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먹으면 반하나?”…40대 여 중사의 ‘리스펙’

입력 2023.05.1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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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매달 '리;스펙 제대군인'이란 웹 잡지를 발간합니다. '리;스펙' 이란 존경을 뜻하는 영어 'respect'와 사회 복귀를 위한 준비를 뜻하는 '스펙 재설계'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이 잡지는 전역 후 재취업을 준비하는 군인들에게 관련 제도나 취·창업 정보를 알려주는 건 물론, 사회에 성공적으로 복귀한 예비역을 선정해 인터뷰를 하기도 합니다. 잡지의 표지 모델 역시 인터뷰의 주인공인 예비역들입니다.

그런데 보훈처에 '최근 발간된 표지 모델을 교체해달라'는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근무 당시 '지속적 괴롭힘' 인정…재판부 "면담 구실로 원치 않는 접근 지속"

표지 모델 교체를 요청한 건 예비역 공군 중위 A 씨. A 씨는 최근호 표지 모델인 박 모 예비역 공군 중사를 '나를 괴롭혔던 가해자'로 지목했습니다.

‘리;스펙 제대군인’ 2023년 5월호 표지. 위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리;스펙 제대군인’ 2023년 5월호 표지. 위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2020년, 당시 박 씨는 자녀까지 있었던 기혼 여성이었고 A 씨는 20살 어린 미혼 남성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박 씨는 옆자리에서 근무하던 A 씨에게 지속적으로 호감을 드러냈습니다. 박 씨는 A 씨의 책상 위에 바나나와 함께 '바나나 먹으면 나한테 바나나?'라는 쪽지를 올려두기도 하고 "A 중위가 곁을 안 내줘서 기다리고 있다", "A 중위는 나의 수호천사다"라고 하는 등 계속 접근해 왔습니다. A 씨가 거부 의사를 표현했지만 박 씨의 행동은 이어졌습니다.

참다못해 A 씨는 박 씨를 고소했고 박 씨는 별도의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와 함께 경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로 법원에서 벌금 1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반발해 박 씨는 정식 재판을 청구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경범죄처벌법 제3조 제1항 제41호의 '지속적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확인했음에도 면담을 구실로 원치 않는 접근을 지속하였고, 이로 인해 피해자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피해자는 여전히 힘들지만…보훈처 "지나간 잡지라 교체 불가능"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A 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호소합니다.

그러던 중 박씨가 표지에 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난달 국가보훈처에 표지 교체를 공식 요청했습니다.

국가보훈처의 비전은 국가를 위한 헌신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나라입니다.
여전히 고통받는 피해자를 외면한 채, 가해자를 홍보모델로 세우는 것이 그 비전에 부합한 일인지 궁금합니다.
-A 씨 민원 내용 中-

하지만 보훈처는 오히려 A 씨에게 양해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교체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보훈처가 A 씨에게 보낸 민원 답변 내용 캡처.보훈처가 A 씨에게 보낸 민원 답변 내용 캡처.

A 씨는 "당시 사건을 벗어나 이제 내 삶을 살아가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며
"피해자가 명확히 존재하는 사건의 가해자를 모델로 선정하는 것은 명백한 2차 가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보훈처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도 호소합니다. A 씨는 "피해 당사자가 보훈처에 직접 연락했음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이미 나온 잡지니까 후속 조치하는 것에 대해 귀찮게 생각한다고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또 "보훈처 같은 국가기관에서 이런 걸 방관하고 묵인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습니다.

KBS는 보훈처에 다시 한번 공식 답변을 요구했지만 그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훈처는 "매월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표지를 제작하여 잡지를 발간하는 상황에서 지나간 잡지의 표지를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향후 대상자 선정 시 좀 더 신중을 기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리;스펙 제대군인 2023년 5월호가 실린 홈페이지. 위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리;스펙 제대군인 2023년 5월호가 실린 홈페이지. 위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보훈처는 이미 지나간 잡지라고 했지만 '리;스펙 제대군인' 홈페이지에서는 여전히 해당 잡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표지 사진은 물론 인터뷰 전문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교체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에 피해자가 분노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국가보훈부 '승격'을 앞두고 있는 국가보훈처는 '제복의 영웅이 존중받는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제대군인 한 명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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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나나 먹으면 반하나?”…40대 여 중사의 ‘리스펙’
    • 입력 2023-05-11 10: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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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매달 '리;스펙 제대군인'이란 웹 잡지를 발간합니다. '리;스펙' 이란 존경을 뜻하는 영어 'respect'와 사회 복귀를 위한 준비를 뜻하는 '스펙 재설계'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이 잡지는 전역 후 재취업을 준비하는 군인들에게 관련 제도나 취·창업 정보를 알려주는 건 물론, 사회에 성공적으로 복귀한 예비역을 선정해 인터뷰를 하기도 합니다. 잡지의 표지 모델 역시 인터뷰의 주인공인 예비역들입니다.

그런데 보훈처에 '최근 발간된 표지 모델을 교체해달라'는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근무 당시 '지속적 괴롭힘' 인정…재판부 "면담 구실로 원치 않는 접근 지속"

표지 모델 교체를 요청한 건 예비역 공군 중위 A 씨. A 씨는 최근호 표지 모델인 박 모 예비역 공군 중사를 '나를 괴롭혔던 가해자'로 지목했습니다.

‘리;스펙 제대군인’ 2023년 5월호 표지. 위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2020년, 당시 박 씨는 자녀까지 있었던 기혼 여성이었고 A 씨는 20살 어린 미혼 남성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박 씨는 옆자리에서 근무하던 A 씨에게 지속적으로 호감을 드러냈습니다. 박 씨는 A 씨의 책상 위에 바나나와 함께 '바나나 먹으면 나한테 바나나?'라는 쪽지를 올려두기도 하고 "A 중위가 곁을 안 내줘서 기다리고 있다", "A 중위는 나의 수호천사다"라고 하는 등 계속 접근해 왔습니다. A 씨가 거부 의사를 표현했지만 박 씨의 행동은 이어졌습니다.

참다못해 A 씨는 박 씨를 고소했고 박 씨는 별도의 허위공문서 작성 혐의와 함께 경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로 법원에서 벌금 1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반발해 박 씨는 정식 재판을 청구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경범죄처벌법 제3조 제1항 제41호의 '지속적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확인했음에도 면담을 구실로 원치 않는 접근을 지속하였고, 이로 인해 피해자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피해자는 여전히 힘들지만…보훈처 "지나간 잡지라 교체 불가능"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A 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호소합니다.

그러던 중 박씨가 표지에 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난달 국가보훈처에 표지 교체를 공식 요청했습니다.

국가보훈처의 비전은 국가를 위한 헌신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나라입니다.
여전히 고통받는 피해자를 외면한 채, 가해자를 홍보모델로 세우는 것이 그 비전에 부합한 일인지 궁금합니다.
-A 씨 민원 내용 中-

하지만 보훈처는 오히려 A 씨에게 양해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교체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보훈처가 A 씨에게 보낸 민원 답변 내용 캡처.
A 씨는 "당시 사건을 벗어나 이제 내 삶을 살아가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며
"피해자가 명확히 존재하는 사건의 가해자를 모델로 선정하는 것은 명백한 2차 가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보훈처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도 호소합니다. A 씨는 "피해 당사자가 보훈처에 직접 연락했음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이미 나온 잡지니까 후속 조치하는 것에 대해 귀찮게 생각한다고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또 "보훈처 같은 국가기관에서 이런 걸 방관하고 묵인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습니다.

KBS는 보훈처에 다시 한번 공식 답변을 요구했지만 그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훈처는 "매월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표지를 제작하여 잡지를 발간하는 상황에서 지나간 잡지의 표지를 교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향후 대상자 선정 시 좀 더 신중을 기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리;스펙 제대군인 2023년 5월호가 실린 홈페이지. 위 사진에 나오는 인물들은 본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보훈처는 이미 지나간 잡지라고 했지만 '리;스펙 제대군인' 홈페이지에서는 여전히 해당 잡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표지 사진은 물론 인터뷰 전문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교체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에 피해자가 분노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국가보훈부 '승격'을 앞두고 있는 국가보훈처는 '제복의 영웅이 존중받는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제대군인 한 명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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