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ASML이 되면 어떻게 하지?

입력 2023.05.29 (08:00) 수정 2023.05.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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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추가 움직이고 있다"

한국 경제개발 성공의 역사를 반추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경제개발 60주년 컨퍼런스>에서 KDI 이시욱 교수는 세계 통상질서 구조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움직임에는 관성이 있어서 "앞으로 3~40년 정도는 변화가 지속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 첨단에 반도체 산업 구조 변화가 있다. 그런데 불안하다.

■ 인트로 :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협력

지난해 7월, 워싱턴에서 2+2 장관급 대화를 열었다. 미·일 경제정책협의회(EPCC)다. 이 자리에서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하야시 일본 외무상은 반도체 공동개발을 발표했다. 양자 컴퓨팅과 AI 산업용 2나노 차세대 반도체 공동연구개발센터 건립을 결의했다. 산업장관들도 참석했으나 두 외교장관들이 주인공이었다. 경제 합의 같지만 외교·안보 사안이란 의미다.


·일의 협력은 착착 진행됐다. 지난해 12월에 민간 기업 간의 협약도 나왔다. 미국의 IBM과 일본 기업연합인 라피더스(일본 정부가 수천억 원을 지원한다)가 반도체 공동개발 협약을 맺었다. 바로 2나노급 반도체 국산화(일본 생산을 의미한다)를 위한 후속 조치다. 라피더스 연구자와 기술자는 미국 뉴욕주의 IBM 연구센터에서 근무하면서 기술을 "습득"한다. 일본 정부는 우리 돈 3조 원 이상을 지원한다.

일본의 반도체 굴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세계 D램 시장을 삼성, 하이닉스와 함께 3분하고 있는 미국의 마이크론도 나섰다. 일본 정부에서 2조 원 가까운 돈을 지원받고 일본에서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타이완의 TSMC는 이미 일본 쿠마모토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공장 짓는 돈의 절반 이상을 일본 정부와 소니(이미지센서), 덴소(자동차 부품)가 댔다. 일본은 이 공장에서 반도체를 '만들면 사주기로' 약속도 했다.

일본의 꿈은 반도체 부활이다. 80년대 세계 시장을 석권했지만, 미국의 견제로 주저앉았다. 두 차례 강요된 '미 ·일 반도체 협정'으로 미국 수출량과 가격에 통제를 받았고, 내수시장 강제 개방도 당했다. 플라자 합의로 통화가치가 상승하면서 국제 경쟁력도 약화 됐다. 대형 소재·부품·장비 업체는 남았지만, 반도체 완성품 경쟁력은 사라졌다. D램 시장은 이후 한국이 가져갔다. 이후 한국을 부러워만 하던 일본이 다시 한번 정부를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섰다.

중요한 건 그런 일본을 미국이 지원한다는 점이다. 과거를 살펴보면 이율배반적이다. 80년대 당시에는 '일본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잠식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본을 주저앉혔던 미국이다. 이제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뚜렷한 방향성이다. 일본 라피더스에 초미세공정 반도체 기술을 가르쳐줄 IBM의 다리오 길 수석부사장은 "미국, 유럽, 일본에서 생산능력의 균형을 맞춰 강고한 세계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대중국 견제다.

■ 대중국 견제가 왜 일본 지원?

우리도 아직 진입하지 못한 2나노 공동연구가 대중국 견제인 이유는 미국의 '불안'에 있다. 반도체 지원법 CHIPS 통과 직전인 지난해 7월, 바이든은 백악관 사우스코트 강당에서 회의를 주재한다. 이 회의에서 바이든이 한 발언을 살펴보자. 미국이 느끼는 불안의 정체가 뚜렷이 보인다.


당시 바이든은 "미국이 반도체를 만들었어요. 이젠 다시 집으로 데려올 때예요"라고 말했다. 이유는 안보다. "미국은 최첨단 반도체의 0%를 만듭니다. 타이완이 최첨단 칩의 90%를 만들어요. 중국도 앞서나갑니다. 전체 반도체 미국 점유율이 40%에서 12%로 줄 때, 중국은 2%에서 16%로 늘었습니다. 반도체 기업들이 중국, 일본, 인도, 한국, EU가 아닌 미국에 투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안보와 경제와 성장을 위해섭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첨단 칩은 시스템 반도체 제조, 파운드리 산업을 의미한다. (한국의 메모리 칩 산업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타이완에 시스템 반도체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이라도 하면 미국 경제와 안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타이완의 TSMC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게 했고, 한국의 삼성전자도 파운드리 투자를 하게 했다. 미국 우선주의 산업정책의 결과다.

문제는 모든 걸 '리쇼어링' 하기는 쉽지 않다는 데 있다. 80년대 일본 반도체를 무릎 꿇렸지만, 모든 반도체 산업 주도권이 미국으로 돌아오진 않았다. 특히 D램은 한국으로 갔다. 더 비용 효율적으로 고품질의 제품을 값싸게 만드는 능력에서 미국은 주도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미국은 오히려 한국을 지원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수많은 반도체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현금이 부족했던 미국의 D램 업체 마이크론은 삼성과 64K D램용 설계 라이센스 계약을 맺었다. 일본 경쟁자들의 공격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차원이었다. ( [칩워], 크리스 밀러 지음)

80년대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서 최대 수혜국은 한국이다. 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일본의 대안적 공급자로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자업계에 몸담았던 선배 엔지니어가 그때를 회상하면서 인상적인 말을 했다. "그 때 미국이 이상할 정도로 쉽게 기술 이전을 해주더라."
[최초의 질문], 이정동 지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일단 지정학적 위험이 있는 타이완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중국에 기술이 넘어가지 않게 막기도 해야 한다. 최선은 리쇼어링이다. 그 다음은 기술 개발 역량이 있으면서도, 지정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국가 지원이다. 일본이 그렇다.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 네덜란드 회사 ASML의 노광장비도 서둘러 구매를 주선한다.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지만, 미국의 의지가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 일본 반도체는 ASML의 길을 가는가

ASML은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일종의 붓(인쇄기라고 해도 좋다. 노광장비, 포토리소그래피)을 만드는 회사다. 이 붓 가운데 가장 가늘고 정확한 붓,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는 세계에서 ASML만 만든다. 그래서 갑보다 쎈 을이라고 불린다. 미국은 이 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어디에 팔고 팔지 말지, 누구한테 몇 대를 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실은 ASML은 미국이 키운 회사다. 일본의 경쟁기업 캐논과 니콘을 앞설 수 있게 지원했다. 작은 회사로 시작하던 1984년, 전 세계 각지에서 부품을 가져와서 조립해 시스템을 만들던 이 회사를 미국이 지원한다. 중립지대 네덜란드에 있고, 기술력도 니콘과 캐논을 대체할만해 보였다. 미국 회사들은 일본 회사보다는 네덜란드 회사에서 노광장비를 사길 원했다.

1996년, 인텔과 미국의 여러 국립 연구소가 협력해 극자외선 연구를 했다.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EUV 장비를 실제로 만들 생산회사를 물색했다. 미국에는 없었다. 그래서 ASML이라는 외국기업에 미국의 국립연구소가 만든 최신 기술을 제공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신 미국 정부는 ASML에 미국에 공장을 짓고, 미국 수요에 맞추고, 미국인을 채용하라고 요구했다. [칩워] 크리스 밀러 지음

세계 첨단 반도체 제조를 좌우하는 회사는 이렇게 뼛속까지 미국의 기획 속에서 만들어진 회사다. 미국이 제조는 못 할지 몰라도, 반도체 기술과 비전 만큼은 여전히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그렇게 반도체 산업의 판을 짜 온 미국이 이번에는 일본의 손을 들어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일본이 ASML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지?

80~90년대 반도체 업계의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일본의 부활은 기정사실로 여겨질 수도 있다. 여전히 수많은 첨단 반도체 장비를 만들고 있고, 미국이 전폭적으로 기술까지 지원하면 2027년 2나노 시스템 반도체 제조가 허상만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중간단계를 뛰어넘어 곧바로 세계 최고의 기술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어떻게 될까? 우리도 일본처럼 미국과 경제정책협의회(EPCC)를 열고 미국의 도움으로 한국 내에 최첨단 공장을 지을 수 있을까? 미국의 지정학적 위험 분산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까?

지금까지 전개만 보면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국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높을 뿐 아니라, 냉정히 보건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일본 만큼의 지위에 있지 않다. 미국은 대신 한국의 삼성전자에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구하고, '어느 나라에 얼마만큼의 반도체를 언제 공급하는지'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우리 파운드리 제조 기술을 앞서거나, 최소한 대등한 수준의 기술과 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삼성 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만으로는 성장의 한계, 기업 가치 향상에 한계를 맞은 게 아니냐는 우려를 사고 있다. 그래서 지금 파운드리에 사활을 걸고 있다. TSMC에 도전하기 위해 막대한 메모리 설비투자를 단행하면서, 동시에 파운드리 투자도 해야 한다. 한국에 지으면 훨씬 싸게 짓는 공장을 미국에 더 많은 돈을 들여 지어야 하고, 중국에 지어놓은 공장의 미래 전망은 불투명하다. 그런데 이제 일본의 추격도 신경을 써야 한다.

글로벌 질서의 중심에 있는 미국이 "거대한 역사의 추를 움직이는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미국이 시장 논리에 앞서 안보와 국익을 내세우면서, 중국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을 줄이기를 원한다. 그 구상으로 미국 중심의 반도체 전략을 짜고 있다. 다시 국가가 경제를 주도하고 지원하는 산업정책의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이번엔 일본이 그 전략의 수혜를 받을 거라는 관측, 그 속에서 우리 반도체 산업이 시험에 들 것이라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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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29 08:00:16
    • 수정2023-05-29 08:00:47
    심층K

"역사의 추가 움직이고 있다"

한국 경제개발 성공의 역사를 반추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경제개발 60주년 컨퍼런스>에서 KDI 이시욱 교수는 세계 통상질서 구조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역사의 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표현했다. 움직임에는 관성이 있어서 "앞으로 3~40년 정도는 변화가 지속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 첨단에 반도체 산업 구조 변화가 있다. 그런데 불안하다.

■ 인트로 :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협력

지난해 7월, 워싱턴에서 2+2 장관급 대화를 열었다. 미·일 경제정책협의회(EPCC)다. 이 자리에서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하야시 일본 외무상은 반도체 공동개발을 발표했다. 양자 컴퓨팅과 AI 산업용 2나노 차세대 반도체 공동연구개발센터 건립을 결의했다. 산업장관들도 참석했으나 두 외교장관들이 주인공이었다. 경제 합의 같지만 외교·안보 사안이란 의미다.


·일의 협력은 착착 진행됐다. 지난해 12월에 민간 기업 간의 협약도 나왔다. 미국의 IBM과 일본 기업연합인 라피더스(일본 정부가 수천억 원을 지원한다)가 반도체 공동개발 협약을 맺었다. 바로 2나노급 반도체 국산화(일본 생산을 의미한다)를 위한 후속 조치다. 라피더스 연구자와 기술자는 미국 뉴욕주의 IBM 연구센터에서 근무하면서 기술을 "습득"한다. 일본 정부는 우리 돈 3조 원 이상을 지원한다.

일본의 반도체 굴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세계 D램 시장을 삼성, 하이닉스와 함께 3분하고 있는 미국의 마이크론도 나섰다. 일본 정부에서 2조 원 가까운 돈을 지원받고 일본에서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보도가 나온다. 타이완의 TSMC는 이미 일본 쿠마모토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공장 짓는 돈의 절반 이상을 일본 정부와 소니(이미지센서), 덴소(자동차 부품)가 댔다. 일본은 이 공장에서 반도체를 '만들면 사주기로' 약속도 했다.

일본의 꿈은 반도체 부활이다. 80년대 세계 시장을 석권했지만, 미국의 견제로 주저앉았다. 두 차례 강요된 '미 ·일 반도체 협정'으로 미국 수출량과 가격에 통제를 받았고, 내수시장 강제 개방도 당했다. 플라자 합의로 통화가치가 상승하면서 국제 경쟁력도 약화 됐다. 대형 소재·부품·장비 업체는 남았지만, 반도체 완성품 경쟁력은 사라졌다. D램 시장은 이후 한국이 가져갔다. 이후 한국을 부러워만 하던 일본이 다시 한번 정부를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섰다.

중요한 건 그런 일본을 미국이 지원한다는 점이다. 과거를 살펴보면 이율배반적이다. 80년대 당시에는 '일본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잠식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본을 주저앉혔던 미국이다. 이제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뚜렷한 방향성이다. 일본 라피더스에 초미세공정 반도체 기술을 가르쳐줄 IBM의 다리오 길 수석부사장은 "미국, 유럽, 일본에서 생산능력의 균형을 맞춰 강고한 세계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대중국 견제다.

■ 대중국 견제가 왜 일본 지원?

우리도 아직 진입하지 못한 2나노 공동연구가 대중국 견제인 이유는 미국의 '불안'에 있다. 반도체 지원법 CHIPS 통과 직전인 지난해 7월, 바이든은 백악관 사우스코트 강당에서 회의를 주재한다. 이 회의에서 바이든이 한 발언을 살펴보자. 미국이 느끼는 불안의 정체가 뚜렷이 보인다.


당시 바이든은 "미국이 반도체를 만들었어요. 이젠 다시 집으로 데려올 때예요"라고 말했다. 이유는 안보다. "미국은 최첨단 반도체의 0%를 만듭니다. 타이완이 최첨단 칩의 90%를 만들어요. 중국도 앞서나갑니다. 전체 반도체 미국 점유율이 40%에서 12%로 줄 때, 중국은 2%에서 16%로 늘었습니다. 반도체 기업들이 중국, 일본, 인도, 한국, EU가 아닌 미국에 투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안보와 경제와 성장을 위해섭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첨단 칩은 시스템 반도체 제조, 파운드리 산업을 의미한다. (한국의 메모리 칩 산업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타이완에 시스템 반도체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 중국이 타이완을 침공이라도 하면 미국 경제와 안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타이완의 TSMC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게 했고, 한국의 삼성전자도 파운드리 투자를 하게 했다. 미국 우선주의 산업정책의 결과다.

문제는 모든 걸 '리쇼어링' 하기는 쉽지 않다는 데 있다. 80년대 일본 반도체를 무릎 꿇렸지만, 모든 반도체 산업 주도권이 미국으로 돌아오진 않았다. 특히 D램은 한국으로 갔다. 더 비용 효율적으로 고품질의 제품을 값싸게 만드는 능력에서 미국은 주도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미국은 오히려 한국을 지원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수많은 반도체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현금이 부족했던 미국의 D램 업체 마이크론은 삼성과 64K D램용 설계 라이센스 계약을 맺었다. 일본 경쟁자들의 공격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차원이었다. ( [칩워], 크리스 밀러 지음)

80년대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서 최대 수혜국은 한국이다. 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일본의 대안적 공급자로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자업계에 몸담았던 선배 엔지니어가 그때를 회상하면서 인상적인 말을 했다. "그 때 미국이 이상할 정도로 쉽게 기술 이전을 해주더라."
[최초의 질문], 이정동 지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일단 지정학적 위험이 있는 타이완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중국에 기술이 넘어가지 않게 막기도 해야 한다. 최선은 리쇼어링이다. 그 다음은 기술 개발 역량이 있으면서도, 지정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국가 지원이다. 일본이 그렇다.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 네덜란드 회사 ASML의 노광장비도 서둘러 구매를 주선한다.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지만, 미국의 의지가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 일본 반도체는 ASML의 길을 가는가

ASML은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일종의 붓(인쇄기라고 해도 좋다. 노광장비, 포토리소그래피)을 만드는 회사다. 이 붓 가운데 가장 가늘고 정확한 붓,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는 세계에서 ASML만 만든다. 그래서 갑보다 쎈 을이라고 불린다. 미국은 이 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어디에 팔고 팔지 말지, 누구한테 몇 대를 팔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실은 ASML은 미국이 키운 회사다. 일본의 경쟁기업 캐논과 니콘을 앞설 수 있게 지원했다. 작은 회사로 시작하던 1984년, 전 세계 각지에서 부품을 가져와서 조립해 시스템을 만들던 이 회사를 미국이 지원한다. 중립지대 네덜란드에 있고, 기술력도 니콘과 캐논을 대체할만해 보였다. 미국 회사들은 일본 회사보다는 네덜란드 회사에서 노광장비를 사길 원했다.

1996년, 인텔과 미국의 여러 국립 연구소가 협력해 극자외선 연구를 했다.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EUV 장비를 실제로 만들 생산회사를 물색했다. 미국에는 없었다. 그래서 ASML이라는 외국기업에 미국의 국립연구소가 만든 최신 기술을 제공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신 미국 정부는 ASML에 미국에 공장을 짓고, 미국 수요에 맞추고, 미국인을 채용하라고 요구했다. [칩워] 크리스 밀러 지음

세계 첨단 반도체 제조를 좌우하는 회사는 이렇게 뼛속까지 미국의 기획 속에서 만들어진 회사다. 미국이 제조는 못 할지 몰라도, 반도체 기술과 비전 만큼은 여전히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그렇게 반도체 산업의 판을 짜 온 미국이 이번에는 일본의 손을 들어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일본이 ASML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지?

80~90년대 반도체 업계의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일본의 부활은 기정사실로 여겨질 수도 있다. 여전히 수많은 첨단 반도체 장비를 만들고 있고, 미국이 전폭적으로 기술까지 지원하면 2027년 2나노 시스템 반도체 제조가 허상만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중간단계를 뛰어넘어 곧바로 세계 최고의 기술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어떻게 될까? 우리도 일본처럼 미국과 경제정책협의회(EPCC)를 열고 미국의 도움으로 한국 내에 최첨단 공장을 지을 수 있을까? 미국의 지정학적 위험 분산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까?

지금까지 전개만 보면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국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높을 뿐 아니라, 냉정히 보건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일본 만큼의 지위에 있지 않다. 미국은 대신 한국의 삼성전자에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구하고, '어느 나라에 얼마만큼의 반도체를 언제 공급하는지'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우리 파운드리 제조 기술을 앞서거나, 최소한 대등한 수준의 기술과 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삼성 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만으로는 성장의 한계, 기업 가치 향상에 한계를 맞은 게 아니냐는 우려를 사고 있다. 그래서 지금 파운드리에 사활을 걸고 있다. TSMC에 도전하기 위해 막대한 메모리 설비투자를 단행하면서, 동시에 파운드리 투자도 해야 한다. 한국에 지으면 훨씬 싸게 짓는 공장을 미국에 더 많은 돈을 들여 지어야 하고, 중국에 지어놓은 공장의 미래 전망은 불투명하다. 그런데 이제 일본의 추격도 신경을 써야 한다.

글로벌 질서의 중심에 있는 미국이 "거대한 역사의 추를 움직이는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미국이 시장 논리에 앞서 안보와 국익을 내세우면서, 중국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을 줄이기를 원한다. 그 구상으로 미국 중심의 반도체 전략을 짜고 있다. 다시 국가가 경제를 주도하고 지원하는 산업정책의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이번엔 일본이 그 전략의 수혜를 받을 거라는 관측, 그 속에서 우리 반도체 산업이 시험에 들 것이라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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