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감독의 ‘뼈있는 농담’…“‘말이야 바른 말이지’ 하려다 움찔하길”

입력 2023.05.17 (16:19) 수정 2023.05.2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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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이 남미 가는 건 좋아하면서 남미 되는 건 싫어하거든.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줘야 사람들이 싸울 생각을 안 먹어요." 신나게 직원 탄압 비법을 주고받는 대기업 '과장 권한대행'과 '벤처 비슷한 회사' 대표. 화기애애한 분위기지만,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2. 손자가 '광주 출신'이 되는 게 싫은 아빠를 임산부 딸이 타이른다. "아빠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진지한 딸의 훈계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아빠. 그런데 갑자기 딸의 입에서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온다. 뭐? 엘...사?

#3. 직원이 광고에 쓴 단어 때문에 '남성 혐오 논란'이 불거진 강아지 식품회사. 문제의 단어가 '허버버법'인지 '허버허버'인지, 이게 왜 '남혐'인지는 몰라도 일단 사과문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그때 들려오는 직원의 순진한 질문. "근데 팀장님,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일들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지 않았어요?"

6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독립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이하 '말바말')는 우습되 웃지 못할 장면들로 우리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노동 기본권 탄압과 '남성혐오' 논란, 호남 차별과 동물권 등 202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이슈를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날렵하고 가볍"다. '가시를 품고 꿀을 발랐다'(평론가 박평식)거나, '현실을 겨냥한 날카로운 입담들'(평론가 조현나)이란 평가처럼 뼈있는 농담으로 '을과 을'이 '병'을 억압하는 부조리를 압축적으로 비튼다.

"우리는 윤리 선생님이 아니니까, '내가 이렇게 쉽게 말하고 판단하는 게 맞나, 그러면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데'. 이 감각만 일깨워줘도 충분한 것 같거든요. 조금 웃겨주고 나서 집에 갈 때 '아이러니하네', 이런 생각이 든다면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15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윤성호 감독은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설명했다. 2021년 가을,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서울독립영화 측 연락을 받고 고심하던 중 뜻 맞는 감독 5명을 추가로 섭외하며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시작됐다. '한 신(scene), 한 장소, 2명의 대화를 6시간 안에 찍을 것'. 까다로운 요구 조건에도 감독들은 기꺼이 동참해 창의력과 문제 의식을 불태웠다. 박동훈, 최하나 감독 등 '말바말'을 만든 3명과의 대화를 정리해 옮긴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 ‘프롤로그’를 연출한 윤성호 감독.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 ‘프롤로그’를 연출한 윤성호 감독.

―'말이야 바른 말이지'란 제목이 독특하다. 어떻게 짓게 됐나.
= (윤성호 감독) 제안을 받고 고민하며 집에 가던 중 옆에서 지나가는 분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에 되게 선하신 분들이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전라도 사람들이 조금 사람 힘들게 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시는 게 묘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로 말을 시작했을 때 진짜 옳고 세심한 말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평소보다 더 거칠고 못난 말을 하고 싶을 때 우리가 슬쩍 앞에 붙이는 말이니까. 이 영화가 누군가를 업신여기거나 끌어내리려는 말을 하려다가도 움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작품 속에 호남 차별과 성차별, 주거지에 따른 차별 등 다양한 차별에 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다. 호남 차별을 중심 소재로 택한 이유는?
=(박동훈 감독) 약간의 긍정적인 긴장을 하지 않고 살아가면 자기도 모르게 영화에서 표현된 차별에 쉽게 동참할 수가 있다는 걸 전달하고 싶었다. 윤 감독에게 독립영화계 안에, 특히 단편 영화 중에 호남 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본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더라.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미국 유학 중이었는데, 당선되어 다행이라고 했더니 '전라도세요?'라는 반응을 최소한 다섯 번을 들었다. 처음으로 동년배 사람들에게서 호남 차별 발언을 들었을 때 '이게 뭔가' 하는 고민이 생겼고, '아닌데요'라고 답했던 비겁한 내 반응에 굉장히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언젠가는 꼭 이 얘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마침 제안이 왔을 때 이제 이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풀어도 되겠다 싶었다. 마지막에 임대주택을 연결지은 건 과거에 만들어진 차별과 지금 현재 우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혐오를 접목시켜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에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를 연출한 박동훈 감독.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에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를 연출한 박동훈 감독.

―영화 속 딸은 고등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지만 정작 자신이 행하는 차별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혐오가 점점 세련되고 교묘하게 둔갑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우리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나.
= (박동훈 감독) '전라도', '라도', 이런 것도 일종의 2등 시민 취급하는 발언이지 않나. '나는 저 사람들과 달라' 하면서 우월감을 만족하다고나 할까. 서울이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는데, 서울 이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호남차별과 유사한 차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아버지와 딸의 대화가 끝난 뒤 갑자기 아무도 없는 식탁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어떤 의도인가.
= (박동훈 감독)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인데, '슬기로운 신경질'이라고 할까. '이제 여기서 좀 끊자, 언제까지 이럴 거냐'.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내 신경질이라는 답변을 가장 많이 드렸다. 사실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연출자가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구체적인 문장으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영화를 만들어 가면서 (답을) 찾는 거니까. 또는 약간 '스산한 공포'? 당신들도 이렇게 흉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지워질 수 있어'라는 공포도 살짝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에서 ‘진정성 실전편’을 연출한 최하나 감독.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에서 ‘진정성 실전편’을 연출한 최하나 감독.

―작품에서 이른바 '남성혐오' 논란을 정면으로 다룬 점이 인상적이다.
= (최하나 감독) 2021년 말에 연출 제안을 받았는데, 2020~2021년을 통과하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슈다. 그 과정 자체가 굉장히 희극적이라고 생각했고, 웃어넘겼어야 하는 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아직도 사회에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 방송사가 양자경 배우의 수상 소감에서 '여성'을 지우고 방송을 내보냈던 게 그 예다. 해당 발언은 논란이 될 여지가 하나도 없었지만, 여성이나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순간 그냥 금기가 돼 버리는 거다. 불필요한 검열과 말조심을 계속하면서 진짜 필요한 이야기는 수면 위에 올리지도 못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고 생각한다.

―불매 운동 등에 대한 비판 의식도 눈에 띈다.
=(최하나 감독) 요즘 사람들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훨씬 더 우선하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자주 체감한다. 불매운동 같은 집단 행동이 실제로 사회에서 공공선을 지키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계없이 내 기분이 가장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돼 소비자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 혐오 발언을 한 사람이라면 '올바르지 않은 용어를 썼으니 매장합시다'가 아니라, 문제적이니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논의하지 않나. 그런데 ('남성혐오' 논란에서는) 그 과정이 생략됐다는 건 표현은 그냥 핑계였을 뿐이라는 거다. '남혐' 논란 당시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사회적인 책임을 지고 대응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고민 없이 당장의 불만을 잠재우고 소비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삼고 대응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본다.

15일 서울 영등포구 KBS 사옥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제작진. 왼쪽부터 박동훈, 최하나, 윤성호 감독.15일 서울 영등포구 KBS 사옥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제작진. 왼쪽부터 박동훈, 최하나, 윤성호 감독.

―영화제와 공동체 상영 등으로 극장 개봉 전 관객들을 만난 바 있는데,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박동훈 감독) 전북 무주와 광주가 기억에 남는다. 무주에서는 한 관객이 광주에서 일하고 있다며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광주 아시아문화의 전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답변을 잘 못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질문이 아니라 '네가 이런 걸 어떻게 아느냐'며 반가워하는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광주야 아무래도 '본진'이니까, '내 얘기를 해 준 것 같아서 반가웠다, 나나 내 부모님의 응어리를 풀어주어 고맙다, 수고했다' 같은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최하나 감독)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남자 중학교에서 공동체 상영 후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 남자 중학생을 만날 일이 없기에 미디어 속 이미지만 가지고 반응을 예상했는데, 어떤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그런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반성했다. '이건 왜 나왔어요', '이건 어떤 의미예요' 하고 물어봐 주는 게 고마웠는데, 어른들도 이 정도의 궁금증만 품어도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이건 내가 다 아는 거야', '저건 다 틀리고 이게 맞는 거야'하고 자기가 속한 진영에서만 생각한다. 더 알고자 하지 않는다. 영화에도 정답에 가까운 영화가 있지만, 끈덕지게 질문이 들러붙는 영화들이 있다. '이게 진짜 맞나? 이래도 됐던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가 힘이 세다는 생각을 최근 하게 됐다. '말바말'도 여러 질문을 품고 있다. 관객들도 그런 질문을 하나씩 품고 가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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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17 16:19:47
    • 수정2023-05-22 15: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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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이 남미 가는 건 좋아하면서 남미 되는 건 싫어하거든.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줘야 사람들이 싸울 생각을 안 먹어요." 신나게 직원 탄압 비법을 주고받는 대기업 '과장 권한대행'과 '벤처 비슷한 회사' 대표. 화기애애한 분위기지만,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2. 손자가 '광주 출신'이 되는 게 싫은 아빠를 임산부 딸이 타이른다. "아빠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진지한 딸의 훈계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아빠. 그런데 갑자기 딸의 입에서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온다. 뭐? 엘...사?

#3. 직원이 광고에 쓴 단어 때문에 '남성 혐오 논란'이 불거진 강아지 식품회사. 문제의 단어가 '허버버법'인지 '허버허버'인지, 이게 왜 '남혐'인지는 몰라도 일단 사과문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그때 들려오는 직원의 순진한 질문. "근데 팀장님, 이것보다 더 심각한 일들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지 않았어요?"

6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독립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이하 '말바말')는 우습되 웃지 못할 장면들로 우리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노동 기본권 탄압과 '남성혐오' 논란, 호남 차별과 동물권 등 202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첨예한 이슈를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날렵하고 가볍"다. '가시를 품고 꿀을 발랐다'(평론가 박평식)거나, '현실을 겨냥한 날카로운 입담들'(평론가 조현나)이란 평가처럼 뼈있는 농담으로 '을과 을'이 '병'을 억압하는 부조리를 압축적으로 비튼다.

"우리는 윤리 선생님이 아니니까, '내가 이렇게 쉽게 말하고 판단하는 게 맞나, 그러면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지는 것 같은데'. 이 감각만 일깨워줘도 충분한 것 같거든요. 조금 웃겨주고 나서 집에 갈 때 '아이러니하네', 이런 생각이 든다면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15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윤성호 감독은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설명했다. 2021년 가을, 사회적 이슈를 다룬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서울독립영화 측 연락을 받고 고심하던 중 뜻 맞는 감독 5명을 추가로 섭외하며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시작됐다. '한 신(scene), 한 장소, 2명의 대화를 6시간 안에 찍을 것'. 까다로운 요구 조건에도 감독들은 기꺼이 동참해 창의력과 문제 의식을 불태웠다. 박동훈, 최하나 감독 등 '말바말'을 만든 3명과의 대화를 정리해 옮긴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 ‘프롤로그’를 연출한 윤성호 감독.
―'말이야 바른 말이지'란 제목이 독특하다. 어떻게 짓게 됐나.
= (윤성호 감독) 제안을 받고 고민하며 집에 가던 중 옆에서 지나가는 분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동네에 되게 선하신 분들이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전라도 사람들이 조금 사람 힘들게 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시는 게 묘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로 말을 시작했을 때 진짜 옳고 세심한 말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평소보다 더 거칠고 못난 말을 하고 싶을 때 우리가 슬쩍 앞에 붙이는 말이니까. 이 영화가 누군가를 업신여기거나 끌어내리려는 말을 하려다가도 움찔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작품 속에 호남 차별과 성차별, 주거지에 따른 차별 등 다양한 차별에 대한 문제 의식이 담겨 있다. 호남 차별을 중심 소재로 택한 이유는?
=(박동훈 감독) 약간의 긍정적인 긴장을 하지 않고 살아가면 자기도 모르게 영화에서 표현된 차별에 쉽게 동참할 수가 있다는 걸 전달하고 싶었다. 윤 감독에게 독립영화계 안에, 특히 단편 영화 중에 호남 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본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더라.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미국 유학 중이었는데, 당선되어 다행이라고 했더니 '전라도세요?'라는 반응을 최소한 다섯 번을 들었다. 처음으로 동년배 사람들에게서 호남 차별 발언을 들었을 때 '이게 뭔가' 하는 고민이 생겼고, '아닌데요'라고 답했던 비겁한 내 반응에 굉장히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언젠가는 꼭 이 얘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마침 제안이 왔을 때 이제 이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풀어도 되겠다 싶었다. 마지막에 임대주택을 연결지은 건 과거에 만들어진 차별과 지금 현재 우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혐오를 접목시켜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에서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를 연출한 박동훈 감독.
―영화 속 딸은 고등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지만 정작 자신이 행하는 차별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혐오가 점점 세련되고 교묘하게 둔갑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우리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하나.
= (박동훈 감독) '전라도', '라도', 이런 것도 일종의 2등 시민 취급하는 발언이지 않나. '나는 저 사람들과 달라' 하면서 우월감을 만족하다고나 할까. 서울이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는데, 서울 이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호남차별과 유사한 차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아버지와 딸의 대화가 끝난 뒤 갑자기 아무도 없는 식탁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어떤 의도인가.
= (박동훈 감독)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인데, '슬기로운 신경질'이라고 할까. '이제 여기서 좀 끊자, 언제까지 이럴 거냐'.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내 신경질이라는 답변을 가장 많이 드렸다. 사실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연출자가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구체적인 문장으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영화를 만들어 가면서 (답을) 찾는 거니까. 또는 약간 '스산한 공포'? 당신들도 이렇게 흉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지워질 수 있어'라는 공포도 살짝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에서 ‘진정성 실전편’을 연출한 최하나 감독.
―작품에서 이른바 '남성혐오' 논란을 정면으로 다룬 점이 인상적이다.
= (최하나 감독) 2021년 말에 연출 제안을 받았는데, 2020~2021년을 통과하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슈다. 그 과정 자체가 굉장히 희극적이라고 생각했고, 웃어넘겼어야 하는 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아직도 사회에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한 방송사가 양자경 배우의 수상 소감에서 '여성'을 지우고 방송을 내보냈던 게 그 예다. 해당 발언은 논란이 될 여지가 하나도 없었지만, 여성이나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순간 그냥 금기가 돼 버리는 거다. 불필요한 검열과 말조심을 계속하면서 진짜 필요한 이야기는 수면 위에 올리지도 못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고 생각한다.

―불매 운동 등에 대한 비판 의식도 눈에 띈다.
=(최하나 감독) 요즘 사람들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훨씬 더 우선하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자주 체감한다. 불매운동 같은 집단 행동이 실제로 사회에서 공공선을 지키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계없이 내 기분이 가장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돼 소비자의 권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 혐오 발언을 한 사람이라면 '올바르지 않은 용어를 썼으니 매장합시다'가 아니라, 문제적이니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논의하지 않나. 그런데 ('남성혐오' 논란에서는) 그 과정이 생략됐다는 건 표현은 그냥 핑계였을 뿐이라는 거다. '남혐' 논란 당시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사회적인 책임을 지고 대응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고민 없이 당장의 불만을 잠재우고 소비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삼고 대응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고 본다.

15일 서울 영등포구 KBS 사옥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제작진. 왼쪽부터 박동훈, 최하나, 윤성호 감독.
―영화제와 공동체 상영 등으로 극장 개봉 전 관객들을 만난 바 있는데,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박동훈 감독) 전북 무주와 광주가 기억에 남는다. 무주에서는 한 관객이 광주에서 일하고 있다며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광주 아시아문화의 전당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답변을 잘 못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질문이 아니라 '네가 이런 걸 어떻게 아느냐'며 반가워하는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광주야 아무래도 '본진'이니까, '내 얘기를 해 준 것 같아서 반가웠다, 나나 내 부모님의 응어리를 풀어주어 고맙다, 수고했다' 같은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최하나 감독)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남자 중학교에서 공동체 상영 후 대화를 나눴다. 평소에 남자 중학생을 만날 일이 없기에 미디어 속 이미지만 가지고 반응을 예상했는데, 어떤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그런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반성했다. '이건 왜 나왔어요', '이건 어떤 의미예요' 하고 물어봐 주는 게 고마웠는데, 어른들도 이 정도의 궁금증만 품어도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이건 내가 다 아는 거야', '저건 다 틀리고 이게 맞는 거야'하고 자기가 속한 진영에서만 생각한다. 더 알고자 하지 않는다. 영화에도 정답에 가까운 영화가 있지만, 끈덕지게 질문이 들러붙는 영화들이 있다. '이게 진짜 맞나? 이래도 됐던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가 힘이 세다는 생각을 최근 하게 됐다. '말바말'도 여러 질문을 품고 있다. 관객들도 그런 질문을 하나씩 품고 가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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