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귀국길에 폭발 ‘우키시마호’…진상 규명 가능할까?

입력 2023.04.11 (10:03) 수정 2023.04.1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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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24일,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앞바다에서 침몰한 ‘우키시마호’1945년 8월24일,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앞바다에서 침몰한 ‘우키시마호’

■ 귀국 1호선 '우키시마호'의 비극

'우키시마호' 사건은 우리 국민 수천 명이 한번에 목숨을 잃은 대형 해난 사건인데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키시마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태운 '귀국 1호선'이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직후, 일본에 강제동원돼 끌려갔던 우리 국민들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8월22일, 일본 아오모리 오미나토항을 출발한 배는 부산이 아닌 남쪽 교토 방향으로 항로를 틀었습니다. 이틀 뒤인 8월24일, 교토 북부 마이즈루시 앞바다에서 큰 폭발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이 났고, 고향땅을 밟을 기대에 부풀어 있던 우리 국민 수천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이즈루 시민들은 사고 해역을 '아이고의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 우연히 기뢰 건드려 폭발?

우키시마호는 일본 해군의 수송선이었습니다. 사고 당시 배를 운항한 당사자도 일본 해군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깔아 놓은 기뢰에 부딪혀 배가 폭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사결과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부산항으로 간다던 배가 왜 돌연 항로를 바꿨는지, 사고가 난 해역에서 우키시마호 외에 다른 배는 왜 모두 무사했는지, 사고 바로 직전 일본 해군은 왜 고무보트를 타고 배를 빠져나갔는지, 출항 당시 연료는 왜 편도 운항만 가능한 양을 채웠는지, 어느 것 하나 해명된 게 없습니다.

당시 일본 해군이 작성한 해도는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마이즈루는 일본 해군 기지가 있던 곳입니다. 해군 함정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미군 기뢰를 모두 제거한 안전항로를 지도에 녹색으로 표시해 놨습니다. 우키시마호가 폭발한 곳은 안전항로 한 가운데였습니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 조사해 온 시나다 시게루 씨(마이즈루 순난자 추도회 회장)는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에 강한 의문을 나타냈습니다. "미군이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낙하산을 달아 기뢰를 떨어뜨렸습니다. 일본군은 쌍안경으로 지켜보며 기뢰 낙하지점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한 기뢰 처리 전문가가 조사해 보니, 465개가 떨어졌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전쟁 후에 미국이 공개한 자료와 비교해 보니 미군이 떨어뜨린 기뢰 숫자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기뢰에 부딪혔다는 발표는 이해가 잘 안 가는 대목입니다."

일본 정부가 작성한 ‘우키시마호’ 사망자 명부일본 정부가 작성한 ‘우키시마호’ 사망자 명부

■ 사망자 규모, 524명? 8천 명?

정확한 희생자 규모도 모릅니다. 일본 정부는 3,725명이 승선했고, 사망자는 524명, 실종자는 천여 명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승선자는 5천~8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각에선 1만 3천여 명이 탔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승선자 명부 작성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마이즈루 주민들은 "시신이 해변가로 엄청나게 밀려 들었다"고 했습니다. 일본 해군이 시신을 엄청나게 묻었다, 바닷가에 시신을 잔뜩 쌓은 뒤 기름을 뿌려 화장했다, 시신에 무거운 것을 매달아 수장시켰다… 당시 사고해역 인근 주민들이 과거 지역 언론 등에 전했던 목격담 내용입니다.

■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원숭이"

78년이 지났습니다. 생존자도, 사고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도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KBS 취재팀은 사고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당시 주민 한 분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놀랐고 무서웠다면서 교실로 뛰어 들어오며 얘기했습니다. 교실에서 하루 종일 그 얘기만 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이 주민은 우키시마호 사건 당시 상황을 몇 년 전 편지글로 자세히 기록해 놨습니다.

"8월24일, 집에서 갑자기 큰 폭발음에 놀란 것은 저녁쯤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 소음, 해상에 손을 뻗는 것처럼 튀어 올라와 있던 우키시마호의 돛대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8월25일, 등교하니 모두 웅성웅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원숭이'처럼, 다들 곧 조용해졌습니다. 소련군이 침입할 거란 소문이 돌았고, 그것 때문에 몸을 숨기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남은 학생들은 학교의 연혁이나 전시교육 관련 서적들을 교정에서 소각처분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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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나카타 마사요시 씨변호사 나카타 마사요시 씨

■ "희생자 유해 송환, 정치적으로 풀어야"

1992년 생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이 열린 교토지방법원은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려,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판결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뒤집혔습니다. 일본 정부가 안전하게 귀환시킬 책임이 없고, 한일기본조약으로 보상도 모두 끝났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취재팀은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을 도와 소송을 이끌었던 일본인 변호사 나카타 마사요시 씨를 만났습니다. 당시 재판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사고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배를 인양했던 회사가 인양 당시 사진이나 기록을 전혀 공개하지 않아, '우연히 기뢰에 부딪힌 것'이라는 일본 정부 주장을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나카타 씨는 "합병으로 많은 조선인을 일본에 데려왔으면, 전쟁이 끝난 뒤 당연히 무사히 태어난 곳으로 보내주어야 한다. 원인을 만든 국가는 일본인데, 법률적으로 풀기가 어려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희생자의 유해를 찾아 한국으로 송환하기 위해선, 한일 양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방 후 78년이 지났지만, 정부는 이 문제에 아직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유족들도 고령이 됐습니다. 기억들이 사라지면서, 이 사건의 진실도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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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후 귀국길에 폭발 ‘우키시마호’…진상 규명 가능할까?
    • 입력 2023-04-11 10:03:20
    • 수정2023-04-11 11:36:43
    취재K
1945년 8월24일,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앞바다에서 침몰한 ‘우키시마호’
■ 귀국 1호선 '우키시마호'의 비극

'우키시마호' 사건은 우리 국민 수천 명이 한번에 목숨을 잃은 대형 해난 사건인데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우키시마호'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태운 '귀국 1호선'이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직후, 일본에 강제동원돼 끌려갔던 우리 국민들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8월22일, 일본 아오모리 오미나토항을 출발한 배는 부산이 아닌 남쪽 교토 방향으로 항로를 틀었습니다. 이틀 뒤인 8월24일, 교토 북부 마이즈루시 앞바다에서 큰 폭발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이 났고, 고향땅을 밟을 기대에 부풀어 있던 우리 국민 수천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이즈루 시민들은 사고 해역을 '아이고의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 우연히 기뢰 건드려 폭발?

우키시마호는 일본 해군의 수송선이었습니다. 사고 당시 배를 운항한 당사자도 일본 해군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깔아 놓은 기뢰에 부딪혀 배가 폭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사결과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부산항으로 간다던 배가 왜 돌연 항로를 바꿨는지, 사고가 난 해역에서 우키시마호 외에 다른 배는 왜 모두 무사했는지, 사고 바로 직전 일본 해군은 왜 고무보트를 타고 배를 빠져나갔는지, 출항 당시 연료는 왜 편도 운항만 가능한 양을 채웠는지, 어느 것 하나 해명된 게 없습니다.

당시 일본 해군이 작성한 해도는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마이즈루는 일본 해군 기지가 있던 곳입니다. 해군 함정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미군 기뢰를 모두 제거한 안전항로를 지도에 녹색으로 표시해 놨습니다. 우키시마호가 폭발한 곳은 안전항로 한 가운데였습니다.

우키시마호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 조사해 온 시나다 시게루 씨(마이즈루 순난자 추도회 회장)는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에 강한 의문을 나타냈습니다. "미군이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낙하산을 달아 기뢰를 떨어뜨렸습니다. 일본군은 쌍안경으로 지켜보며 기뢰 낙하지점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한 기뢰 처리 전문가가 조사해 보니, 465개가 떨어졌다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전쟁 후에 미국이 공개한 자료와 비교해 보니 미군이 떨어뜨린 기뢰 숫자와 차이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기뢰에 부딪혔다는 발표는 이해가 잘 안 가는 대목입니다."

일본 정부가 작성한 ‘우키시마호’ 사망자 명부
■ 사망자 규모, 524명? 8천 명?

정확한 희생자 규모도 모릅니다. 일본 정부는 3,725명이 승선했고, 사망자는 524명, 실종자는 천여 명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승선자는 5천~8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각에선 1만 3천여 명이 탔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승선자 명부 작성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마이즈루 주민들은 "시신이 해변가로 엄청나게 밀려 들었다"고 했습니다. 일본 해군이 시신을 엄청나게 묻었다, 바닷가에 시신을 잔뜩 쌓은 뒤 기름을 뿌려 화장했다, 시신에 무거운 것을 매달아 수장시켰다… 당시 사고해역 인근 주민들이 과거 지역 언론 등에 전했던 목격담 내용입니다.

■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원숭이"

78년이 지났습니다. 생존자도, 사고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도 거의 세상을 떠났습니다. KBS 취재팀은 사고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당시 주민 한 분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놀랐고 무서웠다면서 교실로 뛰어 들어오며 얘기했습니다. 교실에서 하루 종일 그 얘기만 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이 주민은 우키시마호 사건 당시 상황을 몇 년 전 편지글로 자세히 기록해 놨습니다.

"8월24일, 집에서 갑자기 큰 폭발음에 놀란 것은 저녁쯤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 소음, 해상에 손을 뻗는 것처럼 튀어 올라와 있던 우키시마호의 돛대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8월25일, 등교하니 모두 웅성웅성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원숭이'처럼, 다들 곧 조용해졌습니다. 소련군이 침입할 거란 소문이 돌았고, 그것 때문에 몸을 숨기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남은 학생들은 학교의 연혁이나 전시교육 관련 서적들을 교정에서 소각처분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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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나카타 마사요시 씨
■ "희생자 유해 송환, 정치적으로 풀어야"

1992년 생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심이 열린 교토지방법원은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려,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판결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뒤집혔습니다. 일본 정부가 안전하게 귀환시킬 책임이 없고, 한일기본조약으로 보상도 모두 끝났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취재팀은 당시 한국인 피해자들을 도와 소송을 이끌었던 일본인 변호사 나카타 마사요시 씨를 만났습니다. 당시 재판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사고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배를 인양했던 회사가 인양 당시 사진이나 기록을 전혀 공개하지 않아, '우연히 기뢰에 부딪힌 것'이라는 일본 정부 주장을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나카타 씨는 "합병으로 많은 조선인을 일본에 데려왔으면, 전쟁이 끝난 뒤 당연히 무사히 태어난 곳으로 보내주어야 한다. 원인을 만든 국가는 일본인데, 법률적으로 풀기가 어려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희생자의 유해를 찾아 한국으로 송환하기 위해선, 한일 양국 정부가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방 후 78년이 지났지만, 정부는 이 문제에 아직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유족들도 고령이 됐습니다. 기억들이 사라지면서, 이 사건의 진실도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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