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 핵심은 남는 쌀 매입의 '의무조항' 입니다. 정부가 쌀을 사야할 조건( 3~5% 초과 생산 또는 5~8% 쌀값 하락)이 충족됐을 때, 기존 법이 '매입할 수 있다'였다면 '매입한다'로 바꾼 것이지요. 그런데 '의무조항'을 도입하자는 정치권 논의는 4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당시엔 의무조항이 없도록 합의했던 여야가 지금은 왜 달라졌을까요.
■ 4년 전은 맞고 지금은 틀리다
2019년 직불금 제도를 개편하면서 농가에게 돌아갈 직불금이 줄게 되자, 농가 소득을 보장할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쌀 매입 '의무조항' 논의의 출발점입니다. 당시 국회에선 여야 가리지 않고 매입 의무화를 반영한 양곡법 개정안을 냈습니다. 하지만 재정 문제, 타 작물 형평성 등 여러 부담이 있었습니다. 결국 여야는 정부에 재량권을 주는 방향으로 타협점을 찾습니다.
2019년 11월 13일 국회 농해수위 법안 소위 회의록
당시 논의 과정이 국회 농해수위 법안 소위 회의록(2019년 11월 13일)에 남아있습니다. 무소속 김종회 의원이 "(지금 법안은) 정부가 항시 시기를 넘겨 사려는 것 아니냐"라고 묻자 소위 위원장이었던 민주당 박완주 의원은 "생산자단체와 협의하도록 되어 있다, (시기를 넘기면) 생산자단체가 가만히 있겠나"라고 답했습니다. '사실상' 의무화이니 괜찮다는 얘기였고, 결국 법안은 의무조항 없이 가결됩니다.
■ 적기 놓친 매입, 쌀값 폭락 불렀다
하지만 애매한 기준이었습니다. 문제는 2021년 가을에 터집니다. 쌀값 급락 조짐이 있는데도 정부는 어찌된 일인지 꿈쩍도 안 합니다. (양곡법엔 10월 15일까지 정부가 매입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우물쭈물 대더니 민주당(당시 여당)과 당정 협의를 거쳐 12월에야 20만 톤을 격리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습니다. 실제 매입 절차는 해를 넘겨 2022년 1월 말에서야 시작됩니다. 적기를 놓친 뒤였습니다. 결국 지난해 9월, 쌀값은 1년 만에 26% 떨어져 45년 만의 최대 하락 폭을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10월 12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전국쌀생산자협회 엄청나 정책위원장.
지난해 10월 민주당이 양곡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최고위원회의에 농민단체인 전국쌀생산자협회의 엄청나 정책위원장을 불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엄 위원장은 "2019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어설프게 양곡관리법을 개정해 이 문제(쌀값 폭락)의 도화선을 제공했고, 2021년 폭락을 가속화시켰다"라고 비판했습니다. 회의 분위기는싸늘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의무 매입' 항상 정답일까
정부 쌀 매입 조치의 행정 용어는 '시장격리'입니다. 가격 조정 목적으로 시장에서 물량을 아예 배제하는 조치입니다. 그래서 '격리'라는 단어를 씁니다. 공급이 확 줄어드니 시장에선 가격을 올리거나 지지하는 효과를 냅니다. 시장격리 외에 정부가 사는 쌀은 '공공비축미'도 있지만 매입 시기가 거의 일정하다(8월~12월)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장격리는 지금까지 10번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쌀값을 실제로 반등시키는 효과를 낸 건 세 번(2010년, 2017년, 2022년)이고, 나머지는 하락폭만 줄이거나 별 영향이 없었습니다. 효과가 있는 것은 맞지만, 일종의 응급 조치일 뿐 만병통치약까지는 아닌 셈입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면 2030년엔 오히려 쌀값이 5.4% 떨어진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 반대만 하고 손 놓은 정부·여당
의무 매입 반대만 외쳤던 정부·여당도 대안 마련엔 소극적이었습니다. 시장격리가 답이 아니라면 농가 소득을 안정시킬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농림축산식품부가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내놓은 건 전략작물직불제, 쌀 소비 촉진 등 이미 추진 중인 정책을 되풀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지난달 30일 통계청은 지난해 10a당 벼농사 순수익이 31만 7,000원으로, 1년 전(50만 2,000원)에 비해 36.8% 감소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논벼 순수익률은 27.1%로, 쌀 농가가 100만 원을 벌었을 때 실제 손에 쥐는 돈은 27만 원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쌀값은 떨어졌지만 비룟값은 대폭 오른(71.4%↑) 영향입니다. 농가 소득을 안정시키려면 생산 조정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이 있는데 '의무매입' 논쟁에 매몰돼 적절한 대응을 놓쳤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 野 강행, 與 거부에 농민은 없다
농민들은 이제 정치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거부권에 반대해 어제(4일) 용산 대통령실로 몰려갔던 농민단체들은 "개정안에 농민들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고, 시장격리 요건을 크게 완화하고 단서조항도 덕지덕지 달려 후퇴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시장격리 의무화하는 것조차 거부한다면 '농업 포기 선언'이나 다름 없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어제(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농민단체 [촬영기자 조은경]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변호사)는 "양곡법을 개정하되, 시장격리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농가 입장에서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치권 논의가 자꾸 정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고, 논의가 협소해지는 면이 있기 때문에 대립보다는 식량자급률 제고를 위한 공론장을 만드는 식으로 큰 틀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인포그래픽 : 김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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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곡법’ 단독 강행, 거부권 난맥상에 농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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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3-04-05 07:02:21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 핵심은 남는 쌀 매입의 '의무조항' 입니다. 정부가 쌀을 사야할 조건( 3~5% 초과 생산 또는 5~8% 쌀값 하락)이 충족됐을 때, 기존 법이 '매입할 수 있다'였다면 '매입한다'로 바꾼 것이지요. 그런데 '의무조항'을 도입하자는 정치권 논의는 4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당시엔 의무조항이 없도록 합의했던 여야가 지금은 왜 달라졌을까요.
■ 4년 전은 맞고 지금은 틀리다
2019년 직불금 제도를 개편하면서 농가에게 돌아갈 직불금이 줄게 되자, 농가 소득을 보장할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쌀 매입 '의무조항' 논의의 출발점입니다. 당시 국회에선 여야 가리지 않고 매입 의무화를 반영한 양곡법 개정안을 냈습니다. 하지만 재정 문제, 타 작물 형평성 등 여러 부담이 있었습니다. 결국 여야는 정부에 재량권을 주는 방향으로 타협점을 찾습니다.
당시 논의 과정이 국회 농해수위 법안 소위 회의록(2019년 11월 13일)에 남아있습니다. 무소속 김종회 의원이 "(지금 법안은) 정부가 항시 시기를 넘겨 사려는 것 아니냐"라고 묻자 소위 위원장이었던 민주당 박완주 의원은 "생산자단체와 협의하도록 되어 있다, (시기를 넘기면) 생산자단체가 가만히 있겠나"라고 답했습니다. '사실상' 의무화이니 괜찮다는 얘기였고, 결국 법안은 의무조항 없이 가결됩니다.
■ 적기 놓친 매입, 쌀값 폭락 불렀다
하지만 애매한 기준이었습니다. 문제는 2021년 가을에 터집니다. 쌀값 급락 조짐이 있는데도 정부는 어찌된 일인지 꿈쩍도 안 합니다. (양곡법엔 10월 15일까지 정부가 매입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우물쭈물 대더니 민주당(당시 여당)과 당정 협의를 거쳐 12월에야 20만 톤을 격리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습니다. 실제 매입 절차는 해를 넘겨 2022년 1월 말에서야 시작됩니다. 적기를 놓친 뒤였습니다. 결국 지난해 9월, 쌀값은 1년 만에 26% 떨어져 45년 만의 최대 하락 폭을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10월 민주당이 양곡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최고위원회의에 농민단체인 전국쌀생산자협회의 엄청나 정책위원장을 불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엄 위원장은 "2019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어설프게 양곡관리법을 개정해 이 문제(쌀값 폭락)의 도화선을 제공했고, 2021년 폭락을 가속화시켰다"라고 비판했습니다. 회의 분위기는싸늘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의무 매입' 항상 정답일까
정부 쌀 매입 조치의 행정 용어는 '시장격리'입니다. 가격 조정 목적으로 시장에서 물량을 아예 배제하는 조치입니다. 그래서 '격리'라는 단어를 씁니다. 공급이 확 줄어드니 시장에선 가격을 올리거나 지지하는 효과를 냅니다. 시장격리 외에 정부가 사는 쌀은 '공공비축미'도 있지만 매입 시기가 거의 일정하다(8월~12월)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장격리는 지금까지 10번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쌀값을 실제로 반등시키는 효과를 낸 건 세 번(2010년, 2017년, 2022년)이고, 나머지는 하락폭만 줄이거나 별 영향이 없었습니다. 효과가 있는 것은 맞지만, 일종의 응급 조치일 뿐 만병통치약까지는 아닌 셈입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면 2030년엔 오히려 쌀값이 5.4% 떨어진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 반대만 하고 손 놓은 정부·여당
의무 매입 반대만 외쳤던 정부·여당도 대안 마련엔 소극적이었습니다. 시장격리가 답이 아니라면 농가 소득을 안정시킬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농림축산식품부가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내놓은 건 전략작물직불제, 쌀 소비 촉진 등 이미 추진 중인 정책을 되풀이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지난달 30일 통계청은 지난해 10a당 벼농사 순수익이 31만 7,000원으로, 1년 전(50만 2,000원)에 비해 36.8% 감소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논벼 순수익률은 27.1%로, 쌀 농가가 100만 원을 벌었을 때 실제 손에 쥐는 돈은 27만 원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쌀값은 떨어졌지만 비룟값은 대폭 오른(71.4%↑) 영향입니다. 농가 소득을 안정시키려면 생산 조정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이 있는데 '의무매입' 논쟁에 매몰돼 적절한 대응을 놓쳤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 野 강행, 與 거부에 농민은 없다
농민들은 이제 정치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거부권에 반대해 어제(4일) 용산 대통령실로 몰려갔던 농민단체들은 "개정안에 농민들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고, 시장격리 요건을 크게 완화하고 단서조항도 덕지덕지 달려 후퇴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시장격리 의무화하는 것조차 거부한다면 '농업 포기 선언'이나 다름 없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변호사)는 "양곡법을 개정하되, 시장격리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농가 입장에서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치권 논의가 자꾸 정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고, 논의가 협소해지는 면이 있기 때문에 대립보다는 식량자급률 제고를 위한 공론장을 만드는 식으로 큰 틀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인포그래픽 : 김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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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혁진 기자 analogu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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