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엄마가 대신 한번 놀아볼게”…슬프지만 유쾌한, 4월의 ‘장기자랑’

입력 2023.04.0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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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2023)의 한 장면. 제공 영화사 진진.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2023)의 한 장면. 제공 영화사 진진.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세월호 엄마'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에는 밥 먹는 장면이 없다. 참사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며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거나, 술상 앞에서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은 있지만. 3년 반 동안 집요하게 엄마들을 따라다닌 기록치곤 이상할 정도다. 알고 보니 촬영 전 합의한 첫 번째 규칙이 '밥 먹는 장면은 찍지 않는다'였단다. 참사 이후 밥 먹는 유족들을 찍은 사진이 SNS에 퍼지며 크게 상처받은 경험 때문이다. 도대체, 자식 잃은 엄마들은 밥숟가락조차 들면 안 되는 거였을까. '장기자랑'의 이소현 감독은 바로 이런 편견에 맞서고 싶었다고 한다. 피해자는 언제나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하고, 성인(聖人)처럼 무결해야 한다는 편견.

그렇게 완성한 '장기자랑'은, 으레 '세월호 다큐'하면 떠오르는 선입견과는 영 딴판이다. 화사한 색감에 발랄한 배경음악이 가장 먼저 눈과 귀를 사로잡고, 엉 겁결에 연극을 시작한 어머니들의 우여곡절엔 군데군데 관객의 웃음보를 '빵' 터트리는 대목이 숨어있다. 연극 배역과 비중을 놓고 벌어지는 이미경(故 이영만 군 어머니) 씨와 박유신(故 정예진 양 어머니) 씨 사이 다툼이 핵심이다. 화면 속 엄마들은 '그 언니 이제 안 본다'며 마냥 심각한데, 보고 있으면 감독의 표현처럼 "너무 귀엽"다. 관객들 도 '생각보다 많이 웃을 수 있는 영화'라는 평가에 고개를 끄덕인다. 만든 이들 역시 자부심이 있다. 코미디 못지않게 재밌고 발랄하다며, '세월호는 지겹다'거나 '슬퍼서 피하고 싶다'는 사람일수록 봐 달라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2023)의 한 장면. 제공 영화사 진진.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2023)의 한 장면. 제공 영화사 진진.

물론 '장기자랑'은 시종일관 밝기만 한 작품일 수 없다. "아무리 연극을 많이 한다고 해도 아이를 잃은 슬픔 자체가 근본적으로 치유되지는 않는다"는 김태현 연극 연출가의 말대로 어머니들은 웃음과 활력을 찾다가도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맞는다. 무대를 준비하다 말고 "수면제 한 달 보름 거"를 다 삼키기도 하고, 단원고 강당에서 연극을 하게 됐을 땐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에 들어간단 생각만으로 잠을 설친다.

그러나 이때에도 '장기자랑'은 전형적인 피해자들의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는다. 울고 까무러치고 화내고 호소하는, 수차례 되풀이된 피해자들의 모습을. 수면제 이야기를 꺼내는 최지영 씨 (故 권순범 군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공연 전 떨리는 맘을 우황청심환으로 달랜다는 얘기를 하며 김도현 씨(故 정동수 군 어머니)가 '도핑 검사해야 한다'는 엄마들끼리의 농담 한마디를 보태는 식이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수도 있지만,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다'는 이미경 씨의 고백은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울림을 남긴다.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전시하지 않아도, '장기자랑'은 훌륭한 세월호 다큐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게 수학 여행지에 도착하는' 무대 위 연극과 다큐 속 엄마들, 그리고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 2023년 4월의 현실이 작품을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엇갈리며 세월호 사건의 의미와 무게를 곱씹게 한다. 예를 들어, '애들 다 어디 갔지?' 하는 연극 대사 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가 팽목항 전경을 비추는 순간,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도 관객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는다. 아이들이 결코 도착하지 못했던 제주 바다를 엄마들이 대신 밟을 때, 연극을 시작하는 하나 둘 셋 준비 구호 소리로 다큐멘터리가 문을 닫을 때도 마찬가지다. 빼어난 작품, 부디 많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상영관이 많지 않다. 세월호 참사 9주기는 다음 주지만, 그때까지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을 거란 보장이 없어 이번 주 영화로 꼽았다. 지겹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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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엄마가 대신 한번 놀아볼게”…슬프지만 유쾌한, 4월의 ‘장기자랑’
    • 입력 2023-04-09 08:02:21
    씨네마진국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2023)의 한 장면. 제공 영화사 진진.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세월호 엄마'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에는 밥 먹는 장면이 없다. 참사로 세상을 떠난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며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거나, 술상 앞에서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은 있지만. 3년 반 동안 집요하게 엄마들을 따라다닌 기록치곤 이상할 정도다. 알고 보니 촬영 전 합의한 첫 번째 규칙이 '밥 먹는 장면은 찍지 않는다'였단다. 참사 이후 밥 먹는 유족들을 찍은 사진이 SNS에 퍼지며 크게 상처받은 경험 때문이다. 도대체, 자식 잃은 엄마들은 밥숟가락조차 들면 안 되는 거였을까. '장기자랑'의 이소현 감독은 바로 이런 편견에 맞서고 싶었다고 한다. 피해자는 언제나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하고, 성인(聖人)처럼 무결해야 한다는 편견.

그렇게 완성한 '장기자랑'은, 으레 '세월호 다큐'하면 떠오르는 선입견과는 영 딴판이다. 화사한 색감에 발랄한 배경음악이 가장 먼저 눈과 귀를 사로잡고, 엉 겁결에 연극을 시작한 어머니들의 우여곡절엔 군데군데 관객의 웃음보를 '빵' 터트리는 대목이 숨어있다. 연극 배역과 비중을 놓고 벌어지는 이미경(故 이영만 군 어머니) 씨와 박유신(故 정예진 양 어머니) 씨 사이 다툼이 핵심이다. 화면 속 엄마들은 '그 언니 이제 안 본다'며 마냥 심각한데, 보고 있으면 감독의 표현처럼 "너무 귀엽"다. 관객들 도 '생각보다 많이 웃을 수 있는 영화'라는 평가에 고개를 끄덕인다. 만든 이들 역시 자부심이 있다. 코미디 못지않게 재밌고 발랄하다며, '세월호는 지겹다'거나 '슬퍼서 피하고 싶다'는 사람일수록 봐 달라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2023)의 한 장면. 제공 영화사 진진.
물론 '장기자랑'은 시종일관 밝기만 한 작품일 수 없다. "아무리 연극을 많이 한다고 해도 아이를 잃은 슬픔 자체가 근본적으로 치유되지는 않는다"는 김태현 연극 연출가의 말대로 어머니들은 웃음과 활력을 찾다가도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맞는다. 무대를 준비하다 말고 "수면제 한 달 보름 거"를 다 삼키기도 하고, 단원고 강당에서 연극을 하게 됐을 땐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에 들어간단 생각만으로 잠을 설친다.

그러나 이때에도 '장기자랑'은 전형적인 피해자들의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는다. 울고 까무러치고 화내고 호소하는, 수차례 되풀이된 피해자들의 모습을. 수면제 이야기를 꺼내는 최지영 씨 (故 권순범 군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공연 전 떨리는 맘을 우황청심환으로 달랜다는 얘기를 하며 김도현 씨(故 정동수 군 어머니)가 '도핑 검사해야 한다'는 엄마들끼리의 농담 한마디를 보태는 식이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수도 있지만,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다'는 이미경 씨의 고백은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울림을 남긴다.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전시하지 않아도, '장기자랑'은 훌륭한 세월호 다큐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게 수학 여행지에 도착하는' 무대 위 연극과 다큐 속 엄마들, 그리고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는 2023년 4월의 현실이 작품을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엇갈리며 세월호 사건의 의미와 무게를 곱씹게 한다. 예를 들어, '애들 다 어디 갔지?' 하는 연극 대사 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가 팽목항 전경을 비추는 순간,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도 관객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는다. 아이들이 결코 도착하지 못했던 제주 바다를 엄마들이 대신 밟을 때, 연극을 시작하는 하나 둘 셋 준비 구호 소리로 다큐멘터리가 문을 닫을 때도 마찬가지다. 빼어난 작품, 부디 많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상영관이 많지 않다. 세월호 참사 9주기는 다음 주지만, 그때까지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을 거란 보장이 없어 이번 주 영화로 꼽았다. 지겹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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