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빠져드는 호퍼의 그림을 소설로?

입력 2023.05.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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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84×152cm,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미술관〈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84×152cm,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미술관

보슈는 호퍼의 그 그림이 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그림일 거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러 왔고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앞에 서서 시야를 가렸다. 그녀는 그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우려고 헛기침을 하지는 않았다.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림을 가리고 선 사람들을 피해가며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고 그럴 때 보슈는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를 얼핏 본 것도 같았다. 마치 새로운 각도로 보는 느낌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 마이클 코널리 단편 〈밤을 새우는 사람들〉 중에서

초보 사설탐정 보슈는 '그녀'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호퍼의 가장 유명한 '그림' 앞에 앉아 있죠. 당연히 호퍼의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은 저 유명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 이 그림이 걸린 박물관은 시카고 미술관(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그러니 소설의 무대 역시 당연히 시카고입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호퍼의 그림 앞에 몰렸던 인파가 사라지자, 순간 전시장엔 감시하는 보슈와 감시당하는 그녀 둘만 남게 됩니다. 도대체 보슈라는 남자는 왜 박물관까지 따라와 그녀를 감시하는 걸까. 감시당하는 그녀의 사연은 대체 뭘까. 전시장에 둘만 덩그러니 남은 짧은 긴장과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건넨 건 뜻밖에도 '그녀'였죠.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녀가 물었다.
"저 사람들 말입니까? 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시죠?"
"이야기는 항상 있어요. 그림이란 결국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잖아요. 저 그림 제목이 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인지 아세요?"
"아뇨, 잘 모르겠어요."
"왜 밤인지는 아주 분명해요.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의 '매부리코'를 보세요."
(중략)
"그렇군요."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하나 배웠다.
"하지만 빛을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저 그림 속의 모든 빛은 커피숍 안에서 흘러나와요. 그들을 그곳으로 이끈 바로 그 불빛이죠. 빛과 어둠, 음과 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요."

- 마이클 코널리 단편 〈밤을 새우는 사람들〉 중에서

주인공에게 '보슈'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이 단편소설의 작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시리즈의 주인공이 바로 '해리 보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스릴러 작가 마이클 코넬리(Michael Connelly, 1956~)는 가장 유명한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꾸몄습니다. 감시하는 남자, 그리고 감시당하는 여자. 그들을 연결하는 호퍼의 그림. 그렇다면 이 목가적인 대화의 끝에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에드워드 호퍼는 자신이 살아 있었을 때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수많은 예술가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창작의 원천을 제공했습니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고요. 호퍼를 언급한 소설만 모아서 낸 소설집이 있는가 하면, 호퍼에 관한 시를 모아서 소개한 시집도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단편소설 역시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호퍼의 그림 한 점씩을 골라 쓴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In Sunlight or In Shadow)》(문학동네, 2017)에 실렸습니다.

바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세계적인 공포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Stephen King, 1947~)도 호퍼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없는 시간을 쪼개 <음악의 방>이란 단편을 썼습니다. 심지어 언젠가 호퍼의 그림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될 경우, 어떤 그림을 쓸지 미리 골라놓기까지 했다죠. <뉴욕의 방>이란 작품입니다.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 1932,  73.7×91.4cm, 캔버스에 유채, 셸던 미술관〈뉴욕의 방(Room in New York)〉, 1932, 73.7×91.4cm, 캔버스에 유채, 셸던 미술관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 어릿광대가 완벽한 침묵 속에 베란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쨌든 그는 피에로이고, 분장을 하고 있는 한 팬터마임을 할 텐데.

- 로버트 올렌 버틀러 단편 〈푸른 저녁〉 중에서

퓰리처상 수상 작가 로버트 올렌 버틀러의 단편 <푸른 저녁>의 첫 대목입니다. 같은 제목의 호퍼 그림을 소재로 쓴 소설이죠. 그림에는 모두 7명이 등장하지만, 화면 가운데 놓인 핵심 인물은 4명입니다. 관람자 쪽으로 얼굴을 드러낸 피에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두 남자, 그리고 턱을 살짝 치켜든 채로 서서 이들을 바라보는 단발의 여인.

〈푸른 저녁(soir bleu)〉, 1914, 91.8×182.7cm, 캔버스에 유채, 휘트니 미술관〈푸른 저녁(soir bleu)〉, 1914, 91.8×182.7cm, 캔버스에 유채, 휘트니 미술관

작가는 여자의 시선이 모자 쓴 남자 옆에 앉아 있는 제복 입은 군인(소설에서는 '대령'으로 지칭)을 향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아시다시피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관람자에게 끝없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킵니다. 피에로는 어째서 두 남자와 같은 테이블이 앉아 있는 걸까. 모자 쓴 남자와 제복 입은 남자의 관계는? 서 있는 여자는?

그러니 소설의 재료로는 정말 안성맞춤이라고 할 밖에요. 그러니 그림 안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건 순전히 소설가의 몫입니다. 이 그림을 본 관람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인물은 단연코 피에로입니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피에로를 어떻게 묘사했을까.

이제 우리는 서로를 쳐다본다. 피에로와 나.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들라크루아의 팔레트를 사용한 것처럼 얼굴을 칠했다. 대머리에 아연백색으로 칠한 얼굴, 지나치게 큰 입술과 아치 모양의 눈썹, 눈에서 흘러내리는, 바람난 아내를 둔 남자의 주홍색 눈물. 배우의 얼굴을 캔버스 삼아 그린, 괴로운 광대의 살아 있는 초상이다.

- 로버트 올렌 버틀러 단편 〈푸른 저녁〉 중에서

2017년에 국내에 번역 출간되자마자 호기심에 얼른 사버린 이 소설집을 6년이 지난 지금 다시 펼쳐든 까닭은 호퍼의 전시회 때문이었습니다. 호퍼의 그림을 서울에서 볼 수 있다! 어느 유통기업의 TV 광고에서까지 오마쥬(hommage) 할 정도로 이미 너무나도 유명하고 익숙해져 버린 에드워드 호퍼의 첫 대규모 개인전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호퍼의 그림에 열광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철저하게 계산해서 꾸민 연극 무대 같은 공간,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정지시킨 것 같은 화면, 그리고 무슨 사연을 품었을 모를 호퍼의 주인공들. 그 강렬한 고독. 쓸쓸함. 그 앞에서 오래 머물게 하는 그림이야말로 좋은 그림이라 한다면, 호퍼의 그림이 관람자를 오래도록 붙들어둔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17편을 수록한 이 소설집에는 실로 쟁쟁한 작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스티븐 킹을 비롯해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Joyce Carol Oates, 1938~), 세계적인 배우 톰 크루즈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인 잭 리처를 유명하게 만든 작가 리 차일드(Lee Child, 1954~), 덴절 워싱턴과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한 영화 <본 콜렉터(The Bone Collector)>로 유명한 범죄 소설의 대가 제프리 디버(Jeffery Deaver, 1950~) 등등.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 1941 또는 1942, 28.3×38.1cm, 종이에 콩테와 목탄, 휘트니 미술관〈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 1941 또는 1942, 28.3×38.1cm, 종이에 콩테와 목탄, 휘트니 미술관

작가들이 선택한 호퍼의 그림 가운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전시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를 통해 원화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넉 점입니다. 가장 유명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원화 대신 콩테와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으로 선보입니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밑그림 격인 여러 드로잉 가운데 원화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라고 합니다.

보통 그림을 '보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행위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책을 '본다'와 '읽는다' 사이에 작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 하나는, 호퍼의 그림에는 '본다'보다는 '읽는다'는 표현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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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수록 빠져드는 호퍼의 그림을 소설로?
    • 입력 2023-05-03 07:00:17
    취재K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 84×152cm,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 미술관
보슈는 호퍼의 그 그림이 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그림일 거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보러 왔고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앞에 서서 시야를 가렸다. 그녀는 그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우려고 헛기침을 하지는 않았다.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림을 가리고 선 사람들을 피해가며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였고 그럴 때 보슈는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를 얼핏 본 것도 같았다. 마치 새로운 각도로 보는 느낌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 마이클 코널리 단편 〈밤을 새우는 사람들〉 중에서

초보 사설탐정 보슈는 '그녀'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호퍼의 가장 유명한 '그림' 앞에 앉아 있죠. 당연히 호퍼의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은 저 유명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 이 그림이 걸린 박물관은 시카고 미술관(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그러니 소설의 무대 역시 당연히 시카고입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호퍼의 그림 앞에 몰렸던 인파가 사라지자, 순간 전시장엔 감시하는 보슈와 감시당하는 그녀 둘만 남게 됩니다. 도대체 보슈라는 남자는 왜 박물관까지 따라와 그녀를 감시하는 걸까. 감시당하는 그녀의 사연은 대체 뭘까. 전시장에 둘만 덩그러니 남은 짧은 긴장과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건넨 건 뜻밖에도 '그녀'였죠.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녀가 물었다.
"저 사람들 말입니까? 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시죠?"
"이야기는 항상 있어요. 그림이란 결국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잖아요. 저 그림 제목이 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인지 아세요?"
"아뇨, 잘 모르겠어요."
"왜 밤인지는 아주 분명해요. 여자와 함께 있는 남자의 '매부리코'를 보세요."
(중략)
"그렇군요."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하나 배웠다.
"하지만 빛을 보세요." 그녀가 말했다. "저 그림 속의 모든 빛은 커피숍 안에서 흘러나와요. 그들을 그곳으로 이끈 바로 그 불빛이죠. 빛과 어둠, 음과 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요."

- 마이클 코널리 단편 〈밤을 새우는 사람들〉 중에서

주인공에게 '보슈'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이 단편소설의 작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시리즈의 주인공이 바로 '해리 보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스릴러 작가 마이클 코넬리(Michael Connelly, 1956~)는 가장 유명한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꾸몄습니다. 감시하는 남자, 그리고 감시당하는 여자. 그들을 연결하는 호퍼의 그림. 그렇다면 이 목가적인 대화의 끝에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에드워드 호퍼는 자신이 살아 있었을 때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수많은 예술가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창작의 원천을 제공했습니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고요. 호퍼를 언급한 소설만 모아서 낸 소설집이 있는가 하면, 호퍼에 관한 시를 모아서 소개한 시집도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단편소설 역시 현재 영미권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호퍼의 그림 한 점씩을 골라 쓴 단편소설을 묶은 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In Sunlight or In Shadow)》(문학동네, 2017)에 실렸습니다.

바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세계적인 공포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Stephen King, 1947~)도 호퍼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없는 시간을 쪼개 <음악의 방>이란 단편을 썼습니다. 심지어 언젠가 호퍼의 그림에 관한 소설을 쓰게 될 경우, 어떤 그림을 쓸지 미리 골라놓기까지 했다죠. <뉴욕의 방>이란 작품입니다.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 1932,  73.7×91.4cm, 캔버스에 유채, 셸던 미술관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 어릿광대가 완벽한 침묵 속에 베란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쨌든 그는 피에로이고, 분장을 하고 있는 한 팬터마임을 할 텐데.

- 로버트 올렌 버틀러 단편 〈푸른 저녁〉 중에서

퓰리처상 수상 작가 로버트 올렌 버틀러의 단편 <푸른 저녁>의 첫 대목입니다. 같은 제목의 호퍼 그림을 소재로 쓴 소설이죠. 그림에는 모두 7명이 등장하지만, 화면 가운데 놓인 핵심 인물은 4명입니다. 관람자 쪽으로 얼굴을 드러낸 피에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두 남자, 그리고 턱을 살짝 치켜든 채로 서서 이들을 바라보는 단발의 여인.

〈푸른 저녁(soir bleu)〉, 1914, 91.8×182.7cm, 캔버스에 유채, 휘트니 미술관
작가는 여자의 시선이 모자 쓴 남자 옆에 앉아 있는 제복 입은 군인(소설에서는 '대령'으로 지칭)을 향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아시다시피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관람자에게 끝없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킵니다. 피에로는 어째서 두 남자와 같은 테이블이 앉아 있는 걸까. 모자 쓴 남자와 제복 입은 남자의 관계는? 서 있는 여자는?

그러니 소설의 재료로는 정말 안성맞춤이라고 할 밖에요. 그러니 그림 안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건 순전히 소설가의 몫입니다. 이 그림을 본 관람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인물은 단연코 피에로입니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피에로를 어떻게 묘사했을까.

이제 우리는 서로를 쳐다본다. 피에로와 나.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들라크루아의 팔레트를 사용한 것처럼 얼굴을 칠했다. 대머리에 아연백색으로 칠한 얼굴, 지나치게 큰 입술과 아치 모양의 눈썹, 눈에서 흘러내리는, 바람난 아내를 둔 남자의 주홍색 눈물. 배우의 얼굴을 캔버스 삼아 그린, 괴로운 광대의 살아 있는 초상이다.

- 로버트 올렌 버틀러 단편 〈푸른 저녁〉 중에서

2017년에 국내에 번역 출간되자마자 호기심에 얼른 사버린 이 소설집을 6년이 지난 지금 다시 펼쳐든 까닭은 호퍼의 전시회 때문이었습니다. 호퍼의 그림을 서울에서 볼 수 있다! 어느 유통기업의 TV 광고에서까지 오마쥬(hommage) 할 정도로 이미 너무나도 유명하고 익숙해져 버린 에드워드 호퍼의 첫 대규모 개인전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호퍼의 그림에 열광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철저하게 계산해서 꾸민 연극 무대 같은 공간,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정지시킨 것 같은 화면, 그리고 무슨 사연을 품었을 모를 호퍼의 주인공들. 그 강렬한 고독. 쓸쓸함. 그 앞에서 오래 머물게 하는 그림이야말로 좋은 그림이라 한다면, 호퍼의 그림이 관람자를 오래도록 붙들어둔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17편을 수록한 이 소설집에는 실로 쟁쟁한 작가들이 참여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스티븐 킹을 비롯해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Joyce Carol Oates, 1938~), 세계적인 배우 톰 크루즈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인 잭 리처를 유명하게 만든 작가 리 차일드(Lee Child, 1954~), 덴절 워싱턴과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한 영화 <본 콜렉터(The Bone Collector)>로 유명한 범죄 소설의 대가 제프리 디버(Jeffery Deaver, 1950~) 등등.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위한 습작, 1941 또는 1942, 28.3×38.1cm, 종이에 콩테와 목탄, 휘트니 미술관
작가들이 선택한 호퍼의 그림 가운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전시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를 통해 원화를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넉 점입니다. 가장 유명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원화 대신 콩테와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으로 선보입니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밑그림 격인 여러 드로잉 가운데 원화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라고 합니다.

보통 그림을 '보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행위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책을 '본다'와 '읽는다' 사이에 작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 하나는, 호퍼의 그림에는 '본다'보다는 '읽는다'는 표현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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