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이 한국에 왔다고?

입력 2023.06.05 (10:00) 수정 2023.06.05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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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넬로 다 메시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1475년경, 목판에 유화, 45.7×36.2cm, 런던 내셔널갤러리안토넬로 다 메시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1475년경, 목판에 유화, 45.7×36.2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여기, 붉은 옷을 입은 성직자가 가만히 앉아 책 읽기에 빠져 있습니다. 주인공은 4세기의 학자이자 수도사였던 성(聖)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 420년). 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옮긴 '불가타 성경'으로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죠. 이름 앞에 성(聖)이 붙은 데서 보듯 가톨릭 교회의 성인(聖人)으로 추대된 중요한 인물입니다.

단단해 보이는 대리석 실내가 그림의 액자 같은 역할을 하며 서재에 앉아 있는 주인공에게 시선을 집중하도록 해줍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충실하게 구현한 실내 공간의 건축 구조는 물론 곳곳에 놓여 있는 갖가지 물건들의 묘사가 세밀하기 이를 데 없죠. 화면 오른쪽 그늘 안에서 어슬렁거리는 동물은 사자인데요. 성 히에로니무스가 사자의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준 뒤 사자가 이 성인을 따랐다는 전설을 담았다고 하는군요.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이 작품은 15세기 초반 르네상스 회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ina )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조반니 벨리니와 함께 초기 르네상스 미술을 절정에 올려놓은 당대 최고의 거장으로 불리죠. 세로 46, 가로 36.6cm로 아담한 그림이지만, 르네상스 미술의 '위대함'을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조반니 벨리니 〈성모자〉, 1480~90년경, 목판에 유화와 템페라, 90.8×64.8cm, 런던 내셔널갤러리조반니 벨리니 〈성모자〉, 1480~90년경, 목판에 유화와 템페라, 90.8×64.8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안토넬로 다 메시나와 함께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그림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겨봅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베네치아 화파를 창시한 베네치아 회화의 선구자입니다. 아버지 야코포 벨리니와 형 젠틸레 벨리니까지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명망 있는 화가 가문에서도 가장 뛰어난 화가였죠.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모자>는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성모가 손가락 사이에 쥐고 내려다보는, 아기 예수의 손이 닿아 있는 둥근 형상은 '석류'라고 합니다. 석류는 인류를 구원하려고 죽음을 맞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을 예감한 듯 성모와 아기 예수의 표정은 무겁습니다. 자연스럽게 이 그림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의 마음에는 경건함이 깃들었을 테고요.

그림 아래 난간에 붙은 종이에 화가의 이름이 보입니다.

라파엘로 〈성모자와 세례 요한〉, 1510-11년경, 목판에 유화, 38.9×32.9cm, 런던 내셔널갤러리라파엘로 〈성모자와 세례 요한〉, 1510-11년경, 목판에 유화, 38.9×32.9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위 그림과 달리 성모와 아기 예수, 세례 요한의 표정에 온화함과 다정함이 넘쳐 흐릅니다. 물론 이 그림에서도 위에서 본 '석류'와 같은 상징물이 등장하죠. 십자가를 든 아기 세례 요한이 아기 예수에게 건네는 꽃은 '카네이션'입니다. 카네이션 역시 아기 예수가 훗날 자라서 겪게 될 수난과 부활, 신성한 사랑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라파엘로(Raphael, 1483~1520)의 작품입니다. 시각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로 인물을 배치해 보는 이에게 한없는 평온함을 느끼게 하죠. 깊은 성스러움과 인간다움을 절묘하게 녹여낼 줄 알았던 대가의 솜씨에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 위대한 화가의 업적을 직접 목격하고 글로 남긴 이가 있었으니, 그 자신도 뛰어난 예술가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입니다. 바사리 역시 르네상스 미술의 현장 곳곳에 자기 이름을 새겼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를 정리한 <미술가평전>입니다. 미술 비평의 출발점으로 평가될 만큼 중요한 저작으로, 오늘날 르네상스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럼 르네상스인 바사리가 라파엘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볼까요?

사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그림이라고 말한다면 라파엘로의 것은 진실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육신이 정말 움직이는 것 같고 숨 쉬고 맥동하며 살아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중략) 라파엘로는 인물들의 표정을 매우 뛰어나고 아름답게 창조했다. 그 인물들의 자세가 다양하고 독창적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는 라파엘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독창적이라고 했다.

내가 라파엘로 생애의 끝 대목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 유명한 화가의 근면과 노력과 연구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가 재치와 천재성의 도움으로 과오를 어떻게 잘 피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다른 화가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자기가 타고난 자질에 만족하고 열심히 노력해야지, 자기에게 천부의 재주가 없는데도 불필요한 일에 집착하여 남을 이기려고 공연히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가평전〉(한길사, 2018)

산드로 보티첼리 〈성 제노비오의 세 가지 기적〉, 1500년경, 목판에 템페라, 64.8×139.7cm, 런던 내셔널갤러리산드로 보티첼리 〈성 제노비오의 세 가지 기적〉, 1500년경, 목판에 템페라, 64.8×139.7cm, 런던 내셔널갤러리

한 번쯤 안 본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그림 <비너스의 탄생> 기억하시나요? 15세기 중후반 피렌체를 대표하는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는 훗날 피렌체의 수호성인이 된 5세기 피렌체의 초대 주교 제노비오의 삶을 네 점 연작으로 그립니다. 우리로 따지면 한 인물의 일생에서 중요한 몇 장면을 추려 그린 <평생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작품은 4점 연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성 제노비오가 보여준 세 가지 기적을 한 화면에 담아 보여줍니다. 왼쪽은 어머니를 때렸다는 이유로 마귀 들리는 저주를 받은 두 아들을 치유하는 장면. 아들들의 입에서 작은 악마가 나오는 것을 본 어머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가운데는 죽은 아들을 안고 절규하는 엄마를 위해 그 아들을 다시 살려내는 모습. 오른쪽은 교회 계단에 앉아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는 장면입니다.

가로로 140cm나 되는 꽤 큰 작품이어서, 연작 넉 점을 한꺼번에 걸면 수호성인의 거룩한 생애를 돌아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좌)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아폴로와 다프네〉 (우)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공방 〈소녀〉(좌)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아폴로와 다프네〉 (우)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공방 〈소녀〉

왼쪽은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Piero del Pollaiuolo)의 <아폴로와 다프네>, 오른쪽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공방에서 제작한 <소녀>입니다. 폴라이우올로와 기를란다요 모두 당대 피렌체를 대표하는 화가였습니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 아폴로, 반대로 납 화살에 맞아 아폴로를 거부하게 된 다프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이 비극적인 짝사랑의 결과는 아폴로에게 사로잡힌 순간, 다프네가 월계수 나무로 변하면서 끝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으로 막을 내리죠. 다프네의 두 팔이 이미 월계수로 변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특히 초상화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기를란다요의 작품이란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연구자들은 그의 공방에 속해 있던 화가가 그렸을 가능성을 더 크게 본다고 합니다. 옷과 목걸이와 머리 장식의 붉은 색이 '깔맞춤'하듯 조응하는 가운데,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소녀의 단정하고 고운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흘러내린 머리칼의 표현이 섬세하기 이를 데 없죠. 바사리는 <미술가평전>에서 이렇게 평했습니다.

"확실히 도메니코는 모든 점에서, 특히 유명한 인사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생애를 경주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세계 최고 미술관의 하나로 손꼽히는 영국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명화 가운데 52점이 국내에서 최초로 전시를 통해 공개됩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화가들의 명작이 즐비하지만,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은 국내에서는 볼 기회가 없었죠.

내셔널갤러리가 보내온 명화 52점 가운데 르네상스 회화는 12점입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산드로 보티첼리, 조반니 벨리니, 라파엘로,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코레조, 티치아노, 틴토레토… 실로 쟁쟁한 이름들입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신과 종교의 영역에서 인간과 현실 세계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향한 화가들의 관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초상화죠. 르네상스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장의 후반부를 초상화가 장식한 이유입니다.

티치아노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1510-12년경, 캔버스에 유화, 119.4×96.5cm, 런던 내셔널갤러리티치아노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1510-12년경, 캔버스에 유화, 119.4×96.5cm, 런던 내셔널갤러리

티치아노가 20대 초반에 그린 이 작품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구도를 보여줍니다. 초상화 속 주인공의 옆모습처럼 보이는 대리석 난간 너머에서 후덕한 여인이 한 손을 난간에 올린 채 서 있죠. 화면 왼쪽 위 모서리부터 여인의 얼굴 - 손 - 대리석 측면상으로 이어지는 선이 정확하게 화면을 가로지르는 대각선 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당한 여인에게 대리석 부조로 상징되는 위엄과 권위를 부여한 것이죠. 초상화 주인공의 표정은 그 정점입니다.

(좌)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 〈여인(붉은 옷을 입은 여인〉 (우) 야코포 틴토레토 〈빈첸초 모로시니〉(좌)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 〈여인(붉은 옷을 입은 여인〉 (우) 야코포 틴토레토 〈빈첸초 모로시니〉

조선 시대 초상화의 주인공이 왕과 공신 등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인물들이었듯, 중세의 유럽에서도 이런 번듯한 초상화를 주문해서 소유할 수 있었던 건 사회의 상류층을 이룬 귀족들이었습니다. 똑같이 왼쪽으로 몸을 틀어 얼굴의 오른쪽을 보여주는 두 초상화의 주인공 역시 상당히 지체 높은 가문의 귀족이었습니다. 옷차림새만 봐도 분명히 알 수 있죠.

왼쪽 초상화를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Giovanni Battista Moroni)는 16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그 시대에 명망 있는 백작 가문의 부인으로, 반짝이는 드레스의 표현만 봐도 화가가 유채 물감의 사용에 얼마나 능했는지 알 수 있죠.

오른쪽 초상화를 그린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역시 베네치아의 뛰어난 화가로 당대에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림 제목이 보여주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당시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었다고 합니다. 왼쪽 그림과 달리 활달하고 빠른 붓질로 모델의 특징을 잘 잡아냈죠. 이렇게 두 그림의 세세한 특징을 비교하면 그림 감상이 더 흥미로워집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은 말로만 듣던, 교과서와 미술책에서만 보던 르네상스 미술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지금이야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전 세계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된 명화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림은 모름지기 직접 대면해야 제대로 된 감상이 가능한 법이죠.

■전시 정보
제목: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
기간: 2023년 10월 9일(월)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작품: 카라바조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등 5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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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이 한국에 왔다고?
    • 입력 2023-06-05 10:00:51
    • 수정2023-06-05 10: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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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넬로 다 메시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1475년경, 목판에 유화, 45.7×36.2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여기, 붉은 옷을 입은 성직자가 가만히 앉아 책 읽기에 빠져 있습니다. 주인공은 4세기의 학자이자 수도사였던 성(聖)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 420년). 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옮긴 '불가타 성경'으로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죠. 이름 앞에 성(聖)이 붙은 데서 보듯 가톨릭 교회의 성인(聖人)으로 추대된 중요한 인물입니다.

단단해 보이는 대리석 실내가 그림의 액자 같은 역할을 하며 서재에 앉아 있는 주인공에게 시선을 집중하도록 해줍니다. 원근법과 명암법을 충실하게 구현한 실내 공간의 건축 구조는 물론 곳곳에 놓여 있는 갖가지 물건들의 묘사가 세밀하기 이를 데 없죠. 화면 오른쪽 그늘 안에서 어슬렁거리는 동물은 사자인데요. 성 히에로니무스가 사자의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준 뒤 사자가 이 성인을 따랐다는 전설을 담았다고 하는군요.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이 작품은 15세기 초반 르네상스 회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ina )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조반니 벨리니와 함께 초기 르네상스 미술을 절정에 올려놓은 당대 최고의 거장으로 불리죠. 세로 46, 가로 36.6cm로 아담한 그림이지만, 르네상스 미술의 '위대함'을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조반니 벨리니 〈성모자〉, 1480~90년경, 목판에 유화와 템페라, 90.8×64.8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안토넬로 다 메시나와 함께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의 그림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겨봅니다. 조반니 벨리니는 베네치아 화파를 창시한 베네치아 회화의 선구자입니다. 아버지 야코포 벨리니와 형 젠틸레 벨리니까지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명망 있는 화가 가문에서도 가장 뛰어난 화가였죠.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모자>는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성모가 손가락 사이에 쥐고 내려다보는, 아기 예수의 손이 닿아 있는 둥근 형상은 '석류'라고 합니다. 석류는 인류를 구원하려고 죽음을 맞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을 예감한 듯 성모와 아기 예수의 표정은 무겁습니다. 자연스럽게 이 그림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의 마음에는 경건함이 깃들었을 테고요.

그림 아래 난간에 붙은 종이에 화가의 이름이 보입니다.

라파엘로 〈성모자와 세례 요한〉, 1510-11년경, 목판에 유화, 38.9×32.9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위 그림과 달리 성모와 아기 예수, 세례 요한의 표정에 온화함과 다정함이 넘쳐 흐릅니다. 물론 이 그림에서도 위에서 본 '석류'와 같은 상징물이 등장하죠. 십자가를 든 아기 세례 요한이 아기 예수에게 건네는 꽃은 '카네이션'입니다. 카네이션 역시 아기 예수가 훗날 자라서 겪게 될 수난과 부활, 신성한 사랑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3대 거장으로 불리는 라파엘로(Raphael, 1483~1520)의 작품입니다. 시각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로 인물을 배치해 보는 이에게 한없는 평온함을 느끼게 하죠. 깊은 성스러움과 인간다움을 절묘하게 녹여낼 줄 알았던 대가의 솜씨에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 위대한 화가의 업적을 직접 목격하고 글로 남긴 이가 있었으니, 그 자신도 뛰어난 예술가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입니다. 바사리 역시 르네상스 미술의 현장 곳곳에 자기 이름을 새겼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를 정리한 <미술가평전>입니다. 미술 비평의 출발점으로 평가될 만큼 중요한 저작으로, 오늘날 르네상스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럼 르네상스인 바사리가 라파엘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볼까요?

사실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그림이라고 말한다면 라파엘로의 것은 진실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은 육신이 정말 움직이는 것 같고 숨 쉬고 맥동하며 살아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중략) 라파엘로는 인물들의 표정을 매우 뛰어나고 아름답게 창조했다. 그 인물들의 자세가 다양하고 독창적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는 라파엘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독창적이라고 했다.

내가 라파엘로 생애의 끝 대목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 유명한 화가의 근면과 노력과 연구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가 재치와 천재성의 도움으로 과오를 어떻게 잘 피했는지를 알게 함으로써 다른 화가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자기가 타고난 자질에 만족하고 열심히 노력해야지, 자기에게 천부의 재주가 없는데도 불필요한 일에 집착하여 남을 이기려고 공연히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가평전〉(한길사, 2018)

산드로 보티첼리 〈성 제노비오의 세 가지 기적〉, 1500년경, 목판에 템페라, 64.8×139.7cm, 런던 내셔널갤러리
한 번쯤 안 본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그림 <비너스의 탄생> 기억하시나요? 15세기 중후반 피렌체를 대표하는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는 훗날 피렌체의 수호성인이 된 5세기 피렌체의 초대 주교 제노비오의 삶을 네 점 연작으로 그립니다. 우리로 따지면 한 인물의 일생에서 중요한 몇 장면을 추려 그린 <평생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작품은 4점 연작 가운데 두 번째 작품으로, 성 제노비오가 보여준 세 가지 기적을 한 화면에 담아 보여줍니다. 왼쪽은 어머니를 때렸다는 이유로 마귀 들리는 저주를 받은 두 아들을 치유하는 장면. 아들들의 입에서 작은 악마가 나오는 것을 본 어머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가운데는 죽은 아들을 안고 절규하는 엄마를 위해 그 아들을 다시 살려내는 모습. 오른쪽은 교회 계단에 앉아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는 장면입니다.

가로로 140cm나 되는 꽤 큰 작품이어서, 연작 넉 점을 한꺼번에 걸면 수호성인의 거룩한 생애를 돌아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좌)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아폴로와 다프네〉 (우)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공방 〈소녀〉
왼쪽은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Piero del Pollaiuolo)의 <아폴로와 다프네>, 오른쪽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공방에서 제작한 <소녀>입니다. 폴라이우올로와 기를란다요 모두 당대 피렌체를 대표하는 화가였습니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 아폴로, 반대로 납 화살에 맞아 아폴로를 거부하게 된 다프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이 비극적인 짝사랑의 결과는 아폴로에게 사로잡힌 순간, 다프네가 월계수 나무로 변하면서 끝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으로 막을 내리죠. 다프네의 두 팔이 이미 월계수로 변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특히 초상화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기를란다요의 작품이란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연구자들은 그의 공방에 속해 있던 화가가 그렸을 가능성을 더 크게 본다고 합니다. 옷과 목걸이와 머리 장식의 붉은 색이 '깔맞춤'하듯 조응하는 가운데,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소녀의 단정하고 고운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흘러내린 머리칼의 표현이 섬세하기 이를 데 없죠. 바사리는 <미술가평전>에서 이렇게 평했습니다.

"확실히 도메니코는 모든 점에서, 특히 유명한 인사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생애를 경주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세계 최고 미술관의 하나로 손꼽히는 영국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명화 가운데 52점이 국내에서 최초로 전시를 통해 공개됩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화가들의 명작이 즐비하지만,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은 국내에서는 볼 기회가 없었죠.

내셔널갤러리가 보내온 명화 52점 가운데 르네상스 회화는 12점입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산드로 보티첼리, 조반니 벨리니, 라파엘로,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코레조, 티치아노, 틴토레토… 실로 쟁쟁한 이름들입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신과 종교의 영역에서 인간과 현실 세계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향한 화가들의 관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초상화죠. 르네상스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장의 후반부를 초상화가 장식한 이유입니다.

티치아노 〈여인(달마티아의 여인)〉, 1510-12년경, 캔버스에 유화, 119.4×96.5cm, 런던 내셔널갤러리
티치아노가 20대 초반에 그린 이 작품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구도를 보여줍니다. 초상화 속 주인공의 옆모습처럼 보이는 대리석 난간 너머에서 후덕한 여인이 한 손을 난간에 올린 채 서 있죠. 화면 왼쪽 위 모서리부터 여인의 얼굴 - 손 - 대리석 측면상으로 이어지는 선이 정확하게 화면을 가로지르는 대각선 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당한 여인에게 대리석 부조로 상징되는 위엄과 권위를 부여한 것이죠. 초상화 주인공의 표정은 그 정점입니다.

(좌)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 〈여인(붉은 옷을 입은 여인〉 (우) 야코포 틴토레토 〈빈첸초 모로시니〉
조선 시대 초상화의 주인공이 왕과 공신 등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인물들이었듯, 중세의 유럽에서도 이런 번듯한 초상화를 주문해서 소유할 수 있었던 건 사회의 상류층을 이룬 귀족들이었습니다. 똑같이 왼쪽으로 몸을 틀어 얼굴의 오른쪽을 보여주는 두 초상화의 주인공 역시 상당히 지체 높은 가문의 귀족이었습니다. 옷차림새만 봐도 분명히 알 수 있죠.

왼쪽 초상화를 그린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Giovanni Battista Moroni)는 16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그 시대에 명망 있는 백작 가문의 부인으로, 반짝이는 드레스의 표현만 봐도 화가가 유채 물감의 사용에 얼마나 능했는지 알 수 있죠.

오른쪽 초상화를 그린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역시 베네치아의 뛰어난 화가로 당대에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림 제목이 보여주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당시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었다고 합니다. 왼쪽 그림과 달리 활달하고 빠른 붓질로 모델의 특징을 잘 잡아냈죠. 이렇게 두 그림의 세세한 특징을 비교하면 그림 감상이 더 흥미로워집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은 말로만 듣던, 교과서와 미술책에서만 보던 르네상스 미술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지금이야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전 세계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에 소장된 명화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림은 모름지기 직접 대면해야 제대로 된 감상이 가능한 법이죠.

■전시 정보
제목: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
기간: 2023년 10월 9일(월)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작품: 카라바조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등 5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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