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광주의 첫 국회의원 정광호 선생…납북돼 가려진 애국지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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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첫 국회의원 선거...광주서는 3.1 운동 주역 정광호 선생 당선"
"정광호 등, 1919년 2월 8일 도쿄 2.8 독립선언서 인쇄...화순 출신으로 현 서석초등학교 졸업"
"광주 3.1 운동 주도 뒤 중국서 임시정부 활동...1947년 현재 시장 격인 제3대 광주 부윤 부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뒤 한국전쟁 발발...북으로 끌려가 1955년 사망"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MUAgMTci9Ls
◇ 윤주성 (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벌써 5월이 됐는데요. 1948년 5월 10일은 최초로 국회의원을 뽑았던 날입니다.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제헌 국회라고 부르고 그때 국회의원을 제헌 의원이라고 부르는데요. 우리 지역 광주의 제헌 의원이 누구인지 잘 모르시지요?
◇ 윤주성: 전혀 모르겠는데요.
◆ 노성태: 광주 3.1운동의 주역이었고 광주의 3대 시장을 지냈던 정광호라고 하는 분이신데요. 오늘 정광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윤주성: 광주 지역 최초의 정광호 국회의원에 대한 이야기네요.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인데 어떤 분이신가요?
◆ 노성태: 3.1운동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처음 알려졌던 분이시거든요. 3.1운동이 일어났던 때가 1919년이고요. 이때 정광호는 일본 도쿄에 있었던 메이지대학교 유학생이었습니다. 애청자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잖아요. 그런데 이때 2.8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분들이 최원순, 정광호 등 정부 광주 보통학교, 지금 서석초등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 1월 말에 2.8 독립선언서가 완성되니까 이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국해서 장성에서 우리 지역 유학생이던 김범수 등과 함께 인쇄한 후 광주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던 분이 화순 출신 오늘 말씀드리는 정광호였던 것입니다.
◇ 윤주성: 광주의 제헌 의원인 정광호 선생, 광주 3.1운동에 참여했었군요. 화순 출신이라고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정광호 선생은 화순군 능주면 지금 능주고요. 내리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됐던 해 그러니까 1895년에 이렇게 태어나십니다. 광주로 이사하신 후에 광주 공립보통학교 지금 서석초등학교의 옛 이름인데요.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보에 부설되었던 임시 교원 양성소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원 양성소를 졸업했으니까 교사가 됐겠지요. 고향에 설립된 능주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는데 '독립 찬가'를 가르치는 등 학생들의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1916년 교직에서 해임되고 맙니다.
◇ 윤주성: 능주 보통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교사였군요. 1916년이면 3.1운동 발발 3년 전인데 해임된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것인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정광호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말씀드렸던 도쿄에 있는 메이지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입니다. 1919년 백관수, 김도연 등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선언을 준비할 때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광주 공립보통학교 동기였던 최원순 등과 함께 선언문을 등사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장소를 물색하고 또 국내와의 연락 등의 임무를 맡아서 헌신하셨던 분이시고요.
2.8 독립선언서를 1월 말쯤 지참하고 고국에 귀국해서 서울에 유학하고 있었던 아까 말씀을 드린 김범수라든가 박일구 등과 함께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한글판 600장 또 일본어로 쓰여진 독립선언서 50장을 인쇄를 하게 됩니다.
◇ 윤주성: 광주 3.1운동 당시 많은 분들이 체포됐는데 정광호 선생도 체포됐나요?
◆ 노성태: 네. 그때 광주 인구가 1만 명 정도였고요. 참여 인원수가 1,000명이었는데 104명이 3.1운동 관련해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광주 3.1운동 주모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자 정광호 선생은 인천에서 밀항선을 타고 상하이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피고가 없잖아요. 그래서 궐석재판이 열렸고 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광주 3.1운동으로 지판을 받은 10명 중에 3년형이 최고였으니까 3년형을 선고받은 정광호 선생이 광주 3.1운동의 주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 윤주성: 정광호 선생 광주 3.1운동 직후에 상하이로 망명을 했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인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했던 정광호 선생이 찾아갔던 곳은 말씀하신 것처럼 임시 정부였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국내 비밀결사 조직들과 연락을 담당했던 부서가 교통부였는데 그 교통부 참사로 근무를 했고 그리고 1923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결정을 회의가 국민대표회의인데 이때 회의가 개최됐을 때 함평 출신이던 김철 등과 함께 전라도를 대표했던 대의원으로 이렇게 참석을 했고요.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대표 자격 심사위원으로 활동도 했고 그리고 과거문제조사위원회와 국민대표자회의 선서 선언문을 기초했던 위원으로 활약을 하게 됩니다.
◇ 윤주성: 3.1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했는데 해방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 노성태: 해방 이후에 정치 활동을 하게 되시지요. 정광호 선생은 김성수, 송진우 등이 만든 정당이 한국민주당, 한민당인데요. 여기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 부장으로 활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1947년 6월 27일 당시 미 군정이었잖아요. 미 군정 당국의 발령을 받고 제3대 부윤, 부윤은 광주시장입니다. 광주시장에 부임을 하게 됩니다. 부윤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은 1935년 광주가 광주읍에서 광주부가 됐고요. 49년에 광주시가 되니까 35년과 49년 사이의 시장은 부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 말씀을 드리면 3대 광주시장이 되신 분이 정광호 선생이지요.
◇ 윤주성: 해방 뒤 시장 격인 광주 부윤을 지내셨는데 이어서 광주의 초대 국회의원
◆ 노성태: 네. 제헌 의원 그렇습니다. 정광호 선생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서 총선거가 실시됐을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서 광주 부윤직을 사임하고 제헌 의원에 출마하게 되는데요. 그는 아까 말씀드렸던 김성수 등이 중심된 한민당의 공천을 받아서 출마했는데 5.10 선거 당시에 통일 정부를 주장했던 좌익이라든가 남북 협상파들이 대거 불참했잖아요. 그래서 광주에서 1명 뽑는 선거에 정광호 선생이 단독으로 입후보했고 그래서 무투표로 당선이 됩니다.
◇ 윤주성: 제헌국회에서의 활동은 어땠습니까?
◆ 노성태: 1948년 5월 31일 개원 국회에서 그는 15명의 국회법 기초위원으로 선정됩니다. 그리고 국회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친일파 숙청에 관한 특별위원회 및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된 활동입니다. 정광호는 48년 8월 19일 제44차 제헌의회 본회의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 구체적인 사실을 조사하고 확실한 근거를 수집해서 개별적인 특정인을 친일파로 지정해서 숙청해야 된다 이런 긴급동의를 하셨고. 그래서 친일파 청산에 독립운동가답게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분입니다. 정광호 등의 주장에 의해서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또 이 법에 의거해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보통 반민특위라고 불리는 것이 구성되지요.
◇ 윤주성: 광주 출신의 제헌 의원이 된 정광호 선생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됐다고 하던데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 노성태: 제헌 국회의원의 임기가 2년이었습니다. 2년 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광주가 아닌 경기도 양주에 출마하게 되는데 낙선하게 됩니다. 2대 국회의원이 끝난 뒤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 있던 그는 인민군에게 체포가 됐고요. 그래서 김규식, 정인보 등 주요 인사들과 함께 북한 당국 일명 모시기 공작에 따라서 납북됩니다. 북한에 납북되었던 인사는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해요. 서울로 돌려달라 이것이 환향론자고요. 이승만 정권의 신변 불보장으로 인해서 서울에 갈 수 없다고 비환향론자로 나뉘게 되는데 정광호 선생은 환향론자, 서울에 보내달라고 주장했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 윤주성: 정광호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납북이었네요. 어디로 가야 광주 제3대 시장이면서 광주의 제헌 의원인 정광호 선생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 노성태: 정광호를 만날 수 있는 현장이 많지 않습니다. 계속 나왔지만 납북되었기 때문인데요.
고향인 화순군 능주면 내리에 가면 탄생지였음을 알려주는 표석이 작게 서 있고요. 서울 현충원 묘역에 가면 김규식, 조소앙, 박열, 정인보 등 납북됐던 인사들을 모신 16명의 위패가 있는데 여기에 정광호 선생 위패도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광주시장 회의실에는 역대 시장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납북됐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걸리지 않다가 3.1운동 100주년 직후인 2020년에 걸려 있습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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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의 아침] “광주의 첫 국회의원 정광호 선생…납북돼 가려진 애국지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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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3-05-03 14:53:12
- 수정2023-05-03 14:57:28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MUAgMTci9Ls
◇ 윤주성 (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벌써 5월이 됐는데요. 1948년 5월 10일은 최초로 국회의원을 뽑았던 날입니다.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제헌 국회라고 부르고 그때 국회의원을 제헌 의원이라고 부르는데요. 우리 지역 광주의 제헌 의원이 누구인지 잘 모르시지요?
◇ 윤주성: 전혀 모르겠는데요.
◆ 노성태: 광주 3.1운동의 주역이었고 광주의 3대 시장을 지냈던 정광호라고 하는 분이신데요. 오늘 정광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윤주성: 광주 지역 최초의 정광호 국회의원에 대한 이야기네요.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이름인데 어떤 분이신가요?
◆ 노성태: 3.1운동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처음 알려졌던 분이시거든요. 3.1운동이 일어났던 때가 1919년이고요. 이때 정광호는 일본 도쿄에 있었던 메이지대학교 유학생이었습니다. 애청자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잖아요. 그런데 이때 2.8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분들이 최원순, 정광호 등 정부 광주 보통학교, 지금 서석초등학교 출신들이었습니다. 1월 말에 2.8 독립선언서가 완성되니까 이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귀국해서 장성에서 우리 지역 유학생이던 김범수 등과 함께 인쇄한 후 광주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던 분이 화순 출신 오늘 말씀드리는 정광호였던 것입니다.
◇ 윤주성: 광주의 제헌 의원인 정광호 선생, 광주 3.1운동에 참여했었군요. 화순 출신이라고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정광호 선생은 화순군 능주면 지금 능주고요. 내리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됐던 해 그러니까 1895년에 이렇게 태어나십니다. 광주로 이사하신 후에 광주 공립보통학교 지금 서석초등학교의 옛 이름인데요.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보에 부설되었던 임시 교원 양성소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원 양성소를 졸업했으니까 교사가 됐겠지요. 고향에 설립된 능주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는데 '독립 찬가'를 가르치는 등 학생들의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1916년 교직에서 해임되고 맙니다.
◇ 윤주성: 능주 보통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교사였군요. 1916년이면 3.1운동 발발 3년 전인데 해임된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것인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정광호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말씀드렸던 도쿄에 있는 메이지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입니다. 1919년 백관수, 김도연 등이 중심이 되어 2.8 독립선언을 준비할 때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광주 공립보통학교 동기였던 최원순 등과 함께 선언문을 등사하고 동지를 규합하고 장소를 물색하고 또 국내와의 연락 등의 임무를 맡아서 헌신하셨던 분이시고요.
2.8 독립선언서를 1월 말쯤 지참하고 고국에 귀국해서 서울에 유학하고 있었던 아까 말씀을 드린 김범수라든가 박일구 등과 함께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한글판 600장 또 일본어로 쓰여진 독립선언서 50장을 인쇄를 하게 됩니다.
◇ 윤주성: 광주 3.1운동 당시 많은 분들이 체포됐는데 정광호 선생도 체포됐나요?
◆ 노성태: 네. 그때 광주 인구가 1만 명 정도였고요. 참여 인원수가 1,000명이었는데 104명이 3.1운동 관련해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광주 3.1운동 주모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자 정광호 선생은 인천에서 밀항선을 타고 상하이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피고가 없잖아요. 그래서 궐석재판이 열렸고 3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광주 3.1운동으로 지판을 받은 10명 중에 3년형이 최고였으니까 3년형을 선고받은 정광호 선생이 광주 3.1운동의 주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요.
◇ 윤주성: 정광호 선생 광주 3.1운동 직후에 상하이로 망명을 했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인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상하이에 도착했던 정광호 선생이 찾아갔던 곳은 말씀하신 것처럼 임시 정부였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국내 비밀결사 조직들과 연락을 담당했던 부서가 교통부였는데 그 교통부 참사로 근무를 했고 그리고 1923년 임시정부의 진로를 결정을 회의가 국민대표회의인데 이때 회의가 개최됐을 때 함평 출신이던 김철 등과 함께 전라도를 대표했던 대의원으로 이렇게 참석을 했고요.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대표 자격 심사위원으로 활동도 했고 그리고 과거문제조사위원회와 국민대표자회의 선서 선언문을 기초했던 위원으로 활약을 하게 됩니다.
◇ 윤주성: 3.1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했는데 해방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 노성태: 해방 이후에 정치 활동을 하게 되시지요. 정광호 선생은 김성수, 송진우 등이 만든 정당이 한국민주당, 한민당인데요. 여기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 부장으로 활동을 하십니다. 그리고 1947년 6월 27일 당시 미 군정이었잖아요. 미 군정 당국의 발령을 받고 제3대 부윤, 부윤은 광주시장입니다. 광주시장에 부임을 하게 됩니다. 부윤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은 1935년 광주가 광주읍에서 광주부가 됐고요. 49년에 광주시가 되니까 35년과 49년 사이의 시장은 부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 말씀을 드리면 3대 광주시장이 되신 분이 정광호 선생이지요.
◇ 윤주성: 해방 뒤 시장 격인 광주 부윤을 지내셨는데 이어서 광주의 초대 국회의원
◆ 노성태: 네. 제헌 의원 그렇습니다. 정광호 선생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서 총선거가 실시됐을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서 광주 부윤직을 사임하고 제헌 의원에 출마하게 되는데요. 그는 아까 말씀드렸던 김성수 등이 중심된 한민당의 공천을 받아서 출마했는데 5.10 선거 당시에 통일 정부를 주장했던 좌익이라든가 남북 협상파들이 대거 불참했잖아요. 그래서 광주에서 1명 뽑는 선거에 정광호 선생이 단독으로 입후보했고 그래서 무투표로 당선이 됩니다.
◇ 윤주성: 제헌국회에서의 활동은 어땠습니까?
◆ 노성태: 1948년 5월 31일 개원 국회에서 그는 15명의 국회법 기초위원으로 선정됩니다. 그리고 국회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친일파 숙청에 관한 특별위원회 및 반민특위 활동과 관련된 활동입니다. 정광호는 48년 8월 19일 제44차 제헌의회 본회의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 구체적인 사실을 조사하고 확실한 근거를 수집해서 개별적인 특정인을 친일파로 지정해서 숙청해야 된다 이런 긴급동의를 하셨고. 그래서 친일파 청산에 독립운동가답게 강경한 입장을 보였던 분입니다. 정광호 등의 주장에 의해서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또 이 법에 의거해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보통 반민특위라고 불리는 것이 구성되지요.
◇ 윤주성: 광주 출신의 제헌 의원이 된 정광호 선생 한국 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됐다고 하던데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 노성태: 제헌 국회의원의 임기가 2년이었습니다. 2년 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광주가 아닌 경기도 양주에 출마하게 되는데 낙선하게 됩니다. 2대 국회의원이 끝난 뒤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에 있던 그는 인민군에게 체포가 됐고요. 그래서 김규식, 정인보 등 주요 인사들과 함께 북한 당국 일명 모시기 공작에 따라서 납북됩니다. 북한에 납북되었던 인사는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해요. 서울로 돌려달라 이것이 환향론자고요. 이승만 정권의 신변 불보장으로 인해서 서울에 갈 수 없다고 비환향론자로 나뉘게 되는데 정광호 선생은 환향론자, 서울에 보내달라고 주장했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 윤주성: 정광호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납북이었네요. 어디로 가야 광주 제3대 시장이면서 광주의 제헌 의원인 정광호 선생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 노성태: 정광호를 만날 수 있는 현장이 많지 않습니다. 계속 나왔지만 납북되었기 때문인데요.
고향인 화순군 능주면 내리에 가면 탄생지였음을 알려주는 표석이 작게 서 있고요. 서울 현충원 묘역에 가면 김규식, 조소앙, 박열, 정인보 등 납북됐던 인사들을 모신 16명의 위패가 있는데 여기에 정광호 선생 위패도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광주시장 회의실에는 역대 시장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납북됐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걸리지 않다가 3.1운동 100주년 직후인 2020년에 걸려 있습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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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성 기자 y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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