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들불야학 박기순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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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은 박기순 열사...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82년 영혼 결혼식 올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임을 위한 행진곡은 박기순·윤상원의 추모 노래"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 이후 1978년 7월 들불야학 시작...그해 크리스마스 다음 날 연탄가스로 사망"
"문병란 시인의 '부활의 노래'...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 정녕 그대들은 다시 돌아오는구나"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2SMHIWzr_bA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또 무엇일까요?
◆ 노성태: 5월만 되면 광주 시민이 읊조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인데요. 저도 오월만 되면 입속에서 계속 이 노래가 굴러다니더라고요. 그런데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마 광주 시민이면 누구나 다 한 소절 정도는 부를 것 같은데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이 누구인지 이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 박기순 열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 박기순 열사 이야기군요. 박기순 열사는 5.18 민주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의 영혼의 반려자이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박기순 열사는 1978년 광천동에서 들불야학을 시작했던 분인데 그해 12월 26일 연탄가스로 숨졌고, 들불야학에서 함께했던 윤상원은 시민군 대변인이 되어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분이시잖아요. 1982년 2월 20일 두 분의 영혼 결혼식이 망월동 묘역에서 열렸고, 영혼 결혼식이 치러진 두 달 뒤인 4월 운암동에 있는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두 분을 추모하기 위한 노래가 만들어졌는데 그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고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은 영혼 결혼식의 두 당사자이니까 윤상원과 박기순이겠지만 저는 결혼식의 꽃은 신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1차적 '임'은 박기순 열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윤주성: 그래서 박기순 열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 박기순 열사는 시골 중학교에서 명문인 전남여고에 합격한 수재라고 하던데요. 어디에서 언제 태어났는지 궁금하네요?
◆ 노성태: 박기순은 1957년 전남 보성군 노동면 죽현마을에서 3남 4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노동면 용호리 죽현마을이라고 하는 곳은 오지 중의 오지고요. 보성 읍내에서도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이런 오지에서 태어났는데 그래서 다녔던 초등학교는 노동초등학교입니다. 그런데 노동초등학교 시절 책벌레, 공부벌레였고 6년 동안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고요. 글쓰기 대회만 열리면 각종 상은 박기순의 몫이 됐다고 합니다. 보성여중을 의탁을 했고 졸업할 때 그때 호남의 최고 명문은 전남여고였고. 시험 봐서 들어가던 시기였는데 당시 보성여중에서 전남여고를 합격하는 경우는 1년 1명, 아니면 없었다고 하는데요. 박기순이 친구 임향숙과 함께 두 명이나 합격했으니까 당시 보성여중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 윤주성: 시골 마을에서 엄청난 경사였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윤주성: 당시 명문 전남여고에 입학한 수재였는데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에 글을 남겼다고 들었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박기순이 입학한 전남여고는 1927년에 개교한 학교고요. 당시 이름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줄여서 광주여고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항일학교였습니다. '소녀회'라고 하는 단체가 주도적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지요. 그래서 교정에 무엇이 서 있느냐 하면 이 운동을 기리는 여학생 생도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박기순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참여했던 선배들 정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전남여고 교지 '샘'에 실렸던 "우리 얼 새긴 학생 탑에 부치노라"란 박기순의 글 속에 잘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우리 얼 새긴 학생 탑에 부치노라"라는 글은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글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런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그대의 숭고한 모습에 숙연히 머리를 숙였소. 의연한 자세로 굽어보는 그대의 그 다사로운 눈길은 항상 우리를 굳세고 참되게 자라도록 인도했소. 우리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대에게서 우리는 힘찬 긍지를 배웠소. 우리는 그대의 육중함을 좋아하고 그대의 그 무언의 교훈을 좋아한다오. 그대는 감자 탑이 아닌 진정 금자탑임에 틀림이 없소". 그대라고 하는 것은 학생기념비라고 하는 것은 금방 아실 것 같고요. 그런데 기념비가 생긴 모양이 꼭 감자 같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비하해서 감자 탑 이렇게 불렀는데 그런데 박기순의 눈에는 감자탑이 아니라 금자탑이라고 비친 것이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썼던 글인데 이때부터 탑을 봤던 관점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박기순은 금자탑에서 굳세고 참된 정신 힘찬 긍지 무언의 교훈을 체득하면서 자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윤주성: 박기순은 전남여고 학생 시절부터 운동권 선배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박기순 열사의 큰 오빠가 박화강입니다. 박화강 하면 옛날 한겨레 신문 기자로도 유명하신 분인데 이분이 큰 오빠고요. 작은 오빠 형선인데 이분은 최근에 돌아가신 민주화운동을 하셨던 분이고요. 함께 산수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자취방은 항상 작은 오빠 형선의 친구들인 광주운동권 학생들의 아지트였다고 합니다. 가장 자주 와서 진을 쳤던 분이 애청자 여러분도 잘 아시는 김남주 씨였고요. 두 번째로 많이 왔던 분이 5.18 마지막 수배자로 알려진 윤한봉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이강, 이학영, 정상용 등이 무시로 드나들었고. 그래서 그분들의 실천적인 삶 이것이 고등학생이었던 박기순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작은 오빠가 운동권에 열심히 참여하셨던 분 같네요.
◆ 노성태: 민청학련 사건으로 20년을 선고받으신 분입니다. 12년인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 윤주성: 그러면 가족들의 영향도 컸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가족뿐만 아니라 방금 이야기한 대로 작은 형, 작은 오빠 친구들의 영향 김남주 시인이라든가 아까 윤한봉 선생이라든가 이런 분들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박기순 하면 사실 들불야학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들불야학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 노성태: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박기순이 진학한 것이 전남대학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였고요. 그리고 진학 후에는 사회과학 서클이었던 '루사'에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2학년 때가 1977년인데 산수동 꼬두메 마을의 노인회관을 빌려서 중학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산수중학이라는 야학을 시작했는데 야학 친구들이 월급을 더 준다니까 서울이나 부산으로 흩어지면서 8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2학년 때 야학을 시작했고요.
1978년 박기순 3학년 때 전남대학교 송기숙 교수 등이 중심이 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되는데 핵심 인물로 지목되었고 수배 대상에 오르게 되자 학교를 자퇴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 윤주성: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낯선 분들 많을 텐데요. 간략하게 소개해주시겠습니까?
◆ 노성태: 많은 분이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 이렇게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이 있었잖아요. 이것이 일제의 교육 칙어와 같은 것으로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될 목표가 될 수 없다" 이렇게 교수님들이 밝혔던 선언인 것이지요.
◇ 윤주성: 당시 어떤 지식인들의 의미 있는 선언이었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그때 전남대학교 교수님들 전부가 해직이 되었고 이에 반발해서 학생들이 최초로 70년대에 시위를 하게 된 것이 교육지표 사건 이후의 학생 시위인데 이때 박기순 열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수배에 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 윤주성: 노동운동 뒤에 시작한 것이 광천동 들불야학이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박기순은 1978년 7월 23일 광천동의 성당을 빌려서 광천동 광천공단 일대에서 일했던 청소년 35명을 모아서 입학식을 갖게 됩니다. 이때 함께 참여했던, 이미 고인이 됐던 신영일이라고 하는 열사가 들불야학의 교가 '학당가'를 지었는데요. 학당가의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너희는 새벽이다, 밝아 오른다. 너희는 새암이다 솟아 오른다. 심지에 불 댕기고 앞에 나서자. 민족의 새 아침이 밝아오는가" 아무튼 학당가에는 학생들이 지향해야 될 목표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 윤주성: 들불야학의 핵심 박기순 열사 안타깝게도 그해 크리스마스 다음 날 연탄가스로 사망했다고요?
◆ 노성태: 너무 안타까운데요. 1978년 12월 25일 박기순은 학당 학생들과 함께 교실 난로에 지필 땔감을 하기 위해 화정동에 있는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게 됩니다. 보통 그 나이 때면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겨야 되는 날이잖아요. 저녁 영어 수업을 참관한 박기순 12시가 다 될 무렵에 작은 오빠 집인 주월동 국민주택에 도착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모자 달린 티셔츠를 입은 채 잠자리를 들게 됐는데 양말도 벗지 못한 채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26일 아침 올케가 방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고 문을 열어보니까 박기순은 의식 없이 문 쪽을 향해 엎어져 있었는데 이때가 12월 26일 새벽 4시경 연탄가스로 사망한 뒤였습니다. 박기순의 나이 이제 겨우 23살이었습니다.
◇ 윤주성: 장례식 때 정말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들불야학 학생들의 아픔이 컸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78년 12월 26일 새벽에 돌아가셨고 27일에 오전 11시 하루만에 전남대병원 영안실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는데요. 들불야학 가족 40여 명을 비롯해서 가족 친지, 친구, 사회 각계 인사 2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됩니다. 소설가 황석영은 조사를 읽었는데 "기순아, 도대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읊조리면서 조사를 했고 들불야학 학생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조사를 잇게 됩니다. 민중 음악가였던 김민기 씨 아마 많은 분들이 상록수로 알고 있잖아요. 이분이 울음 섞인 장송곡 상록수를 불렀고 그리고 묻혔던 곳이 5.18 일반 묘역이었습니다.
◇ 윤주성: 소설가 황석영과는 어떤 인연이었던가요?
◆ 노성태: 황석영도 굉장히 운동권 가까이 있었던 소설가였고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연이 있었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 윤주성: 박기순 열사가 숨진 2년 뒤 윤상원 열사가 계엄군 총에 사망하고 그리고 두 분이 영혼 결혼식을 올리는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82년 2월 20일 망월동에서 윤상원,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진행됩니다. 당시 박기순은 일반 묘역에 있었고 윤상원은 민주열사 묘역에 묻혀 있었습니다.
주례는 문병란 시인이 섰는데요. 주례사는 "어느 젊은 혼령들의 결혼을 붙여라" 하는 부제가 붙은 자작시 '부활의 노래'를 낭독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됩니다. 문병란 시인의 주례사 대신 헌정한 자작시 부활의 노래 중 "그대들의 꽃다운 못다 한 사랑, 못다 한 꿈을 안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 부활의 노래로 맑은 사랑의 노래로 정녕 그대들은 다시 돌아오는구나" 여기에 나오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는 훗날 황석영이 대표 필자가 된 최초의 5.18 기록서 제목이 되기도 합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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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등의 아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들불야학 박기순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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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3-05-24 15:10:21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2SMHIWzr_bA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또 무엇일까요?
◆ 노성태: 5월만 되면 광주 시민이 읊조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인데요. 저도 오월만 되면 입속에서 계속 이 노래가 굴러다니더라고요. 그런데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마 광주 시민이면 누구나 다 한 소절 정도는 부를 것 같은데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이 누구인지 이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 박기순 열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 박기순 열사 이야기군요. 박기순 열사는 5.18 민주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의 영혼의 반려자이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박기순 열사는 1978년 광천동에서 들불야학을 시작했던 분인데 그해 12월 26일 연탄가스로 숨졌고, 들불야학에서 함께했던 윤상원은 시민군 대변인이 되어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분이시잖아요. 1982년 2월 20일 두 분의 영혼 결혼식이 망월동 묘역에서 열렸고, 영혼 결혼식이 치러진 두 달 뒤인 4월 운암동에 있는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두 분을 추모하기 위한 노래가 만들어졌는데 그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고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은 영혼 결혼식의 두 당사자이니까 윤상원과 박기순이겠지만 저는 결혼식의 꽃은 신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1차적 '임'은 박기순 열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윤주성: 그래서 박기순 열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 박기순 열사는 시골 중학교에서 명문인 전남여고에 합격한 수재라고 하던데요. 어디에서 언제 태어났는지 궁금하네요?
◆ 노성태: 박기순은 1957년 전남 보성군 노동면 죽현마을에서 3남 4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노동면 용호리 죽현마을이라고 하는 곳은 오지 중의 오지고요. 보성 읍내에서도 거의 차가 다니지 않는 이런 오지에서 태어났는데 그래서 다녔던 초등학교는 노동초등학교입니다. 그런데 노동초등학교 시절 책벌레, 공부벌레였고 6년 동안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고요. 글쓰기 대회만 열리면 각종 상은 박기순의 몫이 됐다고 합니다. 보성여중을 의탁을 했고 졸업할 때 그때 호남의 최고 명문은 전남여고였고. 시험 봐서 들어가던 시기였는데 당시 보성여중에서 전남여고를 합격하는 경우는 1년 1명, 아니면 없었다고 하는데요. 박기순이 친구 임향숙과 함께 두 명이나 합격했으니까 당시 보성여중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 윤주성: 시골 마을에서 엄청난 경사였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윤주성: 당시 명문 전남여고에 입학한 수재였는데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에 글을 남겼다고 들었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박기순이 입학한 전남여고는 1927년에 개교한 학교고요. 당시 이름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줄여서 광주여고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항일학교였습니다. '소녀회'라고 하는 단체가 주도적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지요. 그래서 교정에 무엇이 서 있느냐 하면 이 운동을 기리는 여학생 생도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박기순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참여했던 선배들 정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는 전남여고 교지 '샘'에 실렸던 "우리 얼 새긴 학생 탑에 부치노라"란 박기순의 글 속에 잘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우리 얼 새긴 학생 탑에 부치노라"라는 글은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글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런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그대의 숭고한 모습에 숙연히 머리를 숙였소. 의연한 자세로 굽어보는 그대의 그 다사로운 눈길은 항상 우리를 굳세고 참되게 자라도록 인도했소. 우리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대에게서 우리는 힘찬 긍지를 배웠소. 우리는 그대의 육중함을 좋아하고 그대의 그 무언의 교훈을 좋아한다오. 그대는 감자 탑이 아닌 진정 금자탑임에 틀림이 없소". 그대라고 하는 것은 학생기념비라고 하는 것은 금방 아실 것 같고요. 그런데 기념비가 생긴 모양이 꼭 감자 같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비하해서 감자 탑 이렇게 불렀는데 그런데 박기순의 눈에는 감자탑이 아니라 금자탑이라고 비친 것이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썼던 글인데 이때부터 탑을 봤던 관점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박기순은 금자탑에서 굳세고 참된 정신 힘찬 긍지 무언의 교훈을 체득하면서 자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윤주성: 박기순은 전남여고 학생 시절부터 운동권 선배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어떤 내용인가요?
◆ 노성태: 박기순 열사의 큰 오빠가 박화강입니다. 박화강 하면 옛날 한겨레 신문 기자로도 유명하신 분인데 이분이 큰 오빠고요. 작은 오빠 형선인데 이분은 최근에 돌아가신 민주화운동을 하셨던 분이고요. 함께 산수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자취방은 항상 작은 오빠 형선의 친구들인 광주운동권 학생들의 아지트였다고 합니다. 가장 자주 와서 진을 쳤던 분이 애청자 여러분도 잘 아시는 김남주 씨였고요. 두 번째로 많이 왔던 분이 5.18 마지막 수배자로 알려진 윤한봉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이강, 이학영, 정상용 등이 무시로 드나들었고. 그래서 그분들의 실천적인 삶 이것이 고등학생이었던 박기순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작은 오빠가 운동권에 열심히 참여하셨던 분 같네요.
◆ 노성태: 민청학련 사건으로 20년을 선고받으신 분입니다. 12년인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 윤주성: 그러면 가족들의 영향도 컸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가족뿐만 아니라 방금 이야기한 대로 작은 형, 작은 오빠 친구들의 영향 김남주 시인이라든가 아까 윤한봉 선생이라든가 이런 분들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 윤주성: 박기순 하면 사실 들불야학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들불야학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 노성태: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박기순이 진학한 것이 전남대학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였고요. 그리고 진학 후에는 사회과학 서클이었던 '루사'에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2학년 때가 1977년인데 산수동 꼬두메 마을의 노인회관을 빌려서 중학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산수중학이라는 야학을 시작했는데 야학 친구들이 월급을 더 준다니까 서울이나 부산으로 흩어지면서 8개월 만에 문을 닫았지만 2학년 때 야학을 시작했고요.
1978년 박기순 3학년 때 전남대학교 송기숙 교수 등이 중심이 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되는데 핵심 인물로 지목되었고 수배 대상에 오르게 되자 학교를 자퇴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 윤주성: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낯선 분들 많을 텐데요. 간략하게 소개해주시겠습니까?
◆ 노성태: 많은 분이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다" 이렇게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이 있었잖아요. 이것이 일제의 교육 칙어와 같은 것으로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될 목표가 될 수 없다" 이렇게 교수님들이 밝혔던 선언인 것이지요.
◇ 윤주성: 당시 어떤 지식인들의 의미 있는 선언이었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그때 전남대학교 교수님들 전부가 해직이 되었고 이에 반발해서 학생들이 최초로 70년대에 시위를 하게 된 것이 교육지표 사건 이후의 학생 시위인데 이때 박기순 열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수배에 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 윤주성: 노동운동 뒤에 시작한 것이 광천동 들불야학이군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박기순은 1978년 7월 23일 광천동의 성당을 빌려서 광천동 광천공단 일대에서 일했던 청소년 35명을 모아서 입학식을 갖게 됩니다. 이때 함께 참여했던, 이미 고인이 됐던 신영일이라고 하는 열사가 들불야학의 교가 '학당가'를 지었는데요. 학당가의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너희는 새벽이다, 밝아 오른다. 너희는 새암이다 솟아 오른다. 심지에 불 댕기고 앞에 나서자. 민족의 새 아침이 밝아오는가" 아무튼 학당가에는 학생들이 지향해야 될 목표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 윤주성: 들불야학의 핵심 박기순 열사 안타깝게도 그해 크리스마스 다음 날 연탄가스로 사망했다고요?
◆ 노성태: 너무 안타까운데요. 1978년 12월 25일 박기순은 학당 학생들과 함께 교실 난로에 지필 땔감을 하기 위해 화정동에 있는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게 됩니다. 보통 그 나이 때면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겨야 되는 날이잖아요. 저녁 영어 수업을 참관한 박기순 12시가 다 될 무렵에 작은 오빠 집인 주월동 국민주택에 도착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모자 달린 티셔츠를 입은 채 잠자리를 들게 됐는데 양말도 벗지 못한 채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26일 아침 올케가 방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고 문을 열어보니까 박기순은 의식 없이 문 쪽을 향해 엎어져 있었는데 이때가 12월 26일 새벽 4시경 연탄가스로 사망한 뒤였습니다. 박기순의 나이 이제 겨우 23살이었습니다.
◇ 윤주성: 장례식 때 정말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들불야학 학생들의 아픔이 컸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78년 12월 26일 새벽에 돌아가셨고 27일에 오전 11시 하루만에 전남대병원 영안실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는데요. 들불야학 가족 40여 명을 비롯해서 가족 친지, 친구, 사회 각계 인사 2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됩니다. 소설가 황석영은 조사를 읽었는데 "기순아, 도대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읊조리면서 조사를 했고 들불야학 학생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조사를 잇게 됩니다. 민중 음악가였던 김민기 씨 아마 많은 분들이 상록수로 알고 있잖아요. 이분이 울음 섞인 장송곡 상록수를 불렀고 그리고 묻혔던 곳이 5.18 일반 묘역이었습니다.
◇ 윤주성: 소설가 황석영과는 어떤 인연이었던가요?
◆ 노성태: 황석영도 굉장히 운동권 가까이 있었던 소설가였고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연이 있었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 윤주성: 박기순 열사가 숨진 2년 뒤 윤상원 열사가 계엄군 총에 사망하고 그리고 두 분이 영혼 결혼식을 올리는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1982년 2월 20일 망월동에서 윤상원,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 진행됩니다. 당시 박기순은 일반 묘역에 있었고 윤상원은 민주열사 묘역에 묻혀 있었습니다.
주례는 문병란 시인이 섰는데요. 주례사는 "어느 젊은 혼령들의 결혼을 붙여라" 하는 부제가 붙은 자작시 '부활의 노래'를 낭독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됩니다. 문병란 시인의 주례사 대신 헌정한 자작시 부활의 노래 중 "그대들의 꽃다운 못다 한 사랑, 못다 한 꿈을 안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 부활의 노래로 맑은 사랑의 노래로 정녕 그대들은 다시 돌아오는구나" 여기에 나오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는 훗날 황석영이 대표 필자가 된 최초의 5.18 기록서 제목이 되기도 합니다.
◇ 윤주성: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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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성 기자 y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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