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깨져 피 흘릴 것”…중국은 왜 ‘장진호’에 유난스레 흥분하나?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05.03 (07:00) 수정 2023.05.03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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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현지 시각 4월 27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 앞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윤석열 대통령이 현지 시각 4월 27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 앞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미국을 공식 방문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렇게 말합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은 세계 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한미동맹은 한미 양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강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장진호 전투를 위대한 승리라 말하고, 한미 동맹의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장진호 전투 기념비 찾아..."위대한 승리"

윤석열 대통령이냐고요? 아닙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말입니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6월 대통령 취임 뒤 첫 해외 순방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첫 일정으로 버지니아주 콴티코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갔습니다. 참전 용사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 (그에 따른) 흥남 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군의 장진호 작전 덕에 흥남에서 메레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피난한 부모님이 이후 자신을 낳았다는 설명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미국 버지니아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은 세계 전쟁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사진: KBS 디지털 뉴스 캡처)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미국 버지니아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은 세계 전쟁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사진: KBS 디지털 뉴스 캡처)

이처럼 장진호 전투는 한국의 대통령이 한미 동맹을 언급할 때 가장 호소력있게 소환하는 화제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수많은 희생자를 남겼지만 그 과정에서 미군의 치열한 군인 정신을 확인했고 전략적 가치 역시 컸기 때문입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첫 해인 1950년 11월 26일부터 17일 동안 미 해병대 1사단과 한국 육군 제 7사단이 압도적 병력의 중공군 제9병단과 공방을 벌이며 퇴각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혹독한 추위 속 4천 명 넘는 인명 피해가 났기에 미군에게는 뼈아픈 기억입니다.

하지만 이후 역사가들이 분석한 내용을 보면 전투 결과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공군의 피해가 미군을 크게 웃돌아 부대를 오랜 시간에 걸쳐 재편해야 했습니다. 중공군도 기세가 꺾이면서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미군 10군단이 포위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특히 10만명 피난민이 철수한 흥남 철수 작전도 가능해졌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의 남진도 차질을 빚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 당시 미군과 중공군 배치도와 진격로 (사진: KBS 다큐인사이트 ‘1950 미중전쟁’)장진호 전투 당시 미군과 중공군 배치도와 진격로 (사진: KBS 다큐인사이트 ‘1950 미중전쟁’)

■ 장진호 작전으로 흥남 철수 작전 가능...역사적 평가 간단하지 않아

미국 정부도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에게 십자수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스미스 사단장은 훗날 대장으로 예편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미 의회 연설에서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12만 명의 인해전술을 돌파하는 기적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말한 것은 따라서 기본적으로 사실에 부합합니다. 여기에 '세계 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의 일부라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평가를 더하면 대한민국이 정권을 초월해 장진호 전투, 그리고 한미동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윤석열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평가를 비판하며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사진: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윤석열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평가를 비판하며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사진: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오히려 중국의 격한 반응이 더 이목을 끕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4월 28일 정례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관련 발언과 관련해 답하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위대한 승리는 어떤 나라든 어떤 군대든 역사 발전의 흐름과 대척점에 서서 힘을 믿고 약자를 괴롭히고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침략을 확장하면 반드시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는 강철 같은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준다"고 말했습니다. '항미원조는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도왔다'는 의미로 중국이 6.25 전쟁 참전을 정당화하며 쓰는 말입니다.

■ "머리 깨지고 피 흘릴 것"...중국, 유난스레 흥분

일방적 주장이야 할 수 있겠지만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란 극도로 거친 표현을 외교관이 쓰니 중국의 사나운 입이 다시 도마에 올랐습니다. 물론 이 표현이 처음은 아닙니다. 2021년 7월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다름 아닌 시진핑 국가주석이 했던 말입니다. 당시 시 주석은 "누구든 중국을 괴롭히고 압박하거나 노예로 삼겠다는 망상을 품으면 14억 중국인의 피와 살로 쌓아 올린 강철 만리장성에 부딪혀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릴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중국 포털 바이두는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릴 것이다(頭破血流)'란 말의 어원은 <서유기>라고 설명합니다. '손오공이 여의봉으로 도사의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도록 때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같은 거친 표현의 주 대상은 미국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중국 고전에 있는 말이고 자국 정상이 썼던 말이라지만 상대국이 있는, 외교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표현이 과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을 겨냥한다해도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공격하니 한국도 압박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래저래 전랑(늑대전사) 외교라는 꼬리표를 떼기 힘들어 보입니다.

사실 2017년 당시 문 대통령은 장진호 전투 기념탑을 직접 찾아가면서까지 의미를 되새겼으니 중국 정부가 문제를 삼으려면 이때 더 심각하게 지적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엔 큰 시비 없이 넘어간 중국이 윤석열 대통령의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연설 가운데 극히 일부를 떼어내 유난스레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한주 가까이 윤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폄훼하고 있습니다. 관영 CCTV가 장진호 전투를 포함해 중국의 6.25 전쟁 참전을 그린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다'를 2년 여만에 긴급 재편성한 것은 결정판입니다.

중국 CCTV가 제작 방송한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다’ 포스터(사진: 바이두)중국 CCTV가 제작 방송한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다’ 포스터(사진: 바이두)

장진호 전투에 대한 중국 정부의 거친 시비가 충분한 논의나 고민에서 나왔는지도 의문입니다. 마오닝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장진호 전투를 거론하며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도 혼란 중에 차량 전복으로 사망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워커 장군은 장진호가 아닌 한참 이남 서울 북방 전선에서 의정부(현 서울 도봉동)로 가던 중 지프 사고로 숨졌습니다. 적잖은 한국인이 아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름을 딴 '워커힐'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정부의 브리핑은 사실 관계부터 틀린 것입니다. 6.25 전쟁 중 사망한 미군 최고위 인사와 관련한 사실 관계를 틀리니 무언가 다급하게 서둘러 반박에 나선 것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줍니다.

■ 중국 브리핑, 사실 관계도 틀려...윤 대통령 '장진호' 발언에 흥분하는 이유는?

그렇다면 중국은 윤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언급에 왜 이리 유난스레 항미원조를 강조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요? 물론 단기적으로는 윤 대통령이 방미 전부터 외신 인터뷰를 통해 타이완 해협의 평화와 안정, 일방적 현상 변경 반대 등 중국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만한 발언을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워싱턴선언을 통해 미국의 전략자산이 한반도 인근에 더 자주 근접 배치되는 상황이 신경에 거슬릴 수도 있습니다. 경제는 물론 안보 분야까지 확대 양상인 한미일 협력 강화를 반중 연합 강화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부부가 현지시각 4월 26일 백악관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사진: 백악관 홈페이지)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부부가 현지시각 4월 26일 백악관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사진: 백악관 홈페이지)

더불어 상대적으로 긴 호흡에서 볼 필요도 있습니다. 한국외대 강준영 교수 등은 논문「시진핑 시대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레토릭에 관한 연구-'항미원조 정신'을 중심으로(중국학논총 76)」에서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던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항미원조'는 '잊혀진 전쟁'이나 다름없었지만, 2020년을 전후로 미중 무역 전쟁, 코로나19 속에 인민의 단결을 끌어내고 공산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항미원조 정신'이라는 정치적 수사(rhetoric)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합니다.

강 교수 등은 이같은 정치적 필요에 의한 수사가 과잉, 공격적인 행동을 야기하는 등 부작용도 우려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2020년 BTS가 밴플리트 상을 받으면서 "(한미) 양국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희생을 기억해야할 것"이라고만 말했는데도, 중국 관영매체가 중국 군인들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습니다. 이같은 행위가 중국에 대한 신뢰는 낮추고 중국이 바라는 국제질서에 대한 거부감은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설명에 따르면 중국에게 장진호 전투를 포함한 6.25 전쟁은 정치적 맥락에서 강조할 수도, 때론 묻어둘 수도 있는 역사의 기억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참전은 한순간 손에 잡힐 듯했던 통일이 무산되고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소중한 생명이 수없이 희생된 아픔의 시작이었습니다. 중국이 아무리 의용군으로 꾸린 지원군이었다고 강변해도 중국의 군사 행동은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창설된 유엔군에 맞선 행위였습니다. 한국인들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몰라서 잊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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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 깨져 피 흘릴 것”…중국은 왜 ‘장진호’에 유난스레 흥분하나?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3-05-03 07:00:17
    • 수정2023-05-03 07: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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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현지 시각 4월 27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 앞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사진: 연합뉴스)
미국을 공식 방문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렇게 말합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은 세계 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한미동맹은 한미 양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강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장진호 전투를 위대한 승리라 말하고, 한미 동맹의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장진호 전투 기념비 찾아..."위대한 승리"

윤석열 대통령이냐고요? 아닙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말입니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6월 대통령 취임 뒤 첫 해외 순방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첫 일정으로 버지니아주 콴티코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갔습니다. 참전 용사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장진호의 용사들이 없었다면, (그에 따른) 흥남 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군의 장진호 작전 덕에 흥남에서 메레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피난한 부모님이 이후 자신을 낳았다는 설명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미국 버지니아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은 세계 전쟁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사진: KBS 디지털 뉴스 캡처)
이처럼 장진호 전투는 한국의 대통령이 한미 동맹을 언급할 때 가장 호소력있게 소환하는 화제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수많은 희생자를 남겼지만 그 과정에서 미군의 치열한 군인 정신을 확인했고 전략적 가치 역시 컸기 때문입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첫 해인 1950년 11월 26일부터 17일 동안 미 해병대 1사단과 한국 육군 제 7사단이 압도적 병력의 중공군 제9병단과 공방을 벌이며 퇴각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혹독한 추위 속 4천 명 넘는 인명 피해가 났기에 미군에게는 뼈아픈 기억입니다.

하지만 이후 역사가들이 분석한 내용을 보면 전투 결과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공군의 피해가 미군을 크게 웃돌아 부대를 오랜 시간에 걸쳐 재편해야 했습니다. 중공군도 기세가 꺾이면서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미군 10군단이 포위의 위기를 넘겼습니다. 특히 10만명 피난민이 철수한 흥남 철수 작전도 가능해졌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의 남진도 차질을 빚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 당시 미군과 중공군 배치도와 진격로 (사진: KBS 다큐인사이트 ‘1950 미중전쟁’)
■ 장진호 작전으로 흥남 철수 작전 가능...역사적 평가 간단하지 않아

미국 정부도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에게 십자수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스미스 사단장은 훗날 대장으로 예편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미 의회 연설에서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12만 명의 인해전술을 돌파하는 기적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말한 것은 따라서 기본적으로 사실에 부합합니다. 여기에 '세계 전쟁 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의 일부라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평가를 더하면 대한민국이 정권을 초월해 장진호 전투, 그리고 한미동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윤석열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평가를 비판하며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사진: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오히려 중국의 격한 반응이 더 이목을 끕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4월 28일 정례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관련 발언과 관련해 답하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위대한 승리는 어떤 나라든 어떤 군대든 역사 발전의 흐름과 대척점에 서서 힘을 믿고 약자를 괴롭히고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침략을 확장하면 반드시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는 강철 같은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준다"고 말했습니다. '항미원조는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도왔다'는 의미로 중국이 6.25 전쟁 참전을 정당화하며 쓰는 말입니다.

■ "머리 깨지고 피 흘릴 것"...중국, 유난스레 흥분

일방적 주장이야 할 수 있겠지만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란 극도로 거친 표현을 외교관이 쓰니 중국의 사나운 입이 다시 도마에 올랐습니다. 물론 이 표현이 처음은 아닙니다. 2021년 7월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다름 아닌 시진핑 국가주석이 했던 말입니다. 당시 시 주석은 "누구든 중국을 괴롭히고 압박하거나 노예로 삼겠다는 망상을 품으면 14억 중국인의 피와 살로 쌓아 올린 강철 만리장성에 부딪혀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릴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중국 포털 바이두는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릴 것이다(頭破血流)'란 말의 어원은 <서유기>라고 설명합니다. '손오공이 여의봉으로 도사의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도록 때렸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같은 거친 표현의 주 대상은 미국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중국 고전에 있는 말이고 자국 정상이 썼던 말이라지만 상대국이 있는, 외교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표현이 과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을 겨냥한다해도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공격하니 한국도 압박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래저래 전랑(늑대전사) 외교라는 꼬리표를 떼기 힘들어 보입니다.

사실 2017년 당시 문 대통령은 장진호 전투 기념탑을 직접 찾아가면서까지 의미를 되새겼으니 중국 정부가 문제를 삼으려면 이때 더 심각하게 지적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엔 큰 시비 없이 넘어간 중국이 윤석열 대통령의 한미동맹 70주년 기념연설 가운데 극히 일부를 떼어내 유난스레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한주 가까이 윤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폄훼하고 있습니다. 관영 CCTV가 장진호 전투를 포함해 중국의 6.25 전쟁 참전을 그린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다'를 2년 여만에 긴급 재편성한 것은 결정판입니다.

중국 CCTV가 제작 방송한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다’ 포스터(사진: 바이두)
장진호 전투에 대한 중국 정부의 거친 시비가 충분한 논의나 고민에서 나왔는지도 의문입니다. 마오닝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장진호 전투를 거론하며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도 혼란 중에 차량 전복으로 사망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워커 장군은 장진호가 아닌 한참 이남 서울 북방 전선에서 의정부(현 서울 도봉동)로 가던 중 지프 사고로 숨졌습니다. 적잖은 한국인이 아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름을 딴 '워커힐'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정부의 브리핑은 사실 관계부터 틀린 것입니다. 6.25 전쟁 중 사망한 미군 최고위 인사와 관련한 사실 관계를 틀리니 무언가 다급하게 서둘러 반박에 나선 것 아닌가 하는 인상마저 줍니다.

■ 중국 브리핑, 사실 관계도 틀려...윤 대통령 '장진호' 발언에 흥분하는 이유는?

그렇다면 중국은 윤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언급에 왜 이리 유난스레 항미원조를 강조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요? 물론 단기적으로는 윤 대통령이 방미 전부터 외신 인터뷰를 통해 타이완 해협의 평화와 안정, 일방적 현상 변경 반대 등 중국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만한 발언을 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워싱턴선언을 통해 미국의 전략자산이 한반도 인근에 더 자주 근접 배치되는 상황이 신경에 거슬릴 수도 있습니다. 경제는 물론 안보 분야까지 확대 양상인 한미일 협력 강화를 반중 연합 강화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부부가 현지시각 4월 26일 백악관 발코니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사진: 백악관 홈페이지)
더불어 상대적으로 긴 호흡에서 볼 필요도 있습니다. 한국외대 강준영 교수 등은 논문「시진핑 시대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레토릭에 관한 연구-'항미원조 정신'을 중심으로(중국학논총 76)」에서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던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항미원조'는 '잊혀진 전쟁'이나 다름없었지만, 2020년을 전후로 미중 무역 전쟁, 코로나19 속에 인민의 단결을 끌어내고 공산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항미원조 정신'이라는 정치적 수사(rhetoric)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합니다.

강 교수 등은 이같은 정치적 필요에 의한 수사가 과잉, 공격적인 행동을 야기하는 등 부작용도 우려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2020년 BTS가 밴플리트 상을 받으면서 "(한미) 양국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희생을 기억해야할 것"이라고만 말했는데도, 중국 관영매체가 중국 군인들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습니다. 이같은 행위가 중국에 대한 신뢰는 낮추고 중국이 바라는 국제질서에 대한 거부감은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설명에 따르면 중국에게 장진호 전투를 포함한 6.25 전쟁은 정치적 맥락에서 강조할 수도, 때론 묻어둘 수도 있는 역사의 기억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참전은 한순간 손에 잡힐 듯했던 통일이 무산되고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소중한 생명이 수없이 희생된 아픔의 시작이었습니다. 중국이 아무리 의용군으로 꾸린 지원군이었다고 강변해도 중국의 군사 행동은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창설된 유엔군에 맞선 행위였습니다. 한국인들이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몰라서 잊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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