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판정…이주노동자 ‘칸’ 661일 만에 산재 인정

입력 2023.05.19 (17:36) 수정 2023.05.1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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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취재진과 만난 이주노동자 칸 모바실 씨. 양식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판정받고 산재를 신청한지 1년 9개월만에 승인받았다.KBS 취재진과 만난 이주노동자 칸 모바실 씨. 양식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판정받고 산재를 신청한지 1년 9개월만에 승인받았다.

이주노동자 칸 씨를 2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처음 백혈병을 진단받고 투병을 시작했던 떄보다 조금 야윈 모습이었고, 곱슬거리며 휘날리던 머리는 짧아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표정은 밝았습니다. 칸 씨는 "잘 지내고 있었다"며 얼마전 집으로 배달된 산재 인정 통지서를 꺼내 보여줬습니다.

파키스탄 출신 칸 모바실 씨가 한국에 온건 13년 전입니다. 칸 씨는 전남 담양과 제주도 등의 수산 양식장에서 일하다 2년 전 돌연 '만성 골수 백혈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고국에서 럭비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건강했던 칸 씨였습니다.

양식장에서 소독용으로 쓰이는 ‘수산용 포르말린’의 모습.양식장에서 소독용으로 쓰이는 ‘수산용 포르말린’의 모습.

칸 씨는 양식장에서 다뤘던 '수산용 포르말린'이 발병 원인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습니다. 수산용 포르말린은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의 수용액입니다. 양식장에서 기생충을 없애거나 수조를 청소할 때 쓰입니다.

지난달 28일 칸 씨의 백혈병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칸 씨가 산재를 신청한지 1년 9개월, 일수로 따지면 661일 만입니다.

[연관 기사] “아무도 위험성 말해주지 않았다”…포르말린 노출된 이주노동자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64152

■ "단기간, 고농도 노출은 백혈병과 인과관계 인정돼"


올해 3월, 칸 씨가 일했던 사업장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 백혈병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칸 씨가 포름알데히드에 노출된 누적 시간이 짧다는 이유에섭니다.

하지만 재심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누적 노출시간은 낮지만, 단기간 고농도에 노출됐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칸 씨가 복용중인 약.칸 씨가 복용중인 약.

칸 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말합니다.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음 졸이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재해를 청구한 외국인에 한해서 체류자격을 연장해주고 있긴 하지만 취업은 제한하고 있습니다. 칸 씨는 취업 비자 만료를 앞두고 백혈병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매달 2백만원 넘는 약값과 진료비를 감당해야 했던 칸 씨는 모처럼 웃었습니다.


■ 전남 양식장 이주노동자 최소 만 명...'수산용 포르말린' 유해성 조사 시급


진단 초기,  백혈병의 대표적 증상 중 하나인 ‘점상 출혈’ 이 나타난 칸 씨의 허벅지진단 초기, 백혈병의 대표적 증상 중 하나인 ‘점상 출혈’ 이 나타난 칸 씨의 허벅지

칸 씨는 지금도 양식장에서 일하고 있을 다른 동료들이 걱정입니다. 칸 씨는 자신이 백혈병에 걸리기 전까지 아무도 '수산용 포르말린'의 위험성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수산용 포르말린을 다룰 땐 사업주가 특수장갑이나 방독 마스크를 지급해야 합니다. 또 이를 외국인 노동자가 사용할 경우엔, 해당 물질의 위험성을 외국어로 알려야 합니다. 하지만 칸 씨에게 포르말린의 위험성을 알려준 이는 아무도 없었고, 언제나 면장갑 또는 맨손으로 포르말린을 만져야 했습니다.

눈에선 눈물이, 코에선 콧물이 흘러 나왔고, 몸 곳곳에 알 수 없는 멍이 생기고 나서야 백혈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수산용 포르말린 용기 뒤에 적힌  위험 안내 문구.수산용 포르말린 용기 뒤에 적힌 위험 안내 문구.

전국에서 어업생산량이 가장 많은 전남의 양식장 수는 만 6천여 곳에 달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최소 3천명, 여기에 미등록 이주노동자까지 더하면 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일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정작 수산용 포르말린을 안전한 환경에서 제대로 취급하고 있는지 실태조사는 물론, 노동자의 인체에 얼마나 유해한지에 대한 조사도 이뤄진 적 없습니다.

심지어 산업안전보건법상 포르말린의 주성분인 '포름알데히드'는 특수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유해인자로 지정돼 있지만, '포르말린'은 유해인자로 지정돼 있지 않습니다.

문길주 전남 노동권익센터장은 "이주노동자들은 양식장에서 염산이나 포르말린 등 유해물질을 수시로 다루고 있지만, 정작 특수건강검진 대상에서는 제외돼 있다" 면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양식장 노동환경 실태조사와 포르말린의 유해성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시급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칸 씨는 자신의 산재 인정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칸 씨는 이주노동자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수산용 포르말린을 취급하고, 질병이 생기면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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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3-05-19 17: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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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취재진과 만난 이주노동자 칸 모바실 씨. 양식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판정받고 산재를 신청한지 1년 9개월만에 승인받았다.
이주노동자 칸 씨를 2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처음 백혈병을 진단받고 투병을 시작했던 떄보다 조금 야윈 모습이었고, 곱슬거리며 휘날리던 머리는 짧아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표정은 밝았습니다. 칸 씨는 "잘 지내고 있었다"며 얼마전 집으로 배달된 산재 인정 통지서를 꺼내 보여줬습니다.

파키스탄 출신 칸 모바실 씨가 한국에 온건 13년 전입니다. 칸 씨는 전남 담양과 제주도 등의 수산 양식장에서 일하다 2년 전 돌연 '만성 골수 백혈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고국에서 럭비선수로 활동할 정도로 건강했던 칸 씨였습니다.

양식장에서 소독용으로 쓰이는 ‘수산용 포르말린’의 모습.
칸 씨는 양식장에서 다뤘던 '수산용 포르말린'이 발병 원인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습니다. 수산용 포르말린은 발암물질인 '포름알데히드'의 수용액입니다. 양식장에서 기생충을 없애거나 수조를 청소할 때 쓰입니다.

지난달 28일 칸 씨의 백혈병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칸 씨가 산재를 신청한지 1년 9개월, 일수로 따지면 661일 만입니다.

[연관 기사] “아무도 위험성 말해주지 않았다”…포르말린 노출된 이주노동자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264152

■ "단기간, 고농도 노출은 백혈병과 인과관계 인정돼"


올해 3월, 칸 씨가 일했던 사업장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 백혈병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칸 씨가 포름알데히드에 노출된 누적 시간이 짧다는 이유에섭니다.

하지만 재심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누적 노출시간은 낮지만, 단기간 고농도에 노출됐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칸 씨가 복용중인 약.

칸 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말합니다.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음 졸이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재해를 청구한 외국인에 한해서 체류자격을 연장해주고 있긴 하지만 취업은 제한하고 있습니다. 칸 씨는 취업 비자 만료를 앞두고 백혈병 판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매달 2백만원 넘는 약값과 진료비를 감당해야 했던 칸 씨는 모처럼 웃었습니다.


■ 전남 양식장 이주노동자 최소 만 명...'수산용 포르말린' 유해성 조사 시급


진단 초기,  백혈병의 대표적 증상 중 하나인 ‘점상 출혈’ 이 나타난 칸 씨의 허벅지
칸 씨는 지금도 양식장에서 일하고 있을 다른 동료들이 걱정입니다. 칸 씨는 자신이 백혈병에 걸리기 전까지 아무도 '수산용 포르말린'의 위험성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수산용 포르말린을 다룰 땐 사업주가 특수장갑이나 방독 마스크를 지급해야 합니다. 또 이를 외국인 노동자가 사용할 경우엔, 해당 물질의 위험성을 외국어로 알려야 합니다. 하지만 칸 씨에게 포르말린의 위험성을 알려준 이는 아무도 없었고, 언제나 면장갑 또는 맨손으로 포르말린을 만져야 했습니다.

눈에선 눈물이, 코에선 콧물이 흘러 나왔고, 몸 곳곳에 알 수 없는 멍이 생기고 나서야 백혈병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수산용 포르말린 용기 뒤에 적힌  위험 안내 문구.
전국에서 어업생산량이 가장 많은 전남의 양식장 수는 만 6천여 곳에 달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최소 3천명, 여기에 미등록 이주노동자까지 더하면 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일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정작 수산용 포르말린을 안전한 환경에서 제대로 취급하고 있는지 실태조사는 물론, 노동자의 인체에 얼마나 유해한지에 대한 조사도 이뤄진 적 없습니다.

심지어 산업안전보건법상 포르말린의 주성분인 '포름알데히드'는 특수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유해인자로 지정돼 있지만, '포르말린'은 유해인자로 지정돼 있지 않습니다.

문길주 전남 노동권익센터장은 "이주노동자들은 양식장에서 염산이나 포르말린 등 유해물질을 수시로 다루고 있지만, 정작 특수건강검진 대상에서는 제외돼 있다" 면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양식장 노동환경 실태조사와 포르말린의 유해성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시급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칸 씨는 자신의 산재 인정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칸 씨는 이주노동자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수산용 포르말린을 취급하고, 질병이 생기면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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