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역사를 바꾼 거장 윌리엄 클라인의 ‘파격’

입력 2023.05.24 (10:1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자화상(Self Portrait), 윌리엄 클라인 스튜디오, 파리 (사진제공: 뮤지엄한미)자화상(Self Portrait), 윌리엄 클라인 스튜디오, 파리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1955년 미국 뉴욕에 발을 디딘 스물일곱 살의 청년 사진가. 그곳은 청년의 고향이었습니다. 유태인 이민자 출신의 이 청년을 뉴욕으로 불러들인 건 당시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VOGUE)의 편집장 알렉산더 리버맨(Alexander Liebermann). 파리에서 청년의 그림을 본 리버맨은 일찍이 그 재능을 간파했고, 그가 뉴욕에서 불편함 없이 작업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 전도유망한 청년 사진가의 이름은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저 유명한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으로부터 물려받은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클라인은 뉴욕 거리를 누볐습니다. 훗날 이 사진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될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죠.

사탕 가게(Candy Store), 뉴욕 (사진제공: 뮤지엄한미)사탕 가게(Candy Store), 뉴욕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클라인의 뉴욕 사진이 세상에 알려진 건 이듬해 파리에서 출판된 작품집 《뉴욕(New York)》 덕분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으로 파병돼 복무하던 클라인은 전쟁이 끝난 뒤 파리에 정착합니다.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클라인의 인생 1막이었죠. 출발은 그림이었습니다. 클라인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유명한 입체주의 회화의 거장 페르낭 레제를 사사합니다.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 회화에서 출발한 클라인은 차츰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크기 조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매체의 유연성' 때문이었죠. 초기에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암실에서 '사진 추상'이라 불리는 다양한 실험에 몰두합니다. 그러던 1952년, 추상미술의 세계적인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이 자주 찾았던 네덜란드의 발헤렌 섬에 갔다가 뜻밖의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발헤렌 섬의 헛간(Barn on Walcheren Island), 네덜란드 (사진제공: 뮤지엄한미)발헤렌 섬의 헛간(Barn on Walcheren Island), 네덜란드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클라인이 처음 야외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여러 모로 몬드라인의 회화를 연상시키죠. 클라인은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뒤 파리로 돌아가 암실에서 화면을 자르고 반전시킵니다. 회화로 출발한 작가답게 회화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다시 1955년으로 돌아가 뉴욕에서 찍은 클라인의 사진은 그때까지 사람들이 보던 전통적인 문법의 사진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클라인은 인파로 북적이는 대도시 뉴욕의 한복판으로 성큼 걸어들어가 거리에서 만난 이들을 사진에 담았죠. '적절하게 아름다운 구도나 초점' 따위는 보기 좋게 던져버린 듯 피사체에 거의 붙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찍은 사진들. 클라인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롤링 스톤즈 콘서트(Rolling Stones Concert), 파리 (사진제공: 뮤지엄한미)롤링 스톤즈 콘서트(Rolling Stones Concert), 파리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내 미학적 기준은 뉴욕 데일리 뉴스 신문이었다. 인정사정없는 레이아웃과 요란한 헤드라인으로 난폭하고 무례하며 거칠고 잉크가 번져 있는 타블로이드 같은 사진집을 만들고 싶었으며, 이런 책이야말로 뉴욕에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뉴욕의 거리와 군중을 '뉴욕답게' 표현하고자 했던 클라인의 명백한 의도를 보여주죠. 1956년 파리에서 출판된 작품집은 그해의 최우수 사진집에 뽑혀 클라인에게 세계적인 권위의 '나다르상'을 안겨줍니다. 지금까지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뉴욕 사진을 통해 큰 명성을 얻은 클라인은 본격적으로 잡지 <보그>를 위해 패션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패션잡지 〈보그〉를 위해 파리 오페라 극장 앞에서 찍은 사진패션잡지 〈보그〉를 위해 파리 오페라 극장 앞에서 찍은 사진

패션잡지 〈보그〉를 위해 밀랍인형박물관에 모델들을 배치해놓고 찍은 사진패션잡지 〈보그〉를 위해 밀랍인형박물관에 모델들을 배치해놓고 찍은 사진

클라인은 이후 10년 동안 <보그>와 함께하며 수많은 사진을 남기죠. 인파로 붐비는 파리 오페라 극장 앞에 모델들을 세워놓고 찍은 사진은 클라인의 가장 유명한 패션사진으로 꼽힙니다. 밀랍인형 사이사이에 모델들을 숨기듯 배치하고 찍은 사진은 또 어떻고요. 실상과 허상이 혼재된 세계를 그려낸 클라인은 그저 '보기 좋은' 패션사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패션산업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비판적인 사진과 영상 작업으로 '패션사진'에서 더 나아간 문제의식을 보여줬죠.

윌리엄 클라인은 회화부터 디자인, 사진, 패션, 영화, 책 등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사진의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거장입니다. 같은 시대에 등장한 또 다른 거장 로버트 프랭크와 함께 세계 사진의 역사를 전과 후로 나눈다고 할 정도로 '기준점'이 되는 중요한 작가죠. 종래의 규칙과 금기, 한계를 내던졌다,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특질로 기존 시각예술의 전통과 미학의 판도를 전복시켰다... 클라인의 예술을 설명하는 문구들입니다.

안토니아 + 사이먼 + 이발소(Antonia + Simone + Barbershop), 뉴욕 for 보그 (사진제공: 뮤지엄한미)안토니아 + 사이먼 + 이발소(Antonia + Simone + Barbershop), 뉴욕 for 보그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사진 전문 미술관인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윌리엄 클라인(1926~2022)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이 열립니다.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해 작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전 세계에서 처음 열리는 작가의 유고전이 됐죠. 195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까지 작품 130여 점과 자료 40여 점을 통해 윌리엄 클라인의 예술 세계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모해갔는지 볼 수 있습니다.

시간 흐름에 따라 모두 8개 섹션으로 꾸며 클라인의 인간적 면모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게 전시를 준비한 이들의 전언입니다.

■전시 정보
제목: 윌리엄 클라인 <DEAR FOLKS>
기간: 2023년 9월 17일(일)까지
장소: 뮤지엄한미 삼청 본관
작품: 회화, 사진 , 영화, 책 등 작품 130여 점과 자료 40여 점

자기 추상 작품 앞에서 윌리엄 클라인 (사진제공: 뮤지엄한미)자기 추상 작품 앞에서 윌리엄 클라인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사진의 역사를 바꾼 거장 윌리엄 클라인의 ‘파격’
    • 입력 2023-05-24 10:15:42
    심층K
자화상(Self Portrait), 윌리엄 클라인 스튜디오, 파리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1955년 미국 뉴욕에 발을 디딘 스물일곱 살의 청년 사진가. 그곳은 청년의 고향이었습니다. 유태인 이민자 출신의 이 청년을 뉴욕으로 불러들인 건 당시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VOGUE)의 편집장 알렉산더 리버맨(Alexander Liebermann). 파리에서 청년의 그림을 본 리버맨은 일찍이 그 재능을 간파했고, 그가 뉴욕에서 불편함 없이 작업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 전도유망한 청년 사진가의 이름은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저 유명한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으로부터 물려받은 라이카 카메라를 들고 클라인은 뉴욕 거리를 누볐습니다. 훗날 이 사진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될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죠.

사탕 가게(Candy Store), 뉴욕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클라인의 뉴욕 사진이 세상에 알려진 건 이듬해 파리에서 출판된 작품집 《뉴욕(New York)》 덕분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으로 파병돼 복무하던 클라인은 전쟁이 끝난 뒤 파리에 정착합니다.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클라인의 인생 1막이었죠. 출발은 그림이었습니다. 클라인은 당시 파리 화단에서 유명한 입체주의 회화의 거장 페르낭 레제를 사사합니다.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 회화에서 출발한 클라인은 차츰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크기 조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매체의 유연성' 때문이었죠. 초기에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암실에서 '사진 추상'이라 불리는 다양한 실험에 몰두합니다. 그러던 1952년, 추상미술의 세계적인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이 자주 찾았던 네덜란드의 발헤렌 섬에 갔다가 뜻밖의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발헤렌 섬의 헛간(Barn on Walcheren Island), 네덜란드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클라인이 처음 야외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여러 모로 몬드라인의 회화를 연상시키죠. 클라인은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뒤 파리로 돌아가 암실에서 화면을 자르고 반전시킵니다. 회화로 출발한 작가답게 회화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다시 1955년으로 돌아가 뉴욕에서 찍은 클라인의 사진은 그때까지 사람들이 보던 전통적인 문법의 사진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클라인은 인파로 북적이는 대도시 뉴욕의 한복판으로 성큼 걸어들어가 거리에서 만난 이들을 사진에 담았죠. '적절하게 아름다운 구도나 초점' 따위는 보기 좋게 던져버린 듯 피사체에 거의 붙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찍은 사진들. 클라인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롤링 스톤즈 콘서트(Rolling Stones Concert), 파리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내 미학적 기준은 뉴욕 데일리 뉴스 신문이었다. 인정사정없는 레이아웃과 요란한 헤드라인으로 난폭하고 무례하며 거칠고 잉크가 번져 있는 타블로이드 같은 사진집을 만들고 싶었으며, 이런 책이야말로 뉴욕에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뉴욕의 거리와 군중을 '뉴욕답게' 표현하고자 했던 클라인의 명백한 의도를 보여주죠. 1956년 파리에서 출판된 작품집은 그해의 최우수 사진집에 뽑혀 클라인에게 세계적인 권위의 '나다르상'을 안겨줍니다. 지금까지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뉴욕 사진을 통해 큰 명성을 얻은 클라인은 본격적으로 잡지 <보그>를 위해 패션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패션잡지 〈보그〉를 위해 파리 오페라 극장 앞에서 찍은 사진
패션잡지 〈보그〉를 위해 밀랍인형박물관에 모델들을 배치해놓고 찍은 사진
클라인은 이후 10년 동안 <보그>와 함께하며 수많은 사진을 남기죠. 인파로 붐비는 파리 오페라 극장 앞에 모델들을 세워놓고 찍은 사진은 클라인의 가장 유명한 패션사진으로 꼽힙니다. 밀랍인형 사이사이에 모델들을 숨기듯 배치하고 찍은 사진은 또 어떻고요. 실상과 허상이 혼재된 세계를 그려낸 클라인은 그저 '보기 좋은' 패션사진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패션산업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비판적인 사진과 영상 작업으로 '패션사진'에서 더 나아간 문제의식을 보여줬죠.

윌리엄 클라인은 회화부터 디자인, 사진, 패션, 영화, 책 등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사진의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거장입니다. 같은 시대에 등장한 또 다른 거장 로버트 프랭크와 함께 세계 사진의 역사를 전과 후로 나눈다고 할 정도로 '기준점'이 되는 중요한 작가죠. 종래의 규칙과 금기, 한계를 내던졌다,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특질로 기존 시각예술의 전통과 미학의 판도를 전복시켰다... 클라인의 예술을 설명하는 문구들입니다.

안토니아 + 사이먼 + 이발소(Antonia + Simone + Barbershop), 뉴욕 for 보그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사진 전문 미술관인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윌리엄 클라인(1926~2022)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이 열립니다.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해 작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전 세계에서 처음 열리는 작가의 유고전이 됐죠. 195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까지 작품 130여 점과 자료 40여 점을 통해 윌리엄 클라인의 예술 세계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모해갔는지 볼 수 있습니다.

시간 흐름에 따라 모두 8개 섹션으로 꾸며 클라인의 인간적 면모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게 전시를 준비한 이들의 전언입니다.

■전시 정보
제목: 윌리엄 클라인 <DEAR FOLKS>
기간: 2023년 9월 17일(일)까지
장소: 뮤지엄한미 삼청 본관
작품: 회화, 사진 , 영화, 책 등 작품 130여 점과 자료 40여 점

자기 추상 작품 앞에서 윌리엄 클라인 (사진제공: 뮤지엄한미)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