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日 사위 앞에 털어놓은 70년 전 엄마의 기억…“그때, 거기 있었어”

입력 2023.04.0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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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의 한 장면. 제공 엣나인필름.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의 한 장면. 제공 엣나인필름.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삼복 더위에도 정장을 갖춰 입은 남성이 무릎을 꿇고 준비한 문장을 읊는다. "제가 비록 나이는 많이 어리지만, 따님과의 결혼을 허락해주십사 하고 찾아뵈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이는 예비 사위 앞에 여든 넘은 노모는 말을 흐린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니, 둘이서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이렇게 체격도 좋고…." 이때 지켜보던 딸이 쐐기를 박는다. "12살 차이야, 엄마. 한참 연하인데 괜찮아요?" 갑자기 말이 없어진 어머니는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띡띡띡 가스 불 올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한참 뒤 식탁에는 푹 고아 살을 발라낸 백숙 한 그릇이 오른다.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 속 한 장면이다.

귀한 딸의 결혼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했을 어머니의 속내를 상상하게 되는 귀엽고 흐뭇한 장면이지만, 허락을 구하는 사위가 일본인이고 딸은 재일 교포 2세이며, 어머니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상황은 어쩐지 달리 보인다. 작고한 아버지의 사진 속에도 북한에서 받은 표창과 휘장이 수두룩하다. "영희 아버지가 평양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야. 맨 앞줄에 있는 것 보이지?" 자랑스럽게 가리킨 액자 옆에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걸려 있고, 일본인 사위는 '미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미키 마우스 티셔츠를 입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일본에서 낳은 세 아들을 모두 북한에 보냈을 만큼 '조국'에 대한 믿음이 철저했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양영희 감독은 자신의 가족을 주제로 26년간 모두 3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가족이 좋아서가 아니다. 밉기만 한 부모를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몸부림친 결과다. 20대까지 아버지와는 겸상조차 피했다. 그러나 굴레에서 해방되려면 결국 이해해야 했다. 왜 부모님이 북한 국적을 택했는지. 10대에 불과했던 세 오빠를 '지상 낙원'이라던 평양에 보낸 후회는 없는지. "예전 작품을 보신 분들은 저랑 부모님이 원래부터 사이가 좋은 줄 아세요. (다큐를) 찍겠다는 속셈이 있으니까 웃으면서 다가간 거예요." 그래야만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게 양영희 감독의 설명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의 한 장면. 제공 엣나인필름.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의 한 장면. 제공 엣나인필름.

그러는 동안 가족도 변화를 겪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북한에 있는 오빠들은 만날 수 없게 됐다. 2005년 다큐 '디어 평양'을 발표한 뒤 양 감독의 북한 출입이 금지돼서다. 대신 어머니 강정희 여사와 일본인 사위 카오루 씨까지 새로운 가족이 꾸려진다. 카오루 씨는 어머니의 비법을 전수 받아 그럴 듯하게 백숙을 끓여내고, 달갑지 않은 광고문을 보내는 장례업체엔 '내가 강정희 씨 아들'이라며 전화를 걸어 화를 낸다. 딸과 사위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찍은 사진을 보며 '내 무덤에 함께 넣어달라'던 여든여섯 강정희 씨에게도 달갑지 않은 변화가 닥친다. 기억을 잃는 알츠하이머 진단이다. 집안 형광등처럼 깜빡이는 기억이 영영 사라지기 전에, 강정희 씨는 숨겨뒀던 아주 중요한 비밀 하나를 입에 올린다.

지난해 개봉한 이 작품을 이번 주에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내일이 바로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5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10만 명에 이르는 유족들이 눈물 속에 하루를 보내는 날. 무력충돌을 진압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 3만여 명이 정부에 의해 희생됐다. 강정희 씨가 수십 년간 간직한 아픔도 비극의 일부다. 북한과 남한 체제 사이에서 강 씨가 북한을 택한 배경에도, 한평생 남한 땅을 밟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데에도 4.3이 있다. "처음으로 나에게 4.3에 대해 말할 때, 강인하던 어머니가 겁먹은 눈으로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끔찍한 일이 벌어져'." 70년 전 강 씨가 목숨을 걸고 지났던 그 길을 걸으며, 양영희 감독은 뒤늦게 어머니의 아픔을 이해한다. 일본인 사위도 묵묵히 강 씨의 휠체어를 밀며 뒤를 따른다. 결코, 그만 하라, 이젠 잊고 용서하라고 말하는 법 없이. 가족을 통해 그 안에 응집된 한국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는 이 흥미로운 작품은 유튜브와 '웨이브'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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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日 사위 앞에 털어놓은 70년 전 엄마의 기억…“그때, 거기 있었어”
    • 입력 2023-04-02 08:01:02
    씨네마진국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의 한 장면. 제공 엣나인필름.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삼복 더위에도 정장을 갖춰 입은 남성이 무릎을 꿇고 준비한 문장을 읊는다. "제가 비록 나이는 많이 어리지만, 따님과의 결혼을 허락해주십사 하고 찾아뵈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이는 예비 사위 앞에 여든 넘은 노모는 말을 흐린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니, 둘이서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이렇게 체격도 좋고…." 이때 지켜보던 딸이 쐐기를 박는다. "12살 차이야, 엄마. 한참 연하인데 괜찮아요?" 갑자기 말이 없어진 어머니는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띡띡띡 가스 불 올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한참 뒤 식탁에는 푹 고아 살을 발라낸 백숙 한 그릇이 오른다.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 속 한 장면이다.

귀한 딸의 결혼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했을 어머니의 속내를 상상하게 되는 귀엽고 흐뭇한 장면이지만, 허락을 구하는 사위가 일본인이고 딸은 재일 교포 2세이며, 어머니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상황은 어쩐지 달리 보인다. 작고한 아버지의 사진 속에도 북한에서 받은 표창과 휘장이 수두룩하다. "영희 아버지가 평양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야. 맨 앞줄에 있는 것 보이지?" 자랑스럽게 가리킨 액자 옆에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걸려 있고, 일본인 사위는 '미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미키 마우스 티셔츠를 입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일본에서 낳은 세 아들을 모두 북한에 보냈을 만큼 '조국'에 대한 믿음이 철저했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양영희 감독은 자신의 가족을 주제로 26년간 모두 3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가족이 좋아서가 아니다. 밉기만 한 부모를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몸부림친 결과다. 20대까지 아버지와는 겸상조차 피했다. 그러나 굴레에서 해방되려면 결국 이해해야 했다. 왜 부모님이 북한 국적을 택했는지. 10대에 불과했던 세 오빠를 '지상 낙원'이라던 평양에 보낸 후회는 없는지. "예전 작품을 보신 분들은 저랑 부모님이 원래부터 사이가 좋은 줄 아세요. (다큐를) 찍겠다는 속셈이 있으니까 웃으면서 다가간 거예요." 그래야만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게 양영희 감독의 설명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의 한 장면. 제공 엣나인필름.
그러는 동안 가족도 변화를 겪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북한에 있는 오빠들은 만날 수 없게 됐다. 2005년 다큐 '디어 평양'을 발표한 뒤 양 감독의 북한 출입이 금지돼서다. 대신 어머니 강정희 여사와 일본인 사위 카오루 씨까지 새로운 가족이 꾸려진다. 카오루 씨는 어머니의 비법을 전수 받아 그럴 듯하게 백숙을 끓여내고, 달갑지 않은 광고문을 보내는 장례업체엔 '내가 강정희 씨 아들'이라며 전화를 걸어 화를 낸다. 딸과 사위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찍은 사진을 보며 '내 무덤에 함께 넣어달라'던 여든여섯 강정희 씨에게도 달갑지 않은 변화가 닥친다. 기억을 잃는 알츠하이머 진단이다. 집안 형광등처럼 깜빡이는 기억이 영영 사라지기 전에, 강정희 씨는 숨겨뒀던 아주 중요한 비밀 하나를 입에 올린다.

지난해 개봉한 이 작품을 이번 주에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내일이 바로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5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10만 명에 이르는 유족들이 눈물 속에 하루를 보내는 날. 무력충돌을 진압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 3만여 명이 정부에 의해 희생됐다. 강정희 씨가 수십 년간 간직한 아픔도 비극의 일부다. 북한과 남한 체제 사이에서 강 씨가 북한을 택한 배경에도, 한평생 남한 땅을 밟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데에도 4.3이 있다. "처음으로 나에게 4.3에 대해 말할 때, 강인하던 어머니가 겁먹은 눈으로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끔찍한 일이 벌어져'." 70년 전 강 씨가 목숨을 걸고 지났던 그 길을 걸으며, 양영희 감독은 뒤늦게 어머니의 아픔을 이해한다. 일본인 사위도 묵묵히 강 씨의 휠체어를 밀며 뒤를 따른다. 결코, 그만 하라, 이젠 잊고 용서하라고 말하는 법 없이. 가족을 통해 그 안에 응집된 한국 근현대사를 들여다보는 이 흥미로운 작품은 유튜브와 '웨이브'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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