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세사기 ‘피해 예정자’ 입니다” [주말엔]

입력 2023.06.03 (06:00) 수정 2023.06.03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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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특별법 시행 첫날이었던 지난 1일. 피해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전세사기 피해지원 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그제 하루 동안 피해 인정을 신청한 임차인은 전국적으로 795명에 달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특별법이 제정됐고,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대책도 속속 마련되고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터진 전세사기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도 속도를 내는 모양샙니다.

그러나 정부의 전세사기 대책에서도, 수사기관의 피해 지원에서도 완전히 배제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계약기간이 남은 임차인들입니다.

■"계약기간 남았다는 이유로…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지난해 1월 경기 동탄신도시에 전셋집을 마련한 20대 임차인 A 씨.

취재진을 만난 A 씨는 자신을 "전세사기 피해 예정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지난 4월 '동탄 부부 전세사기' 사건이 터진 뒤, 집주인이 돌연 잠적했기 때문입니다.

"직장 때문에 동탄에 집을 급하게 구해야 했어요. 돈이 별로 없으니까 대출 한도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이 보증금 6천만 원짜리더라고요. 계약하고 한 달 만에 집주인이 바뀌었더라고요. 작년까지는 연락이 잘 됐어요. 올해 갑자기 집주인 전화가 착신 거부가 되는 거예요. 그때 마침 동탄에 전세사기가 많이 유행하고 있어 가지고..."
- A 씨

불안해진 A 씨는 곧장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화성동탄경찰서에 '전세사기 특별팀'이 꾸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집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상황을 설명했고, 경찰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A 씨가 들은 대답은 "의심이 될 만한 상황은 맞지만, 계약기간이 남아서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뿐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전세 피해 지원센터에도 연락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습니다.

"피해 지원센터에도 연락을 해보니까 저는 아직 피해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저는 예정된 피해자인데, 지금 당장 피해자가 아니라고 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는 게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 A 씨

■"지금 고소하면 무고"

동탄 전셋집에 살고 있는 30대 직장인 B 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 4월 이후 집주인이 연락을 받지 않아 경찰서를 찾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듣고 발을 돌려야 했습니다.

"전세금 8천5백만 원에 계약했어요. 올해 초 전세사기가 전국적으로 터졌잖아요. 그 뒤로 집주인한테 연락을 해봤는데 안 되는 상황이고. 경찰서를 갔는데 계약기간이 7~8개월 남았을 때라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고소했다가 역으로 무고죄로 제가 처벌받을 수도 있다고 했고요."
- B 씨

■ '피해 예정자'는 발만 동동

A 씨와 B 씨가 계약한 임대인은 30대 이 모 씨.

이 씨는 이미 계약이 만료된 임차인 6명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수사 의뢰를 한 국토교통부는 이 씨가 '무자본 갭투자'로 보유 오피스텔을 늘려나간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A 씨와 B 씨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상황인 겁니다.

A 씨가 자신을 '피해 예정자'라고 소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취재진을 만난 자리에서 A 씨는 "피해 예정자를 위한 대책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제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갈 텐데. 피해 예정자라고 해서 피해자가 아닌 게 아니잖아요."
- A 씨

KBS가 파악한 임대인 이 모 씨가 소유 오피스텔은 총 107채였습니다.

경찰이 집계한 피해 규모는 아직 6억여 원이지만, A 씨처럼 아직 계약 기간이 남은 임차인들이 있는 만큼 피해 규모는 앞으로 100억 원대로 늘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스스로를 '피해 예정자'라고 칭하는 상황. 이들을 위한 대책도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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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전세사기 ‘피해 예정자’ 입니다” [주말엔]
    • 입력 2023-06-03 06:00:02
    • 수정2023-06-03 07:23:21
    주말엔

전세사기 특별법 시행 첫날이었던 지난 1일. 피해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전세사기 피해지원 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그제 하루 동안 피해 인정을 신청한 임차인은 전국적으로 795명에 달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특별법이 제정됐고,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대책도 속속 마련되고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터진 전세사기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도 속도를 내는 모양샙니다.

그러나 정부의 전세사기 대책에서도, 수사기관의 피해 지원에서도 완전히 배제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계약기간이 남은 임차인들입니다.

■"계약기간 남았다는 이유로…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지난해 1월 경기 동탄신도시에 전셋집을 마련한 20대 임차인 A 씨.

취재진을 만난 A 씨는 자신을 "전세사기 피해 예정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지난 4월 '동탄 부부 전세사기' 사건이 터진 뒤, 집주인이 돌연 잠적했기 때문입니다.

"직장 때문에 동탄에 집을 급하게 구해야 했어요. 돈이 별로 없으니까 대출 한도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이 보증금 6천만 원짜리더라고요. 계약하고 한 달 만에 집주인이 바뀌었더라고요. 작년까지는 연락이 잘 됐어요. 올해 갑자기 집주인 전화가 착신 거부가 되는 거예요. 그때 마침 동탄에 전세사기가 많이 유행하고 있어 가지고..."
- A 씨

불안해진 A 씨는 곧장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화성동탄경찰서에 '전세사기 특별팀'이 꾸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집주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상황을 설명했고, 경찰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A 씨가 들은 대답은 "의심이 될 만한 상황은 맞지만, 계약기간이 남아서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뿐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전세 피해 지원센터에도 연락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습니다.

"피해 지원센터에도 연락을 해보니까 저는 아직 피해가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저는 예정된 피해자인데, 지금 당장 피해자가 아니라고 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는 게 참 당황스러웠습니다."
- A 씨

■"지금 고소하면 무고"

동탄 전셋집에 살고 있는 30대 직장인 B 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 4월 이후 집주인이 연락을 받지 않아 경찰서를 찾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듣고 발을 돌려야 했습니다.

"전세금 8천5백만 원에 계약했어요. 올해 초 전세사기가 전국적으로 터졌잖아요. 그 뒤로 집주인한테 연락을 해봤는데 안 되는 상황이고. 경찰서를 갔는데 계약기간이 7~8개월 남았을 때라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고소했다가 역으로 무고죄로 제가 처벌받을 수도 있다고 했고요."
- B 씨

■ '피해 예정자'는 발만 동동

A 씨와 B 씨가 계약한 임대인은 30대 이 모 씨.

이 씨는 이미 계약이 만료된 임차인 6명에게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수사 의뢰를 한 국토교통부는 이 씨가 '무자본 갭투자'로 보유 오피스텔을 늘려나간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A 씨와 B 씨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큰 상황인 겁니다.

A 씨가 자신을 '피해 예정자'라고 소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취재진을 만난 자리에서 A 씨는 "피해 예정자를 위한 대책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좋겠어요. 매뉴얼이라도 있으면 제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갈 텐데. 피해 예정자라고 해서 피해자가 아닌 게 아니잖아요."
- A 씨

KBS가 파악한 임대인 이 모 씨가 소유 오피스텔은 총 107채였습니다.

경찰이 집계한 피해 규모는 아직 6억여 원이지만, A 씨처럼 아직 계약 기간이 남은 임차인들이 있는 만큼 피해 규모는 앞으로 100억 원대로 늘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스스로를 '피해 예정자'라고 칭하는 상황. 이들을 위한 대책도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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