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 5·18] 헌혈차 생존 여고생 문순애 “계엄군이 헌혈차에도 무차별 총격”

입력 2023.04.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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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당시 헌혈버스. 계엄군의 헌혈차 총격으로 희생된 故박금희 열사(아래)와 박 열사의 친구 문순애(위)1980년 5.18 당시 헌혈버스. 계엄군의 헌혈차 총격으로 희생된 故박금희 열사(아래)와 박 열사의 친구 문순애(위)

적십자 표시에 '헌혈'이라고 쓰여진 버스. 1980년 5월 21일, 당시 춘태여상(현 전남여상) 3학년이던 박금희와 문순애는 헌혈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을 받았습니다. 문순애는 친구 박금희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걸로 우리가 피 흘리고 희생당하고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자기나라 국민을 그렇게 죽이고, 적군도 그렇게 안 하는데 헌헐차에 총을 무자비하게 쏘도고 나 몰라라 하고. 이런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게 너무 불합리한 것 같아요.

KBS광주 [영상채록5.18]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문순애 씨.KBS광주 [영상채록5.18]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문순애 씨.

5·18 당시 계엄군의 헌혈차 총격으로 희생된 고등학생 故박금희. 헌혈차에 함께 탔던 박금희의 친구 문순애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만났습니다.

■1980년, 평범한 여고생 문순애와 박금희
1980년 5월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그 날입니다. 문순애 씨는 자취방으로 찾아온 친구 박금희에게 밥을 새로 지어 먹였습니다. 그런데 이 따뜻한 밥 한 끼가 박금희의 마지막 식사가 됐습니다.

제가 시위를 한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고, 시국에 관심을 가지거나 이러질 않았거든요. 그런데 수요일 날이었어요. 5월 21일이죠. 제가 자취하는 곳으로 친구 박금희가 왔어요.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을 새로 해서 줬어요.
이제 잘 가라고 바래다 주려고 대문 밖으로 나갔는데, 헌혈차가 지나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피가 부족하다.'고 헌혈을 해달라고 가두 방송을 했어요.
제가 '나는 시위는 안 하지만 헌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랬어요. 그러니까 금희가 그러자고 해서 그 헌혈차를 탔어요.

■헌혈차에 올라탄 소녀들
당시 계엄군의 발포와 강경 진압으로 주요 병원마다 중상 환자가 넘쳤고, 치료를 위한 혈액이 부족했습니다. 그러자 어린 학생들까지 앞다퉈 헌혈에 나선 겁니다. 광주기독병원에도 금세 헌혈 인파가 몰리면서 혈액을 담을 병이 부족했을 정도입니다.

마이크로 버스였고 적십자 표시가 있었는데, 버스 안에 김밥이랑 음료수가 굉장히 많이 있었어요. '전두환 물러가라' 그런 구호도 간간히 외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주로 젊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차를 타고 기독병원으로 헌혈하러 갔는데 피를 담을 병이 없대요. 너무나 많은 사람이 헌혈을 해가지고요.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호응했던 것 같아요.

■헌혈차 타고 집으로 가다가...
1980년 당시 광주시 도심의 헌혈버스1980년 당시 광주시 도심의 헌혈버스

이 날 문순애와 박금희는 기독병원에서 헌혈 병이 부족해 헌혈을 하지 못 했습니다. 헌혈에 참여하려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헌혈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광주시 지원동에서 계엄군을 마주했습니다. 금남로에서 집단 발포가 있고 난 뒤 화순 방면 외곽으로 이동하던 군부대였습니다.

지원동 쪽으로 한 번 돌아서 이렇게 집에 데려다 준다고 그랬어요. 지원동 시내버스 1번 종점 있는 데서 이렇게 차를 돌려가지고 다시 시내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다다다다' 총 소리가 났어요. 누군가 '엎드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의자 밑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한참을 콩 볶는 소리가 났어요.

■헌혈차에 무차별 총격
당시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물러나 광주 외곽을 봉쇄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습니다. 군용 트럭마다 수십 명씩 무장한 군인들이 탔습니다. 이 군용 트럭에서 헌혈버스에 탄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겁니다. 헌혈버스에는 문순애와 박금희 등 청소년을 포함해 20명 가량이 타고 있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화순쪽으로 나가면서 총을 마구마구 쏘았던 것 같아요. 확실하게 기억해요. 군용 트럭이었어요. 한 대가 아니라 아주 여러 대였어요. 차들이 지나가면서 헌혈차에다가 마구마구 갈겼어요.
저희 적십자 표시가 있는 그 버스를 향해서 총을 마구마구 쐈어요. 유리창이 한 개도 없이 다 깨져 있었어요. 이제 사방이 고요해지니까 누군가가 빨리 일어나라고 해서 주위를 둘러봤더니 친구 금희가 의자에 엎드려 있었어요.
금희가 신음 소리를 내서 '금희야, 일어나' 그랬더니 아무 소리를 못 해요.
세 사람이 다쳤는데 한 사람은 어깨에 총을 맞았고 한 사람은 머리 옆에, 그리고 금희가 허리를 맞았어요.

■총상으로 숨진 박금희
집중 사격을 받은 헌혈버스 안은 아수라장이 됐고 박금희를 포함한 3명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계엄군이 떠난 뒤 헌혈버스는 부상자를 태우고 그대로 다시 기독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문순애 씨는 친구 박금희와 함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총알이 몸을 관통한 박금희는 끝내 숨졌습니다.

병원에서 금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이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산부인과 병동으로 저를 데려갔어요. 제가 들어가니까 산모들이 놀라는 거예요. 제가 입고 있던 옷이 다 피에 젖어 있었나 봐요.
그날 밤에 기독병원에서 밤을 지내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제가 있는 데로 와서 지금 금희가 사망했다고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온갖 생각이 났어요.

■평생 상처로 남은 박금희의 죽음
5월 21일 헌혈차 총격 사건 이후 문순애 씨는 한 달 동안 친척 집에서 지내며 바깥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친구 박금희의 부모님을 만나지도 못 했습니다. 직접 만나서 금희 이야기를 못 해드린 게 아직도 마음이 아픕니다. 씩씩하고 용감하고 인정 많았던, 노래도 곧잘 했던 친구 금희를 떠올리면 더 그렇습니다.

저는 그 후로 사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거든요. 한 달 동안 아예 바깥에 나오지 않았어요. 세상하고 완전히 단절되고, 그리고 그 시간(헌혈차 총격이 있었던 늦은 오후)이 되면 막 가슴이 두근거려서...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5.18묘지에 자주 갔거든요. 친구들이 늘 거기에 갔었어요. 마음이 항상 안 좋았죠. 거기를 다녀오면...

■박금희를 위해…'오월정신'

그때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아서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민주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고맙다. 그리고 내가 네 몫까지 더 선한 사람으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성실하게 살아서 내 주변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거로 해서 우리가 피 흘리고 희생당하고,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모교인 전남여상에는 '박금희 열사 순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후배들은 해마다 추념식을 엽니다.
문순애와 박금희가 헌혈하러 갔던 광주기독병원은 지금도 매년 5월이면 '박금희 열사'를 추모하며 사랑의 생명나눔 헌혈 캠페인을 열고 있습니다. 문순애 씨와 많은 이들이 박금희를 기리며 '오월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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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채록 5·18] 헌혈차 생존 여고생 문순애 “계엄군이 헌혈차에도 무차별 총격”
    • 입력 2023-04-21 07:00:51
    취재K
1980년 5.18 당시 헌혈버스. 계엄군의 헌혈차 총격으로 희생된 故박금희 열사(아래)와 박 열사의 친구 문순애(위)
적십자 표시에 '헌혈'이라고 쓰여진 버스. 1980년 5월 21일, 당시 춘태여상(현 전남여상) 3학년이던 박금희와 문순애는 헌혈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을 받았습니다. 문순애는 친구 박금희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걸로 우리가 피 흘리고 희생당하고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자기나라 국민을 그렇게 죽이고, 적군도 그렇게 안 하는데 헌헐차에 총을 무자비하게 쏘도고 나 몰라라 하고. 이런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게 너무 불합리한 것 같아요.

KBS광주 [영상채록5.18]취재진과 인터뷰 중인 문순애 씨.
5·18 당시 계엄군의 헌혈차 총격으로 희생된 고등학생 故박금희. 헌혈차에 함께 탔던 박금희의 친구 문순애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만났습니다.

■1980년, 평범한 여고생 문순애와 박금희
1980년 5월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그 날입니다. 문순애 씨는 자취방으로 찾아온 친구 박금희에게 밥을 새로 지어 먹였습니다. 그런데 이 따뜻한 밥 한 끼가 박금희의 마지막 식사가 됐습니다.

제가 시위를 한다거나 그런 것도 없었고, 시국에 관심을 가지거나 이러질 않았거든요. 그런데 수요일 날이었어요. 5월 21일이죠. 제가 자취하는 곳으로 친구 박금희가 왔어요.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을 새로 해서 줬어요.
이제 잘 가라고 바래다 주려고 대문 밖으로 나갔는데, 헌혈차가 지나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피가 부족하다.'고 헌혈을 해달라고 가두 방송을 했어요.
제가 '나는 시위는 안 하지만 헌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랬어요. 그러니까 금희가 그러자고 해서 그 헌혈차를 탔어요.

■헌혈차에 올라탄 소녀들
당시 계엄군의 발포와 강경 진압으로 주요 병원마다 중상 환자가 넘쳤고, 치료를 위한 혈액이 부족했습니다. 그러자 어린 학생들까지 앞다퉈 헌혈에 나선 겁니다. 광주기독병원에도 금세 헌혈 인파가 몰리면서 혈액을 담을 병이 부족했을 정도입니다.

마이크로 버스였고 적십자 표시가 있었는데, 버스 안에 김밥이랑 음료수가 굉장히 많이 있었어요. '전두환 물러가라' 그런 구호도 간간히 외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주로 젊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차를 타고 기독병원으로 헌혈하러 갔는데 피를 담을 병이 없대요. 너무나 많은 사람이 헌혈을 해가지고요.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호응했던 것 같아요.

■헌혈차 타고 집으로 가다가...
1980년 당시 광주시 도심의 헌혈버스
이 날 문순애와 박금희는 기독병원에서 헌혈 병이 부족해 헌혈을 하지 못 했습니다. 헌혈에 참여하려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헌혈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광주시 지원동에서 계엄군을 마주했습니다. 금남로에서 집단 발포가 있고 난 뒤 화순 방면 외곽으로 이동하던 군부대였습니다.

지원동 쪽으로 한 번 돌아서 이렇게 집에 데려다 준다고 그랬어요. 지원동 시내버스 1번 종점 있는 데서 이렇게 차를 돌려가지고 다시 시내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다다다다' 총 소리가 났어요. 누군가 '엎드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의자 밑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한참을 콩 볶는 소리가 났어요.

■헌혈차에 무차별 총격
당시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물러나 광주 외곽을 봉쇄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습니다. 군용 트럭마다 수십 명씩 무장한 군인들이 탔습니다. 이 군용 트럭에서 헌혈버스에 탄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겁니다. 헌혈버스에는 문순애와 박금희 등 청소년을 포함해 20명 가량이 타고 있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화순쪽으로 나가면서 총을 마구마구 쏘았던 것 같아요. 확실하게 기억해요. 군용 트럭이었어요. 한 대가 아니라 아주 여러 대였어요. 차들이 지나가면서 헌혈차에다가 마구마구 갈겼어요.
저희 적십자 표시가 있는 그 버스를 향해서 총을 마구마구 쐈어요. 유리창이 한 개도 없이 다 깨져 있었어요. 이제 사방이 고요해지니까 누군가가 빨리 일어나라고 해서 주위를 둘러봤더니 친구 금희가 의자에 엎드려 있었어요.
금희가 신음 소리를 내서 '금희야, 일어나' 그랬더니 아무 소리를 못 해요.
세 사람이 다쳤는데 한 사람은 어깨에 총을 맞았고 한 사람은 머리 옆에, 그리고 금희가 허리를 맞았어요.

■총상으로 숨진 박금희
집중 사격을 받은 헌혈버스 안은 아수라장이 됐고 박금희를 포함한 3명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계엄군이 떠난 뒤 헌혈버스는 부상자를 태우고 그대로 다시 기독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문순애 씨는 친구 박금희와 함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총알이 몸을 관통한 박금희는 끝내 숨졌습니다.

병원에서 금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이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산부인과 병동으로 저를 데려갔어요. 제가 들어가니까 산모들이 놀라는 거예요. 제가 입고 있던 옷이 다 피에 젖어 있었나 봐요.
그날 밤에 기독병원에서 밤을 지내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제가 있는 데로 와서 지금 금희가 사망했다고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온갖 생각이 났어요.

■평생 상처로 남은 박금희의 죽음
5월 21일 헌혈차 총격 사건 이후 문순애 씨는 한 달 동안 친척 집에서 지내며 바깥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친구 박금희의 부모님을 만나지도 못 했습니다. 직접 만나서 금희 이야기를 못 해드린 게 아직도 마음이 아픕니다. 씩씩하고 용감하고 인정 많았던, 노래도 곧잘 했던 친구 금희를 떠올리면 더 그렇습니다.

저는 그 후로 사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거든요. 한 달 동안 아예 바깥에 나오지 않았어요. 세상하고 완전히 단절되고, 그리고 그 시간(헌혈차 총격이 있었던 늦은 오후)이 되면 막 가슴이 두근거려서...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5.18묘지에 자주 갔거든요. 친구들이 늘 거기에 갔었어요. 마음이 항상 안 좋았죠. 거기를 다녀오면...

■박금희를 위해…'오월정신'

그때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아서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민주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고맙다. 그리고 내가 네 몫까지 더 선한 사람으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성실하게 살아서 내 주변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거로 해서 우리가 피 흘리고 희생당하고,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모교인 전남여상에는 '박금희 열사 순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후배들은 해마다 추념식을 엽니다.
문순애와 박금희가 헌혈하러 갔던 광주기독병원은 지금도 매년 5월이면 '박금희 열사'를 추모하며 사랑의 생명나눔 헌혈 캠페인을 열고 있습니다. 문순애 씨와 많은 이들이 박금희를 기리며 '오월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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