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美 문건 유출 부른 ‘인터넷 허세’…‘평범한 나’는 왜 그리 초라할까

입력 2023.04.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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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시태그 시그네’(2022)의 한 장면. 사진 제공 판씨네마㈜.영화 ‘해시태그 시그네’(2022)의 한 장면. 사진 제공 판씨네마㈜.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1급 기밀 정보의 유출 동기가 이렇게 사소했을 줄이야. 미국 기밀 문건 유출 용의자 잭 더글라스 테세이라에 대해 알게 될수록 충격과 허탈함이 교차한다. 기밀 관리 부대의 말단 IT 담당자였던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인터넷 채팅방 속 명성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는 게 외신의 설명이다. 고작 24명이 모인 채팅방의 주목과 존경을 받기 위해 테세이라는 기밀 문서를 타이핑해 올렸고, 나중에는 실제 문서를 찍어 공유했다. 남들은 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손에 쥔 신화이자 전설, 영화 속 첩보 요원 뺨치는 진짜 사나이. 테세이라는 자신이 인터넷 친구들 눈에 비친 바로 그런 사람이길 바랐겠지만, 글쎄. 부모님 집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체포되던 그의 모습은 21살짜리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 속에 자기 집 식탁과 바닥 무늬를 노출하고 실제 집 주소와 이름을 사용해 채팅방 계정을 만드는, 딱 그만큼의 인물.

파장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이번 주에는 예단하기 어려운 앞날 대신 테세이라의 내면과 맞닿아 있을 법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지난해 만들어져 한국에는 새해 초 개봉한 노르웨이·스웨덴 영화다. 국내에선 영화가 꼬집는 SNS 세태를 반영하기 위해서인 듯 '해시태그 시그네'라는 (다소 발랄한) 이름을 붙였지만, 영화의 원제는 '식 오브 마이 셀프(Sick of Myself)'다. 제목 그대로, 테세이라처럼 실제보다 더 근사한 인물로 받아들여 지고 싶다는 게 주인공 시그네의 욕망이다. 평범한 찻집 점원인 시그네는 허물처럼 벗어던져 버리고 싶은 자기 자신 대신 새로운 거죽을 뒤집어 쓰길 택한다. 불법 약물을 몇 통씩 삼켜 가며 얻어낸 피부병이다. 아프지 않음에도 거짓말로 남들의 관심과 동정을 이끌려는 '뮌하우젠 증후군'일까. 그러나 온몸이 흉터와 발진이 뒤덮인 뒤에도 사람들은 생각만큼 시그네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그녀는 끊임없이 더 강렬한 스스로를 꿈꾼다.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2022)의 한 장면. 사진 제공 판씨네마㈜.영화 ‘해시태그 시그네’(2022)의 한 장면. 사진 제공 판씨네마㈜.

돈은 없지만, 레스토랑에서 모두 쳐다볼 만큼 비싼 샴페인을 시켜 보고 싶고, 파티에선 재치있는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아보고도 싶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어디 가서 꿀리진 않'고 싶다는 게 시그네의 욕망이다. 딱히 동기가 있어서는 아니다. 예술가 남자친구 토마스 옆에서 자꾸만 무시당하는 자신이 싫을 뿐이다. 대단한 모멸 대신 머쓱한 침묵의 순간들이 욕망을 부추긴다. "혹시 예술하세요?" "아닌데요." "저분은 오빠시죠?" "아뇨, 남자친군데요." 몇 마디 주고받으면 금방 화제가 떨어지고 마는 자신의 평범함이 시그네는 부끄럽다. 가장 최악인 건 온갖 허세로 꾸며낸 실체가 들통나는 거다. 중증 피부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시그네는 검사를 한사코 거부한다. 병의 정체 외에도 다른 것들이 탄로 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거짓말투성이에 성격 나쁜 나 자신이 검사지에 찍혀 나오기라도 할 듯이, 시그네는 MRI 기계에 매달려 촬영을 거부한다.

영화는 실제 사건과 시그네의 공상 사이를 수차례 오가며 '되고 싶은 인물'과 '실제 나' 사이 간극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의 병적 상태를 무겁지 않게 풀어낸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건이 시그네의 설명을 거칠수록 점점 살이 붙고,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이를 이용해 주목받을 생각만 하는 모습을 지켜 보는 건 잔인하지만 퍽 재미있다. 훔친 가구로 예술 작업을 벌이는 남자친구 토마스나, '저널리즘엔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무게를 잡아 놓곤 결국엔 시그네의 기사를 쓰는 친구 마르테 등 주위 인물 역시 하나같이 비꼬고 싶은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시그네의 피부병이 심각해지는 후반부에 이르면 피식피식 조소하다가도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건 어째서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목숨을 담보 잡아서라도 평범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시그네가, 피부병을 얻은 뒤엔 치부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멋진 여성으로 치켜세워지는 아이러니를 보며 쉽게들 입에 올리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의 무게를 곱씹게 된다. 시그네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궁금하다면, OTT 서비스와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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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16 08:00:09
    씨네마진국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2022)의 한 장면. 사진 제공 판씨네마㈜.
※일요일 아침, 그 주의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화를 소개합니다. 영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1급 기밀 정보의 유출 동기가 이렇게 사소했을 줄이야. 미국 기밀 문건 유출 용의자 잭 더글라스 테세이라에 대해 알게 될수록 충격과 허탈함이 교차한다. 기밀 관리 부대의 말단 IT 담당자였던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인터넷 채팅방 속 명성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는 게 외신의 설명이다. 고작 24명이 모인 채팅방의 주목과 존경을 받기 위해 테세이라는 기밀 문서를 타이핑해 올렸고, 나중에는 실제 문서를 찍어 공유했다. 남들은 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손에 쥔 신화이자 전설, 영화 속 첩보 요원 뺨치는 진짜 사나이. 테세이라는 자신이 인터넷 친구들 눈에 비친 바로 그런 사람이길 바랐겠지만, 글쎄. 부모님 집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체포되던 그의 모습은 21살짜리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 속에 자기 집 식탁과 바닥 무늬를 노출하고 실제 집 주소와 이름을 사용해 채팅방 계정을 만드는, 딱 그만큼의 인물.

파장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이번 주에는 예단하기 어려운 앞날 대신 테세이라의 내면과 맞닿아 있을 법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지난해 만들어져 한국에는 새해 초 개봉한 노르웨이·스웨덴 영화다. 국내에선 영화가 꼬집는 SNS 세태를 반영하기 위해서인 듯 '해시태그 시그네'라는 (다소 발랄한) 이름을 붙였지만, 영화의 원제는 '식 오브 마이 셀프(Sick of Myself)'다. 제목 그대로, 테세이라처럼 실제보다 더 근사한 인물로 받아들여 지고 싶다는 게 주인공 시그네의 욕망이다. 평범한 찻집 점원인 시그네는 허물처럼 벗어던져 버리고 싶은 자기 자신 대신 새로운 거죽을 뒤집어 쓰길 택한다. 불법 약물을 몇 통씩 삼켜 가며 얻어낸 피부병이다. 아프지 않음에도 거짓말로 남들의 관심과 동정을 이끌려는 '뮌하우젠 증후군'일까. 그러나 온몸이 흉터와 발진이 뒤덮인 뒤에도 사람들은 생각만큼 시그네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그녀는 끊임없이 더 강렬한 스스로를 꿈꾼다.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2022)의 한 장면. 사진 제공 판씨네마㈜.
돈은 없지만, 레스토랑에서 모두 쳐다볼 만큼 비싼 샴페인을 시켜 보고 싶고, 파티에선 재치있는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아보고도 싶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어디 가서 꿀리진 않'고 싶다는 게 시그네의 욕망이다. 딱히 동기가 있어서는 아니다. 예술가 남자친구 토마스 옆에서 자꾸만 무시당하는 자신이 싫을 뿐이다. 대단한 모멸 대신 머쓱한 침묵의 순간들이 욕망을 부추긴다. "혹시 예술하세요?" "아닌데요." "저분은 오빠시죠?" "아뇨, 남자친군데요." 몇 마디 주고받으면 금방 화제가 떨어지고 마는 자신의 평범함이 시그네는 부끄럽다. 가장 최악인 건 온갖 허세로 꾸며낸 실체가 들통나는 거다. 중증 피부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시그네는 검사를 한사코 거부한다. 병의 정체 외에도 다른 것들이 탄로 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거짓말투성이에 성격 나쁜 나 자신이 검사지에 찍혀 나오기라도 할 듯이, 시그네는 MRI 기계에 매달려 촬영을 거부한다.

영화는 실제 사건과 시그네의 공상 사이를 수차례 오가며 '되고 싶은 인물'과 '실제 나' 사이 간극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의 병적 상태를 무겁지 않게 풀어낸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건이 시그네의 설명을 거칠수록 점점 살이 붙고,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이를 이용해 주목받을 생각만 하는 모습을 지켜 보는 건 잔인하지만 퍽 재미있다. 훔친 가구로 예술 작업을 벌이는 남자친구 토마스나, '저널리즘엔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무게를 잡아 놓곤 결국엔 시그네의 기사를 쓰는 친구 마르테 등 주위 인물 역시 하나같이 비꼬고 싶은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시그네의 피부병이 심각해지는 후반부에 이르면 피식피식 조소하다가도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건 어째서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목숨을 담보 잡아서라도 평범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시그네가, 피부병을 얻은 뒤엔 치부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멋진 여성으로 치켜세워지는 아이러니를 보며 쉽게들 입에 올리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의 무게를 곱씹게 된다. 시그네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궁금하다면, OTT 서비스와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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