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 경보’에 3분 지각했더니…증명 못하면 반차 차감?

입력 2023.06.20 (11:18) 수정 2023.06.2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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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많은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문자를 기억하실 겁니다.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등교를 준비하던 학생들은 물론, 출근을 준비하거나 이미 출근길에 올랐던 직장인들도 큰 혼란을 느껴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 서울시내 곳곳에 실제 상황이라며 사이렌까지 울려퍼졌는데, 여느 때처럼 출근을 준비하던 20대 직장인 A 씨도 갑작스런 문자와 사이렌으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부모님과 할머니를 먼저 모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피 준비를 시작했는데, 30분쯤 지나서야 '오발령'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부랴부랴 출근 준비를 했지만 서울 중랑구에서 강남에 있는 회사까지, 8시에 도착하기는 빠듯한 시간.

그날따라 유독 차도 많이 막혔다는 A 씨는 8시 3분에 출근 지문을 찍었습니다.

■"대피한 증거를 달라" vs "어떻게 증명하냐"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A 씨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A 씨

허겁지겁 사무실로 올라갔지만, 회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고 A 씨는 전했습니다. 왜 지각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묻지 않았고, 특수한 상황임을 다들 인식하고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A 씨도 조용히 본인 자리로 들어와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달 초 관리부서에서 근태 확인 메일이 날아왔습니다. 5월 31일은 '지각'으로 처리된 겁니다.

당황한 A 씨는 곧바로 부서장에게 지각 사유서까지 제출해 승인받았습니다. 하지만 관리부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해당 사유를 인정해주기 어렵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A 씨와 관리부서 직원이 나눈 대화 재구성당시 A 씨와 관리부서 직원이 나눈 대화 재구성

A 씨도 나름 당시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경고 방송을 동영상으로 찍어두고, 재난문자까지 캡처해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객관적인 증빙이 어렵다는 게 관리부서의 입장. 대피하려는 상황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하는지 A 씨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습니다.

"대피소가 저희 아파트 지하주차장이에요. 그러면 제가 만약 주차장에 대피하면 경비 아저씨한테 말씀을 드리면 아실까요? 대피했다는 걸 증명을 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 억지스러운 것 같아요."

■회사 측 "지각 2회 누적, 반차 차감합니다"

'고작 3분 지각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A 씨에겐 지각 사유를 인정받으려 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관리부서로부터 '5월 지각 2회라며 연차휴가 0.5일(즉 반차)이 차감된다'고 통보받았기 때문입니다.

A 씨가 재직 중인 회사의 취업규칙A 씨가 재직 중인 회사의 취업규칙

A 씨 회사의 취업규칙에서는 매월 지각 2회는 연차유급휴가에서 반일(0.5일)을 차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A 씨는 지난달 초 10분 지각으로 1회가 누적된 상황이었던 겁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차를 이미 소진한 탓에, 만약 지각 2회가 누적되면 이제는 0.5일분의 급여가 깎일 위기였습니다.

결국, 실랑이 끝에 관리부서는 일단 A 씨의 사유를 인정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전 직원들에게 보낸 관리부서의 공지 메일은 마치 A 씨를 겨눈 '경고문'과 같았습니다.

- 앞으로 미리 제출하지 않은 사유서(지각, 조퇴, 결근)는 연차 처리 하겠습니다.
- 지각사유서는 해당일 제출하지 않으면 승인처리 하지 않겠습니다.
- 미리 제출하는 사유서도 객관적인 증빙 없이는 승인되지 않으니 제출하지 말아주십시오.
- A 씨 회사 관리부가 보낸 메일 -

간신히 반차 차감을 면했다지만, A 씨의 마음은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에 또 대피 경보가 울리면 그때도 회사에 지각할까 봐, 또 대피 상황을 회사에 어떻게 증명할지 고민해야 할까 봐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다음에 또 그러면은 저는 또 대피 준비를 하다가 또 지각하겠죠. 시간 맞춰서 오려면 과속을 해야 하는데 너무 위험하잖아요. 그리고 이게 오발령이어서 다행이지, 진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그런 생각도 먼저 들죠."

■지각 횟수로 연차 차감은 '위법'…대피령은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근로계약서에 적혀 있는 대로 직장인이 근무시간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업무에 방해될 만큼 잦은 지각은 회사 내규에 따라 징계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근로자가 지각으로 일하지 않은 시간만큼 회사가 그만큼의 임금을 공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 A 씨 회사의 사례처럼 지각한 횟수만으로 연차를 차감하는 건 '위법'입니다.

근로기준법 제60조(연차 유급휴가) ⑤ 사용자는 제1항부터 제4항까지의 규정에 따른 휴가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주어야 하고, 그 기간에 대하여는 취업규칙 등에서 정하는 통상임금 또는 평균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다만,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휴가를 주는 것이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는 그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

권남표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근로기준법상 연차 휴가는 근로자가 원할 때 하루 치 평균 임금을 주고서 유급으로 쉬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며 "3분 지각을 했다면 3분 만큼의 임금을 차감할 수는 있어도, 지각을 두 번 했다고 0.5일 또는 하루의 '유급' 휴가를 차감하는 것은 무효"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폭우나 폭설 등 기상 상의 천재지변이나 이번 A 씨의 사례처럼 대피경보로 인한 혼란으로 지각했더라도, 사유를 인정해주지 않는 회사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묻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천재지변에 따른 결근을 유급으로 인정해주는 별도의 취업규칙이나 노사 간 단체협약이 있지 않은 한, 법적으로 노동자가 그러한 사유들을 일일이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회사 관리자급이 천재지변 상황을 인지하고 직원들에게 근무 시간을 늦추거나 재택근무를 권유하는 방식으로 공지하는 게 가장 통상적인 방법입니다.

박은하 노무사는 "A 씨 사례는 회사의 잘못도, 근로자의 잘못도 아닌 지자체의 행정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이 실수를 회사가 다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3분 지각한 근로자에게 '대피를 증명하라'는 등의 질책은 근로자 입장에서 억울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박 노무사는 "무엇보다 지각 횟수로 반차 차감을 규정한 취업규칙 자체가 근로기준법 위반인 만큼, 이를 걸러내지 못한 노동청에 1차적인 책임이 있고, 시정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촬영기자: 조창훈/ 인포그래픽: 김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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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20 11:18:31
    • 수정2023-06-20 14:3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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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많은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문자를 기억하실 겁니다.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등교를 준비하던 학생들은 물론, 출근을 준비하거나 이미 출근길에 올랐던 직장인들도 큰 혼란을 느껴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 서울시내 곳곳에 실제 상황이라며 사이렌까지 울려퍼졌는데, 여느 때처럼 출근을 준비하던 20대 직장인 A 씨도 갑작스런 문자와 사이렌으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부모님과 할머니를 먼저 모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피 준비를 시작했는데, 30분쯤 지나서야 '오발령'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부랴부랴 출근 준비를 했지만 서울 중랑구에서 강남에 있는 회사까지, 8시에 도착하기는 빠듯한 시간.

그날따라 유독 차도 많이 막혔다는 A 씨는 8시 3분에 출근 지문을 찍었습니다.

■"대피한 증거를 달라" vs "어떻게 증명하냐"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A 씨
허겁지겁 사무실로 올라갔지만, 회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고 A 씨는 전했습니다. 왜 지각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묻지 않았고, 특수한 상황임을 다들 인식하고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A 씨도 조용히 본인 자리로 들어와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달 초 관리부서에서 근태 확인 메일이 날아왔습니다. 5월 31일은 '지각'으로 처리된 겁니다.

당황한 A 씨는 곧바로 부서장에게 지각 사유서까지 제출해 승인받았습니다. 하지만 관리부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해당 사유를 인정해주기 어렵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A 씨와 관리부서 직원이 나눈 대화 재구성
A 씨도 나름 당시 상황을 기록하기 위해 경고 방송을 동영상으로 찍어두고, 재난문자까지 캡처해뒀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객관적인 증빙이 어렵다는 게 관리부서의 입장. 대피하려는 상황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입증해야 하는지 A 씨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습니다.

"대피소가 저희 아파트 지하주차장이에요. 그러면 제가 만약 주차장에 대피하면 경비 아저씨한테 말씀을 드리면 아실까요? 대피했다는 걸 증명을 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 억지스러운 것 같아요."

■회사 측 "지각 2회 누적, 반차 차감합니다"

'고작 3분 지각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A 씨에겐 지각 사유를 인정받으려 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관리부서로부터 '5월 지각 2회라며 연차휴가 0.5일(즉 반차)이 차감된다'고 통보받았기 때문입니다.

A 씨가 재직 중인 회사의 취업규칙
A 씨 회사의 취업규칙에서는 매월 지각 2회는 연차유급휴가에서 반일(0.5일)을 차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A 씨는 지난달 초 10분 지각으로 1회가 누적된 상황이었던 겁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차를 이미 소진한 탓에, 만약 지각 2회가 누적되면 이제는 0.5일분의 급여가 깎일 위기였습니다.

결국, 실랑이 끝에 관리부서는 일단 A 씨의 사유를 인정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전 직원들에게 보낸 관리부서의 공지 메일은 마치 A 씨를 겨눈 '경고문'과 같았습니다.

- 앞으로 미리 제출하지 않은 사유서(지각, 조퇴, 결근)는 연차 처리 하겠습니다.
- 지각사유서는 해당일 제출하지 않으면 승인처리 하지 않겠습니다.
- 미리 제출하는 사유서도 객관적인 증빙 없이는 승인되지 않으니 제출하지 말아주십시오.
- A 씨 회사 관리부가 보낸 메일 -

간신히 반차 차감을 면했다지만, A 씨의 마음은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에 또 대피 경보가 울리면 그때도 회사에 지각할까 봐, 또 대피 상황을 회사에 어떻게 증명할지 고민해야 할까 봐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다음에 또 그러면은 저는 또 대피 준비를 하다가 또 지각하겠죠. 시간 맞춰서 오려면 과속을 해야 하는데 너무 위험하잖아요. 그리고 이게 오발령이어서 다행이지, 진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그런 생각도 먼저 들죠."

■지각 횟수로 연차 차감은 '위법'…대피령은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근로계약서에 적혀 있는 대로 직장인이 근무시간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업무에 방해될 만큼 잦은 지각은 회사 내규에 따라 징계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근로자가 지각으로 일하지 않은 시간만큼 회사가 그만큼의 임금을 공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 A 씨 회사의 사례처럼 지각한 횟수만으로 연차를 차감하는 건 '위법'입니다.

근로기준법 제60조(연차 유급휴가) ⑤ 사용자는 제1항부터 제4항까지의 규정에 따른 휴가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주어야 하고, 그 기간에 대하여는 취업규칙 등에서 정하는 통상임금 또는 평균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다만,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휴가를 주는 것이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는 그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

권남표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근로기준법상 연차 휴가는 근로자가 원할 때 하루 치 평균 임금을 주고서 유급으로 쉬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며 "3분 지각을 했다면 3분 만큼의 임금을 차감할 수는 있어도, 지각을 두 번 했다고 0.5일 또는 하루의 '유급' 휴가를 차감하는 것은 무효"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만, 폭우나 폭설 등 기상 상의 천재지변이나 이번 A 씨의 사례처럼 대피경보로 인한 혼란으로 지각했더라도, 사유를 인정해주지 않는 회사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묻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천재지변에 따른 결근을 유급으로 인정해주는 별도의 취업규칙이나 노사 간 단체협약이 있지 않은 한, 법적으로 노동자가 그러한 사유들을 일일이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회사 관리자급이 천재지변 상황을 인지하고 직원들에게 근무 시간을 늦추거나 재택근무를 권유하는 방식으로 공지하는 게 가장 통상적인 방법입니다.

박은하 노무사는 "A 씨 사례는 회사의 잘못도, 근로자의 잘못도 아닌 지자체의 행정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이 실수를 회사가 다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3분 지각한 근로자에게 '대피를 증명하라'는 등의 질책은 근로자 입장에서 억울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박 노무사는 "무엇보다 지각 횟수로 반차 차감을 규정한 취업규칙 자체가 근로기준법 위반인 만큼, 이를 걸러내지 못한 노동청에 1차적인 책임이 있고, 시정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촬영기자: 조창훈/ 인포그래픽: 김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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