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채록5·18] 열일곱 여고생 김경임, 시민군의 밥을 짓다

입력 2023.06.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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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여고생이었던 김경임 씨. 시민군 지휘본부 취사반에서 활동했다.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여고생이었던 김경임 씨. 시민군 지휘본부 취사반에서 활동했다.

"도청에 있는 사람들 죽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다 죽는다고 했는데...내가 집에 가도 돼? 이 사람들 다 죽으면 어떡하지? 이 생각이 확 들면서 멈췄어요."

1980년 5월 26일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을 하루 앞둔 늦은 밤, 열일곱 여고생 김경임 씨는 텅 빈 광주 거리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도청에서 빠져나오는 길이었습니다. 거리엔 적막만 나돌았습니다.

김 씨는 닷새간 시민군 지휘본부가 있던 도청 '취사반'으로 활동했습니다. 도청에서 먹고 자며 시민군들의 밥을 짓고, 식판을 날랐습니다. 해본 적 없던 일을 하려니 몸이 고단했지만, 단 한 번도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후항전을 앞두고, "끝까지 함께 하자"고 다짐했던 시민군들은 "다 죽을 수도 있다"며 학생들부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김 씨를 비롯한 학생 서너 명을 도청 밖으로 피신시킨 이는 취사반장 '박병규' 열사였습니다. 박 열사는 이들을 인솔한 뒤 "할 일이 있어 가야 한다"며 도청으로 돌아갔습니다.

떠밀리다시피 도청을 떠나던 길, 김경임 씨는 결국 발길을 돌렸습니다. 김 씨는 총알이 빗발치던 도청 최후항전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상무대로 연행됐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30년 넘게 5.18에 참여했던 사실을 침묵하고, 유공자 신청도 뒤늦게 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김경임 씨를 만났습니다.

■ 휴교령과 함께 찾아온 오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앞 인파에 섞여 있던 김경임 씨의 모습.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앞 인파에 섞여 있던 김경임 씨의 모습.

김경임 씨는 1980년 5.18 당시 동신 여자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자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김 씨는 친구들과 함께 도청에 나가봤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습니다. 매일 수많은 인파가 도청 앞 분수대로 모였다 흩어졌습니다. 시신을 싣고 온 리어카를 보고도 당장 일어나는 일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도청 분수대 근처에 있다 보니까 리어카가 시신을 싣고 왔어요. 실제로 봤거든요, 군인들이 죽였다고. 근데 그 시신을 보면서도 '그럴 리가 없어. 군인들이 이럴 리가 없어' 그러면서 믿기 어려웠어요. 되게 혼란스러웠고요."

아수라장 속 "취사반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김 씨는 곧장 친구들과 함께 도청으로 향했습니다.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 시민군의 든든한 지원군, 도청 '취사반'


취사반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아침이 되면 한 장소에 모여 활동 소식을 공유하고, 도청 바깥으로 연결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상무관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안치된 시민들을 향해 묵념하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집집이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나중엔 시민들이 알아서 도청으로 식재료를 보내줬습니다. 공수한 식재료를 다듬어 밥을 짓고, 식판에 나눠 담았습니다. 시민군들이 도착하면 바로바로 밥이 담긴 식판을 날랐습니다.

시민군들은 끊임없이 밀려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몸이 고단했습니다. 더군다나 김 씨는 그동안 부모님이 고향에서 보내주는 반찬에 친언니가 지어주던 밥만 먹어 왔습니다. 지쳐서 주저앉고 싶고, 졸음이 밀려왔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휘청휘청'하면서도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광주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밥을, 밥을 대접하는 일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그 일을 내가 하고 있잖아요. '내가 해야 하는 일' 오로지 그 생각만 했던 것 같고, 부모한테 죄송하지만 단 한 번도 가족 생각은 안 났어요."

■"다 죽을 수도 있다. 나가야 한다"


25일 저녁부터 계엄군이 다시 도청에 들어올 거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결국,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을 하루 앞둔 26일 저녁, 시민군들은 도청에 최소한의 인력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인원을 귀가시켰습니다.

"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다 나가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특히 여학생들은 다 나가라' 우르르 나가면 눈에 띄니까 두세 명씩 조를 짜서 차례대로 나갔죠."

하지만 결국 김 씨는 도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내부에 진입했습니다. 그때 김 씨를 도청 밖으로 피신시켰던 박병규 열사를 만났습니다. 박 열사는 "죽으려고 여기에 왔냐"며 크게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나갈 수 없었고, 결국 박 열사는 김 씨를 도지사실에 숨겨주었습니다. "쥐죽은 듯 숨어 있어라"는 말만 듣고 어두컴컴한 방안에 갇혀 있길 몇 시간, 콩 볶는 소리마냥 다급한 총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던 김 씨에게 박 열사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박 열사와 총알이 빗발치는 도청 복도를 기어갔습니다.

"(박 열사가) 고개 들면 총에 맞을 수 있으니까 기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한참을 갔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더는 어디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라. 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지 말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라' 그 말 딱 하고 '나는 가야 한다, 할 일이 있다'고."

그 모습이 박병규 열사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살았네? 조그마한 학생이네?" 상무대로 연행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엎드려 있던 김경임 씨는 누군가 총부리로 자신의 등을 툭 치자 고개를 들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무장한 계엄군이었습니다. 첫 마디는 '살았네', 그 다음은 '조그마한 학생이네' 였습니다. 그렇게 상무대로 연행된 김 씨는 혹독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도청 식당에 머물며 취사반 활동만 했다는 김 씨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민군이 모진 물고문을 받는 장면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를 조사하던 군인이 아니라 다른 군인이 들어오더라고요. 그 군인이 제가 식판 나르던 여학생이라는 걸 알아본 거에요. 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도청 가서 식당 밥을 몇 번이나 먹었는데' 하더라고요. 충격적이었죠."

김 씨가 상무대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건 또 다른 군인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조사하던 군인이 아닌 다른 군인이 들어오더니 김 씨를 알아본 겁니다. 그 군인은 시민군들이 밥을 먹던 도청 취사실에서 자신도 여러 번 밥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김 씨는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마 시민군으로 위장해 도청에 들어왔던 게 아니었겠냐"면서 "진압작전 전에도 계엄군들이 이미 도청 구조를 다 파악했다고들 했는데 그 말이 그때 이해가 갔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김경임 씨에게 물었습니다. 취사반 활동을 시작한 것,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서 발걸음을 돌려 다시 도청으로 돌아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요. 김 씨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그날, 가족과도 같았던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하니 견딜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시민군의 끼니를 책임지려 안간힘을 썼던 일,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박병규 열사의 마지막 모습까지, 김 씨에게 5.18은 "누군가를 살리는 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김 씨는 뒤늦게 유공자 신청을 했습니다. 도청 취사반에서 활동한 사실을 30년 넘도록 남편에게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TV와 유튜브에서 5.18 유공자들을 '가짜'라고 하는 말을 듣고선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김 씨는 그때, 앞으로 더는 자신의 삶에서 5.18을 모른척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제 김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며, 5.18이 '가짜'라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스스로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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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16 07: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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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여고생이었던 김경임 씨. 시민군 지휘본부 취사반에서 활동했다.
"도청에 있는 사람들 죽을 수도 있다고 했는데... 다 죽는다고 했는데...내가 집에 가도 돼? 이 사람들 다 죽으면 어떡하지? 이 생각이 확 들면서 멈췄어요."

1980년 5월 26일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을 하루 앞둔 늦은 밤, 열일곱 여고생 김경임 씨는 텅 빈 광주 거리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도청에서 빠져나오는 길이었습니다. 거리엔 적막만 나돌았습니다.

김 씨는 닷새간 시민군 지휘본부가 있던 도청 '취사반'으로 활동했습니다. 도청에서 먹고 자며 시민군들의 밥을 짓고, 식판을 날랐습니다. 해본 적 없던 일을 하려니 몸이 고단했지만, 단 한 번도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후항전을 앞두고, "끝까지 함께 하자"고 다짐했던 시민군들은 "다 죽을 수도 있다"며 학생들부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김 씨를 비롯한 학생 서너 명을 도청 밖으로 피신시킨 이는 취사반장 '박병규' 열사였습니다. 박 열사는 이들을 인솔한 뒤 "할 일이 있어 가야 한다"며 도청으로 돌아갔습니다.

떠밀리다시피 도청을 떠나던 길, 김경임 씨는 결국 발길을 돌렸습니다. 김 씨는 총알이 빗발치던 도청 최후항전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상무대로 연행됐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30년 넘게 5.18에 참여했던 사실을 침묵하고, 유공자 신청도 뒤늦게 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김경임 씨를 만났습니다.

■ 휴교령과 함께 찾아온 오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앞 인파에 섞여 있던 김경임 씨의 모습.
김경임 씨는 1980년 5.18 당시 동신 여자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자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김 씨는 친구들과 함께 도청에 나가봤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이었습니다. 매일 수많은 인파가 도청 앞 분수대로 모였다 흩어졌습니다. 시신을 싣고 온 리어카를 보고도 당장 일어나는 일을 믿기 어려웠습니다.

"도청 분수대 근처에 있다 보니까 리어카가 시신을 싣고 왔어요. 실제로 봤거든요, 군인들이 죽였다고. 근데 그 시신을 보면서도 '그럴 리가 없어. 군인들이 이럴 리가 없어' 그러면서 믿기 어려웠어요. 되게 혼란스러웠고요."

아수라장 속 "취사반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김 씨는 곧장 친구들과 함께 도청으로 향했습니다.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 시민군의 든든한 지원군, 도청 '취사반'


취사반의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아침이 되면 한 장소에 모여 활동 소식을 공유하고, 도청 바깥으로 연결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상무관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안치된 시민들을 향해 묵념하는 게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집집이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나중엔 시민들이 알아서 도청으로 식재료를 보내줬습니다. 공수한 식재료를 다듬어 밥을 짓고, 식판에 나눠 담았습니다. 시민군들이 도착하면 바로바로 밥이 담긴 식판을 날랐습니다.

시민군들은 끊임없이 밀려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몸이 고단했습니다. 더군다나 김 씨는 그동안 부모님이 고향에서 보내주는 반찬에 친언니가 지어주던 밥만 먹어 왔습니다. 지쳐서 주저앉고 싶고, 졸음이 밀려왔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휘청휘청'하면서도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광주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밥을, 밥을 대접하는 일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그 일을 내가 하고 있잖아요. '내가 해야 하는 일' 오로지 그 생각만 했던 것 같고, 부모한테 죄송하지만 단 한 번도 가족 생각은 안 났어요."

■"다 죽을 수도 있다. 나가야 한다"


25일 저녁부터 계엄군이 다시 도청에 들어올 거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결국,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을 하루 앞둔 26일 저녁, 시민군들은 도청에 최소한의 인력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인원을 귀가시켰습니다.

"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다 나가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특히 여학생들은 다 나가라' 우르르 나가면 눈에 띄니까 두세 명씩 조를 짜서 차례대로 나갔죠."

하지만 결국 김 씨는 도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내부에 진입했습니다. 그때 김 씨를 도청 밖으로 피신시켰던 박병규 열사를 만났습니다. 박 열사는 "죽으려고 여기에 왔냐"며 크게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나갈 수 없었고, 결국 박 열사는 김 씨를 도지사실에 숨겨주었습니다. "쥐죽은 듯 숨어 있어라"는 말만 듣고 어두컴컴한 방안에 갇혀 있길 몇 시간, 콩 볶는 소리마냥 다급한 총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던 김 씨에게 박 열사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박 열사와 총알이 빗발치는 도청 복도를 기어갔습니다.

"(박 열사가) 고개 들면 총에 맞을 수 있으니까 기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한참을 갔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더는 어디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라. 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지 말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라' 그 말 딱 하고 '나는 가야 한다, 할 일이 있다'고."

그 모습이 박병규 열사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살았네? 조그마한 학생이네?" 상무대로 연행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엎드려 있던 김경임 씨는 누군가 총부리로 자신의 등을 툭 치자 고개를 들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무장한 계엄군이었습니다. 첫 마디는 '살았네', 그 다음은 '조그마한 학생이네' 였습니다. 그렇게 상무대로 연행된 김 씨는 혹독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도청 식당에 머물며 취사반 활동만 했다는 김 씨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민군이 모진 물고문을 받는 장면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를 조사하던 군인이 아니라 다른 군인이 들어오더라고요. 그 군인이 제가 식판 나르던 여학생이라는 걸 알아본 거에요. 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도청 가서 식당 밥을 몇 번이나 먹었는데' 하더라고요. 충격적이었죠."

김 씨가 상무대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건 또 다른 군인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조사하던 군인이 아닌 다른 군인이 들어오더니 김 씨를 알아본 겁니다. 그 군인은 시민군들이 밥을 먹던 도청 취사실에서 자신도 여러 번 밥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김 씨는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마 시민군으로 위장해 도청에 들어왔던 게 아니었겠냐"면서 "진압작전 전에도 계엄군들이 이미 도청 구조를 다 파악했다고들 했는데 그 말이 그때 이해가 갔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김경임 씨에게 물었습니다. 취사반 활동을 시작한 것,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서 발걸음을 돌려 다시 도청으로 돌아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요. 김 씨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김 씨는 그날, 가족과도 같았던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 하니 견딜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시민군의 끼니를 책임지려 안간힘을 썼던 일,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박병규 열사의 마지막 모습까지, 김 씨에게 5.18은 "누군가를 살리는 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김 씨는 뒤늦게 유공자 신청을 했습니다. 도청 취사반에서 활동한 사실을 30년 넘도록 남편에게조차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TV와 유튜브에서 5.18 유공자들을 '가짜'라고 하는 말을 듣고선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김 씨는 그때, 앞으로 더는 자신의 삶에서 5.18을 모른척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제 김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며, 5.18이 '가짜'라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스스로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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