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5·18] 총 들었던 5.18 시민군 채영선씨, 오케스트라 단장 된 사연은?

입력 2023.06.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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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3년 특별기획 KBS 다큐인사이트 ‘1980, 로숑과 쇼벨’ 방송화면 갈무리-5·18 43년 특별기획 KBS 다큐인사이트 ‘1980, 로숑과 쇼벨’ 방송화면 갈무리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 복학생이던 채영선 씨. 연행된 뒤 버스 안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청년이 바로 채 씨입니다. 민주화 시위에 참여해 시민군으로 5월 27일 '새벽'을 맞았습니다.

'우리가 비록 진압당할지라도 저항했던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광주가 너무 초라해지지 않느냐' 이런 생각으로 도청에 들어간 거죠.

우리를 지휘한 사람이 유영선, 문근영 작은 외할아버지인가 그래요. 그 사람이 '자기는 장교 출신이고 스물아홉 살 먹었다. 나는 오늘 여기서 죽겠다.' 그런 말을 하더만.

1980년 당시를 재현한 상무대 영창에서 인터뷰하는 채영선 씨1980년 당시를 재현한 상무대 영창에서 인터뷰하는 채영선 씨

광주시청 공무원으로 퇴직한 채 씨는 현재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5·18 정신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채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 」취재진이 만났습니다.

■"운이 좋았다"

취재진이 채 씨를 만난 곳은 1980년 5월 당시 상무대 영창을 재현해 놓은 5·18자유공원입니다. 당시 상무대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분소가 시위 진압의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진압 후에는 지도부와 시민군 등을 체포해 영창에 가두고 고문 수사를 했습니다.

채 씨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체포된 후 상무대로 끌려갔습니다.

(5월27일 체포 직후)계엄군이 도로 골목에서 한 명씩 데리고 물어보는데 앞에서 '군대를 안 갔다 왔다'고 하니까 '이 새끼,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데모했다'면서 두들겨 패요. 나는 전투경찰로 복무하고 전역한 뒤였으니까 '갔다 왔습니다.' 했어요. 그런데 군인 눈이 갑자기 뒤집히더니 '군대 갔다 온 놈이었어' 하면서 두들겨 패다가 자기 흥분에 못 이겨서 대검을 뽑아서 내 머리를 잡아서 찍으려고 했어요.

그때 우리를 처음 진압했던 장교가 '차렷' 하면서 그것을 막아주더라고요.

체포될 때 주머니에 칼빈 소총 총알이 3개 있었고 수습위원 띠도 있었는데, 손이 이미 뒤로 묶여서 감출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장교가 내 주머니에서 빼가지고 자기 주머니에 넣어서 감추더라고요.

채 씨는 상무대 영창에 끌려간 뒤 대학생이어서 일반 줄에서 따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때도 한 대령이 "그럴 필요 없다"면서 일반 줄로 다시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실제 분류 심사에서 만난 첫 경찰은 같이 체포된 후배의 당숙이었습니다. "총을 들지 않았고 26일에 들어가 멋모르고 있다가 못 빠져나왔다"고 말하라고 해 심사를 맡은 담당자에게 그렇게 들은 대로 진술했습니다.

당시 전남대학교 복학생에 총을 든 시민군으로 '수습위원' 띠를 가지고 있다가 5월 27일 마지막 진압 시 체포됐다면 이른바 A급입니다. ×가 2개 표시돼 악명높은 505보안대로 끌려갔을 겁니다.

*505보안대 :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이던 보안사령부의 광주지구 직속부대입니다. 옛 505 보안대는 고문이 자행되기도 했던 국가 폭력의 현장입니다. 현재는 5·18역사공원으로 조성돼 있습니다. 위치 :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대로956번길 16 (쌍촌동)

■항쟁이 시작된 전남대 앞에 있었던 채영선

1957년생인 채 씨는 5·18 당시 군 복무를 마치고 막 복학한 대학생이었습니다. 계엄령 확대로 5월 18일 휴교령 소식에 친구와 함께 아침 일찍 학교(전남대)로 가 책과 짐을 꺼내서 나옵니다.


당시 전남대 학생들은 계엄이 확대되면 18일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 전에 이미 일부 학생들과 군인들이 대치하며 여러 차례 충돌이 빚어졌다고 합니다. 채 씨도 정문 근처에서 계엄군과 마주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일단 도망쳤습니다. 그는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이 시위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조선대 앞에서도 학생들이 계엄군에 구타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조대(조선대)생들 두들겨 맞는 것을 봤어요. 누군가 한 사람이 큰 배낭을 메고 나오는 거예요. 휴교하니까 지리산 놀러 가려고 짐을 싸서 나왔다는데 계엄군이 무지하게 패 버려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렇게 놀러 다니냐' 아무 이유 없이 패는 거죠. 나는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도와줄 수도 없고, 일부러 천천히 걸었어요. 어른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그런데 학생 한 명이 도망 오다가 잡혔어요. 그 학생의 눈빛이 기억나요. 제일 처음 맞을 때는 저항하지 않고 그냥 있었는데, 나중에 도저히 저항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맞게 되니까 '이렇게 때릴 줄 알았으면 아까 저항이라도 할 걸' 하는 그런 눈빛으로 쓰러졌어요. 그걸 보고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민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운 5월 21일

채 씨는 5월 20일 밤중에 광주역 근처에서 총소리를 들었고, 다음 날인 21일엔 일찍부터 시내 금남로에 나갔습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을 목격하며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날 오후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습니다. 그는 발포 전에 몸을 건물 쪽으로 숨긴 덕에 화를 면했습니다.

지금 전일빌딩 주차장으로 돼 있는 곳에 옛날에 작은 골목이 있었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돌 던지고 하니까 계엄군이 나와서는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한 명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했어요. 그 애는 별로 데모할 생각도 없이 슬리퍼 신고 나온 것 같았는데...

너무 엄청난 걸 봐버렸어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총 맞아 죽어가는 거,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설사 자기(계엄군)들이 위기 의식에서 총을 쏘더라도 땅에다 쏴야 할 거 아니에요? 아니면 공중에다 쏜다든가. 그런데 정면 발포했으니까...

■시민군에 합류한 채영선

계엄군이 퇴각한 이후 시위대와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했고, 광주 도심은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5월 21일 집단 발포 이후 참상을 목격한 채영선 씨는 며칠을 고심한 끝에 결국 시민군으로 합류했습니다.

집에 있는데 잠이 안 오는 거죠. 내가 인간으로서 나의 품위를 지키는 게 어떤 방법인가 생각하고 도청에 들어간 거죠. 25일이었는데 좀 늦게 들어갔죠, 사실은.

25일 저녁, 내가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열여덟 명을 주면서 그 사람들을 맡는 분대장을 하라고 그랬거든요, 도청 2층에서 광장을 보면서 지키라고. 우리끼리 분대장은 자존심 상한다고 소대장이라고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5소대장.

■YWCA에서 맞은 최후 항전

5월 26일 저녁, 18명이던 채영선의 5소대 인원은 단 두 명만 남았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아들을 찾기 위해 도청 쪽에 온 것을 봤지만 모른 척했습니다.

5월 26일 밤, 전남도청. 마지막을 각오한 시민군은 2백 명 남짓. 계엄군이 온다는 소식에 새벽 시간 비상이 걸렸고 3개 조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YWCA·전일빌딩·수협에 각각 배치됐습니다. 채 씨는 YWCA로 갔습니다.

26일 저녁 되니까 (5소대)18명 중에서 16명이 빠져나가고, '홍 장군'이라고 조선대 의예과 학생 한 명만 내 옆에 있었어요. 홍 장군이 내 손을 잡으면서 '오늘 형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

그날 밤 누구 목소리였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가슴 아리게 방송을 했었죠. 그 목소리는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이제 저 소리가 끝나면 우리는 이제 죽든지 진압되든지 하겠구나' 이런 생각으로 시간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그리고 새벽에 나 여기 있다고 집으로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다 끊겨 있었어요.

■진압당한 그 날 새벽, "차마 총을 쏠 순 없었다"

5월 27일 새벽, YWCA에 있던 채영선 씨. 탱크 소리를 듣고 '상황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총기를 계엄군에 넘기고 체포됐습니다. 곧바로 금남로 전남도청 앞과 주변 골목에서 '매타작'이 시작됩니다. 이른바 굴비 엮듯이 전선으로 손이 뒤로 묶인 채였습니다.

그날 계엄군 한 명도 안 죽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시민군들이 사람을 향해서 총을 못 쏘는 거예요. 말이 시민군이고 위협적으로 총을 들었던 거지, 누구를 쏘려는 생각들은 다 없었어요. 같이 총을 쏘고 하는 순간 (계엄군과)같은 사람이 되니까 다 그 심정으로 안 쐈던 모양이더라고...

■보안대는 피했지만…깊은 트라우마

상무대 영창 내 가혹행위를 재현한 모습을 가리키는 채영선 씨상무대 영창 내 가혹행위를 재현한 모습을 가리키는 채영선 씨

채영선 씨는 이른바 'A급' 가운데 자신처럼 보안대를 피한 건 드물었다고 말합니다. 실형을 받지 않고 훈방 조치된 겁니다. 하지만 당시는 말이 훈방이지, 상무대 영창에서 수개월 동안 갖은 구타와 가혹 행위·고문을 당했습니다. 1980년 여름, 상무대 영창에서의 경험은 고스란히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삶의 스트레스로 봐야죠. 나도 공황장애나 이런 거로 비행기도 못 타고, KTX와 고속버스도 못 타고, 이런 상황이에요. 묘하게 배는 탈 수 있어서 제주도는 가요. 옛날에는 목욕탕도 잘 못 들어가고 엘리베이터도 힘들고, 택시 뒷좌석도 힘들고 그랬는데 약도 먹으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어요.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인간의 존엄성'

상무대 영창 생활은 구타와 가혹 행위의 연속이었습니다. 대다수가 증언하듯 영창 내부는 비좁았고 식사량은 아주 조금뿐이었습니다. 채 씨는 굶주림과 체벌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고, 늘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식사를 아무리 적게 줘도 그냥 그것만 천천히 먹자 했죠. 한 번은 빵이나 이런 게 나오기도 했나 봐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러면 내가 고등학생한테 그걸 먹으라고 줬었나 봐요. 지금도 그 친구가 기억하고, 내 이름까지 알고 있더라고요. 나중에 한 번 연락도 왔었어요.

우리가 이런 고초를 겪고 있지만,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있고 나를 도와준다. 어린 학생들한테 이런 느낌을 주게 하려고 했었죠. 고등학생은 군대도 갔다 오고 24살이고 대학생이니 굉장히 어른으로 보잖아요. 어떻게 보면 나도 애였지만.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올해 제주4·3 전야제에서 공연하는  광주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올해 제주4·3 전야제에서 공연하는 광주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채영선 씨는 5·18 이후 공무원이 됐습니다. 훈방 조치로 취업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다지만 결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건 1988년, 민주화 이후였습니다.

퇴직 후에는 광주<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단원은 초등학생 고학년부터 중학생까지 있고, 지난해부터는 사재를 털어서 오케스트라를 운영 중입니다. 학교 강당을 쉽게 이용할 수도 없어 연습 공간도 마땅치 않은 데다 비용도 생각보다 많이 들지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지난 2월에는 5·18고등학생동지회가 펴낸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 출판 기념 행사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했습니다. 4월에는 제주도로 건너가 제주4·3 행사에도 참여했습니다.

2월 27일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 출판기념회에서 공연하는 광주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채영선 씨는 이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고 있다.2월 27일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 출판기념회에서 공연하는 광주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채영선 씨는 이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고 있다.

5.18을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음악을 통해서 하니까 아이들 만족도가 높아요. 아이들이 어떤 자부심도 갖고, 달라요.

친구들 도움받고 공무원 후배들 도움도 받고, 이렇게 해서 오케스트라 운영하고 있어요. 부족한 거는 제가 개인적으로 내고...그냥 공무원 연금 받아서 편하게만 살면 배만 더 나오죠. 어렵더라도 뭔가 시도는 해봐야 잖아요.

■오월정신은 '인간주의'

상무대 영창에서 인터뷰하는 채영선 씨상무대 영창에서 인터뷰하는 채영선 씨

채 씨는 5·18에서 '인간주의'를 강조합니다. 민주와 인권·평화도 '인간다움'이 밑바탕이라는 겁니다. 5·18청소년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독재 시대에는 독재에 저항하고, 산업화에서는 서로 같이 먹고살기 위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인간다움을 스스로 유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그런 마음가짐이 저는 5·18로 있었다고 생각해요.

두렵더라도 도망가지 않았고, 좀 비굴해지긴 했지만 고문당하더라도 그 시점을 넘어서면 또 다시 나를 추스를 수 있었고.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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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채록5·18] 총 들었던 5.18 시민군 채영선씨, 오케스트라 단장 된 사연은?
    • 입력 2023-06-08 07: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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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43년 특별기획 KBS 다큐인사이트 ‘1980, 로숑과 쇼벨’ 방송화면 갈무리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 복학생이던 채영선 씨. 연행된 뒤 버스 안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청년이 바로 채 씨입니다. 민주화 시위에 참여해 시민군으로 5월 27일 '새벽'을 맞았습니다.

'우리가 비록 진압당할지라도 저항했던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광주가 너무 초라해지지 않느냐' 이런 생각으로 도청에 들어간 거죠.

우리를 지휘한 사람이 유영선, 문근영 작은 외할아버지인가 그래요. 그 사람이 '자기는 장교 출신이고 스물아홉 살 먹었다. 나는 오늘 여기서 죽겠다.' 그런 말을 하더만.

1980년 당시를 재현한 상무대 영창에서 인터뷰하는 채영선 씨
광주시청 공무원으로 퇴직한 채 씨는 현재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5·18 정신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채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 」취재진이 만났습니다.

■"운이 좋았다"

취재진이 채 씨를 만난 곳은 1980년 5월 당시 상무대 영창을 재현해 놓은 5·18자유공원입니다. 당시 상무대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분소가 시위 진압의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진압 후에는 지도부와 시민군 등을 체포해 영창에 가두고 고문 수사를 했습니다.

채 씨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에 체포된 후 상무대로 끌려갔습니다.

(5월27일 체포 직후)계엄군이 도로 골목에서 한 명씩 데리고 물어보는데 앞에서 '군대를 안 갔다 왔다'고 하니까 '이 새끼, 군대도 안 갔다 온 놈이 데모했다'면서 두들겨 패요. 나는 전투경찰로 복무하고 전역한 뒤였으니까 '갔다 왔습니다.' 했어요. 그런데 군인 눈이 갑자기 뒤집히더니 '군대 갔다 온 놈이었어' 하면서 두들겨 패다가 자기 흥분에 못 이겨서 대검을 뽑아서 내 머리를 잡아서 찍으려고 했어요.

그때 우리를 처음 진압했던 장교가 '차렷' 하면서 그것을 막아주더라고요.

체포될 때 주머니에 칼빈 소총 총알이 3개 있었고 수습위원 띠도 있었는데, 손이 이미 뒤로 묶여서 감출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장교가 내 주머니에서 빼가지고 자기 주머니에 넣어서 감추더라고요.

채 씨는 상무대 영창에 끌려간 뒤 대학생이어서 일반 줄에서 따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때도 한 대령이 "그럴 필요 없다"면서 일반 줄로 다시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실제 분류 심사에서 만난 첫 경찰은 같이 체포된 후배의 당숙이었습니다. "총을 들지 않았고 26일에 들어가 멋모르고 있다가 못 빠져나왔다"고 말하라고 해 심사를 맡은 담당자에게 그렇게 들은 대로 진술했습니다.

당시 전남대학교 복학생에 총을 든 시민군으로 '수습위원' 띠를 가지고 있다가 5월 27일 마지막 진압 시 체포됐다면 이른바 A급입니다. ×가 2개 표시돼 악명높은 505보안대로 끌려갔을 겁니다.

*505보안대 :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이던 보안사령부의 광주지구 직속부대입니다. 옛 505 보안대는 고문이 자행되기도 했던 국가 폭력의 현장입니다. 현재는 5·18역사공원으로 조성돼 있습니다. 위치 :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대로956번길 16 (쌍촌동)

■항쟁이 시작된 전남대 앞에 있었던 채영선

1957년생인 채 씨는 5·18 당시 군 복무를 마치고 막 복학한 대학생이었습니다. 계엄령 확대로 5월 18일 휴교령 소식에 친구와 함께 아침 일찍 학교(전남대)로 가 책과 짐을 꺼내서 나옵니다.


당시 전남대 학생들은 계엄이 확대되면 18일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 전에 이미 일부 학생들과 군인들이 대치하며 여러 차례 충돌이 빚어졌다고 합니다. 채 씨도 정문 근처에서 계엄군과 마주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일단 도망쳤습니다. 그는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이 시위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조선대 앞에서도 학생들이 계엄군에 구타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조대(조선대)생들 두들겨 맞는 것을 봤어요. 누군가 한 사람이 큰 배낭을 메고 나오는 거예요. 휴교하니까 지리산 놀러 가려고 짐을 싸서 나왔다는데 계엄군이 무지하게 패 버려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렇게 놀러 다니냐' 아무 이유 없이 패는 거죠. 나는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도와줄 수도 없고, 일부러 천천히 걸었어요. 어른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그런데 학생 한 명이 도망 오다가 잡혔어요. 그 학생의 눈빛이 기억나요. 제일 처음 맞을 때는 저항하지 않고 그냥 있었는데, 나중에 도저히 저항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맞게 되니까 '이렇게 때릴 줄 알았으면 아까 저항이라도 할 걸' 하는 그런 눈빛으로 쓰러졌어요. 그걸 보고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민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운 5월 21일

채 씨는 5월 20일 밤중에 광주역 근처에서 총소리를 들었고, 다음 날인 21일엔 일찍부터 시내 금남로에 나갔습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을 목격하며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날 오후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습니다. 그는 발포 전에 몸을 건물 쪽으로 숨긴 덕에 화를 면했습니다.

지금 전일빌딩 주차장으로 돼 있는 곳에 옛날에 작은 골목이 있었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돌 던지고 하니까 계엄군이 나와서는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한 명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했어요. 그 애는 별로 데모할 생각도 없이 슬리퍼 신고 나온 것 같았는데...

너무 엄청난 걸 봐버렸어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총 맞아 죽어가는 거,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설사 자기(계엄군)들이 위기 의식에서 총을 쏘더라도 땅에다 쏴야 할 거 아니에요? 아니면 공중에다 쏜다든가. 그런데 정면 발포했으니까...

■시민군에 합류한 채영선

계엄군이 퇴각한 이후 시위대와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했고, 광주 도심은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5월 21일 집단 발포 이후 참상을 목격한 채영선 씨는 며칠을 고심한 끝에 결국 시민군으로 합류했습니다.

집에 있는데 잠이 안 오는 거죠. 내가 인간으로서 나의 품위를 지키는 게 어떤 방법인가 생각하고 도청에 들어간 거죠. 25일이었는데 좀 늦게 들어갔죠, 사실은.

25일 저녁, 내가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열여덟 명을 주면서 그 사람들을 맡는 분대장을 하라고 그랬거든요, 도청 2층에서 광장을 보면서 지키라고. 우리끼리 분대장은 자존심 상한다고 소대장이라고 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5소대장.

■YWCA에서 맞은 최후 항전

5월 26일 저녁, 18명이던 채영선의 5소대 인원은 단 두 명만 남았습니다. 그날 어머니가 아들을 찾기 위해 도청 쪽에 온 것을 봤지만 모른 척했습니다.

5월 26일 밤, 전남도청. 마지막을 각오한 시민군은 2백 명 남짓. 계엄군이 온다는 소식에 새벽 시간 비상이 걸렸고 3개 조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YWCA·전일빌딩·수협에 각각 배치됐습니다. 채 씨는 YWCA로 갔습니다.

26일 저녁 되니까 (5소대)18명 중에서 16명이 빠져나가고, '홍 장군'이라고 조선대 의예과 학생 한 명만 내 옆에 있었어요. 홍 장군이 내 손을 잡으면서 '오늘 형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

그날 밤 누구 목소리였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가슴 아리게 방송을 했었죠. 그 목소리는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이제 저 소리가 끝나면 우리는 이제 죽든지 진압되든지 하겠구나' 이런 생각으로 시간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그리고 새벽에 나 여기 있다고 집으로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다 끊겨 있었어요.

■진압당한 그 날 새벽, "차마 총을 쏠 순 없었다"

5월 27일 새벽, YWCA에 있던 채영선 씨. 탱크 소리를 듣고 '상황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총기를 계엄군에 넘기고 체포됐습니다. 곧바로 금남로 전남도청 앞과 주변 골목에서 '매타작'이 시작됩니다. 이른바 굴비 엮듯이 전선으로 손이 뒤로 묶인 채였습니다.

그날 계엄군 한 명도 안 죽었어요, 잘 아시겠지만. 시민군들이 사람을 향해서 총을 못 쏘는 거예요. 말이 시민군이고 위협적으로 총을 들었던 거지, 누구를 쏘려는 생각들은 다 없었어요. 같이 총을 쏘고 하는 순간 (계엄군과)같은 사람이 되니까 다 그 심정으로 안 쐈던 모양이더라고...

■보안대는 피했지만…깊은 트라우마

상무대 영창 내 가혹행위를 재현한 모습을 가리키는 채영선 씨
채영선 씨는 이른바 'A급' 가운데 자신처럼 보안대를 피한 건 드물었다고 말합니다. 실형을 받지 않고 훈방 조치된 겁니다. 하지만 당시는 말이 훈방이지, 상무대 영창에서 수개월 동안 갖은 구타와 가혹 행위·고문을 당했습니다. 1980년 여름, 상무대 영창에서의 경험은 고스란히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삶의 스트레스로 봐야죠. 나도 공황장애나 이런 거로 비행기도 못 타고, KTX와 고속버스도 못 타고, 이런 상황이에요. 묘하게 배는 탈 수 있어서 제주도는 가요. 옛날에는 목욕탕도 잘 못 들어가고 엘리베이터도 힘들고, 택시 뒷좌석도 힘들고 그랬는데 약도 먹으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고는 있어요.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인간의 존엄성'

상무대 영창 생활은 구타와 가혹 행위의 연속이었습니다. 대다수가 증언하듯 영창 내부는 비좁았고 식사량은 아주 조금뿐이었습니다. 채 씨는 굶주림과 체벌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고, 늘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식사를 아무리 적게 줘도 그냥 그것만 천천히 먹자 했죠. 한 번은 빵이나 이런 게 나오기도 했나 봐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러면 내가 고등학생한테 그걸 먹으라고 줬었나 봐요. 지금도 그 친구가 기억하고, 내 이름까지 알고 있더라고요. 나중에 한 번 연락도 왔었어요.

우리가 이런 고초를 겪고 있지만,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있고 나를 도와준다. 어린 학생들한테 이런 느낌을 주게 하려고 했었죠. 고등학생은 군대도 갔다 오고 24살이고 대학생이니 굉장히 어른으로 보잖아요. 어떻게 보면 나도 애였지만.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올해 제주4·3 전야제에서 공연하는  광주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채영선 씨는 5·18 이후 공무원이 됐습니다. 훈방 조치로 취업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다지만 결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건 1988년, 민주화 이후였습니다.

퇴직 후에는 광주<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단원은 초등학생 고학년부터 중학생까지 있고, 지난해부터는 사재를 털어서 오케스트라를 운영 중입니다. 학교 강당을 쉽게 이용할 수도 없어 연습 공간도 마땅치 않은 데다 비용도 생각보다 많이 들지만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지난 2월에는 5·18고등학생동지회가 펴낸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 출판 기념 행사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했습니다. 4월에는 제주도로 건너가 제주4·3 행사에도 참여했습니다.

2월 27일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 출판기념회에서 공연하는 광주 5·18새벽청소년오케스트라. 채영선 씨는 이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고 있다.
5.18을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음악을 통해서 하니까 아이들 만족도가 높아요. 아이들이 어떤 자부심도 갖고, 달라요.

친구들 도움받고 공무원 후배들 도움도 받고, 이렇게 해서 오케스트라 운영하고 있어요. 부족한 거는 제가 개인적으로 내고...그냥 공무원 연금 받아서 편하게만 살면 배만 더 나오죠. 어렵더라도 뭔가 시도는 해봐야 잖아요.

■오월정신은 '인간주의'

상무대 영창에서 인터뷰하는 채영선 씨
채 씨는 5·18에서 '인간주의'를 강조합니다. 민주와 인권·평화도 '인간다움'이 밑바탕이라는 겁니다. 5·18청소년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독재 시대에는 독재에 저항하고, 산업화에서는 서로 같이 먹고살기 위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고, 그런 식으로 인간다움을 스스로 유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그런 마음가짐이 저는 5·18로 있었다고 생각해요.

두렵더라도 도망가지 않았고, 좀 비굴해지긴 했지만 고문당하더라도 그 시점을 넘어서면 또 다시 나를 추스를 수 있었고.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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