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극비]① ‘콩 볶듯 총소리가’…죽음의 실체를 쫓다

입력 2023.04.11 (07:00) 수정 2023.04.1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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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기자주] 제주 4·3 75주년인 올해는 6·25전쟁이 멈춘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25전쟁 직후 제주에선 4·3과 관련됐단 이유로 또다시 양민 학살이 자행됐는데요. 극비로 진행된 이 ’예비검속‘의 실체를 3차례에 걸쳐 조명해보겠습니다.


■ 고무신 따라가니 학살터…6년 뒤에야 시신 수습

1950년 8월 20일 새벽,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섯알오름으로 가는 길에 고무신 여러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인근을 지나던 한 노인은 마치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를 듣고 다른 주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총소리가 났던 탄약고터 2곳엔 약 200구의 시신들이 철근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며 죄명도 없이 경찰에 붙잡혀간 이른바 '예비검속자'들이었습니다.

길가의 고무신은 죽음을 직감한 예비검속자들이 트럭 위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내던진 것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시신 수습에 나섰지만, 군인들의 제지로 접근이 금지됐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故 이경익 할아버지는 "시체를 꺼내기 시작하는데 철근에 끼여서 꿈쩍을 안 했다"며 "겨우 27구를 꺼냈는데 군인들이 원상복구 시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살기 위해 내려놨다"고 1999년에 증언을 남겼습니다.

집단 학살된 시신은 6년이 지나서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예비검속으로 큰 형을 잃은 열여덟 소년의 일기장엔 그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 양신하 할아버지가 1956년 5월 18일 쓴 일기.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 양신하 할아버지가 1956년 5월 18일 쓴 일기.

단기 4289년(1956년) 5월 18일
"오늘은 한 시간의 생물 수업을 하고서 선생님으로부터 '비행장 동남쪽 서란봉에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뼈가 있는 곳에 형님의 뼈를 찾으러 가라'고 했다. 현장에 갔는데 형수님이 먼저 와 있었고 많은 사람 속에서 나를 찾아와 '아주버니 형은 특별히 키가 컸으니 큰 뼈가 나오면 찾으라'고 하였다."

이제는 여든다섯의 노인이 된 양신하 할아버지는 "떼죽음된 뼈들이 나오는데 어느 게 큰지 알 수가 없었다"며 "해가 거의 떨어져 가니까 형수님이 '아무 거라도 하나 차지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양 할아버지는 이어 "덧니나 금니가 있거나 비녀가 꽂혀있는 사람들은 누군지 특정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가져온 게 형님 뼈가 맞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서귀포시 모슬포 예비검속자 묘역 인근에 세워진 ‘백조일손지지 위령비’.  1961년 경찰에 의해 훼손됐다 다시 세워졌다.서귀포시 모슬포 예비검속자 묘역 인근에 세워진 ‘백조일손지지 위령비’. 1961년 경찰에 의해 훼손됐다 다시 세워졌다.

유족들은 백 명 넘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죽어 함께 제사를 치르니 그 자손은 하나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비마저 1961년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훼손되고 맙니다.

양 할아버지는 "양민들을 학살했다는 것이 탄로가 나면 군정에 치명타를 준다고 해서 서귀포경찰서장에게 시켜 무덤도 파헤치고 비석도 깨부숴버렸다"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 부친 잃은 3살 아이, 학살의 실체를 쫓다

왜 이토록 은폐하려 했던 걸까요.

제104회 국무회의록. 1952년 11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고 보안유지를 당부했다.제104회 국무회의록. 1952년 11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고 보안유지를 당부했다.

예비검속은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유시 사항으로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습니다.

수백 명이 한 자리에서 학살된 참상의 실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건 한 유족의 집념이었습니다.

3살 때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잃은 故이도영 박사(1947~2012). 연좌제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1997년부터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예비검속을 추적했다.3살 때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잃은 故이도영 박사(1947~2012). 연좌제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1997년부터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예비검속을 추적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예비검속으로 잃고 연좌제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故이도영 박사는 1997년부터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예비검속을 추적했습니다.

KBS가 입수한 이 박사의 일기장엔 한 맺힌 그의 절규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故이도영 박사가 1997년 12월 13일에 쓴 일기 일부분.故이도영 박사가 1997년 12월 13일에 쓴 일기 일부분.

1997년 12월 13일
"악마의 손길이 할퀴고 간 생채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그 아비규환의 4·3, 그리고 6·25 직후의 검속령 장면, 쫓고 쫓기는 그리고 동족이 동족을 무참하게 죽이는 살인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나의 뇌리에 전개되어갔다."

일기장엔 5·16 이후 파기될 뻔한 경찰 공문서들을 입수하게 된 경위부터 증언자들과 나눈 대화가 기록됐습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살다시피 한 이 박사는 섯알오름 학살 사흘 전 제주에 1,120명이 분산 수감됐다는 미국 비밀문서를 찾아내 이전까지 암흑 속에 묻혀 있던 예비검속을 양지로 끌어 올렸습니다.


6·25전쟁 시기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명 처형 문서와 사진을 발굴해 민간인 학살의 실상을 밝혀낸 것도 그였습니다.

박찬식 전 제주4·3연구소장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진들이 이도영 박사를 통해 알려지게 됐다"면서 "4·3의 진상 뿐만 아니라 6·25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진실 규명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그를 기억했습니다.

2001년 이 박사는 6·25전쟁 당시 서귀포 모슬포에 주둔했던 해병대 제3대대 지휘관을 추적해 직접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세 살 아기가 50년이 흘러 학살의 책임을 물으러 간 겁니다.


당시 그가 직접 촬영한 영상을 보면, 이 박사는 "누구의 명령으로 부하들에게 총을 쏘도록 했느냐"고 물으며 "지금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억울한 한을 풀 길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지휘관은 "전쟁 때 위급한 상황에서 일들을 하다 보면 잘못된 일도 많았을 것"이라며 "지금 이걸 다 따져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이 박사는 "장군님 아버님이 억울하게 죽었으면, 예를 들어 갑자기 칼로 찔러서 죽였다 하면 '그거 어떻게 하겠어'라고 하고 말겠느냐"면서 "사실을 밝히지 않겠느냐"고 절규했습니다.

이 박사는 또 예비검속자 처형 지시 문건에 기록된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를 찾아가 책임을 묻고, 권력의 핵심이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를 만나 양민 학살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예비검속을 추적하던 故이도영 박사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예비검속을 추적하던 故이도영 박사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같은 아픔을 가진 유족들에게 자신의 추적 과정을 알리는 자리에선 "우리 아버지·형님·어머니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학살자가, 정부가 얘기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애타게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일기장을 간직해온 이 박사의 동생 이도식 할아버지는 "주변에서 '그거 하면 몸 망가지고 스트레스도 받는데 뭐하러 하느냐'고 했지만, 형님은 '아무도 못 하는 걸 살아 생전에 내가 해야지 누가 하겠냐'고 하면서 끈질기게 했다"며 고개를 내둘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이어 "형님이 미국 문서보관소에 비밀 해제를 신청해놓은 게 있는데 그걸 다 보지 못하고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며 "그런 조사를 하고 다니면서 심신이 괴롭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박사의 울분은 '죽음의 예비검속'이라는 저서로 남아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첫 4·3 진상조사보고서에 인용됐습니다.

이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예비검속의 불법성을 조사한 조정희 전 조사위원은 "국가가 나서서 무언가를 제도적으로 해주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오롯이 개인이 본인의 아버지, 그리고 피해 유족들을 위해 미국을 오가며 애쓰셨다"며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예비검속의 실체라든지 진상이 수면 위에 올라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감사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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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극비’ 제주 예비검속…실체 규명은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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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극비]① ‘콩 볶듯 총소리가’…죽음의 실체를 쫓다
    • 입력 2023-04-11 07:00:51
    • 수정2023-04-11 07:01:44
    취재K
[기자주] 제주 4·3 75주년인 올해는 6·25전쟁이 멈춘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25전쟁 직후 제주에선 4·3과 관련됐단 이유로 또다시 양민 학살이 자행됐는데요. 극비로 진행된 이 ’예비검속‘의 실체를 3차례에 걸쳐 조명해보겠습니다.<br />

■ 고무신 따라가니 학살터…6년 뒤에야 시신 수습

1950년 8월 20일 새벽,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 섯알오름으로 가는 길에 고무신 여러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인근을 지나던 한 노인은 마치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를 듣고 다른 주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총소리가 났던 탄약고터 2곳엔 약 200구의 시신들이 철근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며 죄명도 없이 경찰에 붙잡혀간 이른바 '예비검속자'들이었습니다.

길가의 고무신은 죽음을 직감한 예비검속자들이 트럭 위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내던진 것이었습니다.

주민들이 시신 수습에 나섰지만, 군인들의 제지로 접근이 금지됐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故 이경익 할아버지는 "시체를 꺼내기 시작하는데 철근에 끼여서 꿈쩍을 안 했다"며 "겨우 27구를 꺼냈는데 군인들이 원상복구 시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살기 위해 내려놨다"고 1999년에 증언을 남겼습니다.

집단 학살된 시신은 6년이 지나서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예비검속으로 큰 형을 잃은 열여덟 소년의 일기장엔 그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 양신하 할아버지가 1956년 5월 18일 쓴 일기.
단기 4289년(1956년) 5월 18일
"오늘은 한 시간의 생물 수업을 하고서 선생님으로부터 '비행장 동남쪽 서란봉에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뼈가 있는 곳에 형님의 뼈를 찾으러 가라'고 했다. 현장에 갔는데 형수님이 먼저 와 있었고 많은 사람 속에서 나를 찾아와 '아주버니 형은 특별히 키가 컸으니 큰 뼈가 나오면 찾으라'고 하였다."

이제는 여든다섯의 노인이 된 양신하 할아버지는 "떼죽음된 뼈들이 나오는데 어느 게 큰지 알 수가 없었다"며 "해가 거의 떨어져 가니까 형수님이 '아무 거라도 하나 차지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양 할아버지는 이어 "덧니나 금니가 있거나 비녀가 꽂혀있는 사람들은 누군지 특정할 수 있었지만, 우리가 가져온 게 형님 뼈가 맞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서귀포시 모슬포 예비검속자 묘역 인근에 세워진 ‘백조일손지지 위령비’.  1961년 경찰에 의해 훼손됐다 다시 세워졌다.
유족들은 백 명 넘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죽어 함께 제사를 치르니 그 자손은 하나라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비마저 1961년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훼손되고 맙니다.

양 할아버지는 "양민들을 학살했다는 것이 탄로가 나면 군정에 치명타를 준다고 해서 서귀포경찰서장에게 시켜 무덤도 파헤치고 비석도 깨부숴버렸다"고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 부친 잃은 3살 아이, 학살의 실체를 쫓다

왜 이토록 은폐하려 했던 걸까요.

제104회 국무회의록. 1952년 11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고 보안유지를 당부했다.
예비검속은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유시 사항으로 "경찰의 예비검속은 공표하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습니다.

수백 명이 한 자리에서 학살된 참상의 실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건 한 유족의 집념이었습니다.

3살 때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잃은 故이도영 박사(1947~2012). 연좌제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1997년부터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예비검속을 추적했다.
3살 때 아버지를 예비검속으로 잃고 연좌제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故이도영 박사는 1997년부터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예비검속을 추적했습니다.

KBS가 입수한 이 박사의 일기장엔 한 맺힌 그의 절규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故이도영 박사가 1997년 12월 13일에 쓴 일기 일부분.
1997년 12월 13일
"악마의 손길이 할퀴고 간 생채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그 아비규환의 4·3, 그리고 6·25 직후의 검속령 장면, 쫓고 쫓기는 그리고 동족이 동족을 무참하게 죽이는 살인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나의 뇌리에 전개되어갔다."

일기장엔 5·16 이후 파기될 뻔한 경찰 공문서들을 입수하게 된 경위부터 증언자들과 나눈 대화가 기록됐습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살다시피 한 이 박사는 섯알오름 학살 사흘 전 제주에 1,120명이 분산 수감됐다는 미국 비밀문서를 찾아내 이전까지 암흑 속에 묻혀 있던 예비검속을 양지로 끌어 올렸습니다.


6·25전쟁 시기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명 처형 문서와 사진을 발굴해 민간인 학살의 실상을 밝혀낸 것도 그였습니다.

박찬식 전 제주4·3연구소장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진들이 이도영 박사를 통해 알려지게 됐다"면서 "4·3의 진상 뿐만 아니라 6·25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진실 규명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그를 기억했습니다.

2001년 이 박사는 6·25전쟁 당시 서귀포 모슬포에 주둔했던 해병대 제3대대 지휘관을 추적해 직접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세 살 아기가 50년이 흘러 학살의 책임을 물으러 간 겁니다.


당시 그가 직접 촬영한 영상을 보면, 이 박사는 "누구의 명령으로 부하들에게 총을 쏘도록 했느냐"고 물으며 "지금 역사의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억울한 한을 풀 길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지휘관은 "전쟁 때 위급한 상황에서 일들을 하다 보면 잘못된 일도 많았을 것"이라며 "지금 이걸 다 따져서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이 박사는 "장군님 아버님이 억울하게 죽었으면, 예를 들어 갑자기 칼로 찔러서 죽였다 하면 '그거 어떻게 하겠어'라고 하고 말겠느냐"면서 "사실을 밝히지 않겠느냐"고 절규했습니다.

이 박사는 또 예비검속자 처형 지시 문건에 기록된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를 찾아가 책임을 묻고, 권력의 핵심이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를 만나 양민 학살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예비검속을 추적하던 故이도영 박사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같은 아픔을 가진 유족들에게 자신의 추적 과정을 알리는 자리에선 "우리 아버지·형님·어머니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학살자가, 정부가 얘기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애타게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일기장을 간직해온 이 박사의 동생 이도식 할아버지는 "주변에서 '그거 하면 몸 망가지고 스트레스도 받는데 뭐하러 하느냐'고 했지만, 형님은 '아무도 못 하는 걸 살아 생전에 내가 해야지 누가 하겠냐'고 하면서 끈질기게 했다"며 고개를 내둘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이어 "형님이 미국 문서보관소에 비밀 해제를 신청해놓은 게 있는데 그걸 다 보지 못하고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며 "그런 조사를 하고 다니면서 심신이 괴롭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 박사의 울분은 '죽음의 예비검속'이라는 저서로 남아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첫 4·3 진상조사보고서에 인용됐습니다.

이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예비검속의 불법성을 조사한 조정희 전 조사위원은 "국가가 나서서 무언가를 제도적으로 해주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오롯이 개인이 본인의 아버지, 그리고 피해 유족들을 위해 미국을 오가며 애쓰셨다"며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예비검속의 실체라든지 진상이 수면 위에 올라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감사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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