이 출퇴근을 돕습니다. 장애인 자립을 돕는 제도는 여전히 부족한 현실인데다, 일상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 탓에 상처받을 때가 많습니다.

김 재판관은 인사청문회 전 국회에 제출한 서면답변서에서 "자폐성 장애인들은 투표권 행사도 어렵고 자기 의사 표현도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사항을 내기 어렵다"며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있는 만큼 국회의 관심과 배려를 부탁드리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 "사회적 약자 어려움, 온몸으로 직접 체험…소수자와 약자 위한 재판하겠다"

인사청문회에서는 김 재판관이 그간 사회적 약자를 위해 내린 판결도 조명됐습니다.

2008년, 춘천지법 강릉지원 판사였던 김 재판관은 수어를 배우지 못한 농인 절도범에게 농아인 생활공동체를 안내하고, 선처에 가까운 가벼운 처벌을 내렸습니다. 당시 김 재판관은 판결문에 "피고인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국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서에 이 같은 내용을 전한 김 재판관은 "석방된 피고인은 이후 농아인 생활공동체 일원으로 살아가며 재범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재판을 맡는 판사로서는 개개의 재판이 당사자에게 미치는 무게를 언제나 유념하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김 재판관의 가정사가,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청문회에서는 김 재판관 모친의 편법 부동산 재테크 의혹, 검찰 수사권 축소 법안과 관련한 견해, 정부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 해법에 관한 의견을 묻는 질의가 쏟아졌고, 모호한 답변에 관한 질타도 있었습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전체회의를 열고 김 재판관에 대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했습니다.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소양과 자질에 대한 일부 우려가 담겼지만, 여야는 김 재판관에 대해 '적격' 의견을 보고서에 담기로 합의했습니다. 후보자 신분을 벗어난 김 재판관은 어제(지난달 31일) 헌법재판소에서 취임식을 열었습니다.

김 재판관은 취임식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자, 약자의 인권이 보호되는 사회를 이뤄나가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청문 과정에서 현안과 관련한 구체적 언급을 피했던 김 재판관은 "후보자가 아닌, 재판관으로서는 소신 있게 의견을 밝히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후보자로서, 재판관으로서 공언한 이 다짐에 얼마나 진정성이 담겼는지는, 앞으로의 6년 임기 동안 김 재판관이 증명해야 할 몫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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