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목수 사진가’ 정명식이 포착한 풍경의 ‘깊이’

입력 2023.06.22 (11:34) 수정 2023.07.2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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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 60×8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3종묘(宗廟), 60×8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3

여기,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화면 아래에서 위로 유려하게 흐르는 곡선의 기와, 그리고 그 끝에서 비로소 활짝 열리는 드넓은 공간. 박석(薄石)이라 불리는 얇고 넓적한 돌덩어리가 오밀조밀 어우러져 마치 오래된 모자이크를 보는 듯 특별한 감흥을 주는 이곳을 옛사람들은 월대(月臺)라 불렀죠. 종묘 정전 지붕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지붕에서 본 풍경. 그래서 저는 루프탑 뷰(Rooftop View)라 이름 붙이기로 했습니다. 감히 종묘 정전 지붕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은 사람은 대체 누굴까.

정명식은 궁궐 목수입니다. 궁궐과 왕릉, 사찰 등에서 우리 건축문화유산을 돌보는 일을 하죠. 그러니 지붕에 올라가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깨지고 무너져 흘러내린 지붕을 말끔하게 수리하는 작업의 마지막은 사진으로 작업의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목수의 사진은 그렇게 찍혔고, 목수가 사진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사진들은 다른 작가들에게는 없는 '궁궐목수 사진가'의 독보적인 영역이 됐죠.

비밀의 정원, 40×4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창덕궁 후원, 2019비밀의 정원, 40×4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창덕궁 후원, 2019

창덕궁 후원은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비원(秘苑)으로 불렸습니다. 보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비밀의 정원. 창덕궁 후원의 비경은 그 초입에 아담하게 자리한 연못 부용지(芙蓉池)를 높은 곳으로 내려다본 풍경입니다. 사람 발자국 하나 없이 고요한 어둠 속에 잠긴 공간. 궁궐의 속내를 속속들이 아는 이가 아니라면 찾아낼 수 없는 풍경. 2019년 겨울, 목수 사진가는 멀리 길을 돌아 그 비경을 가만히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정명식 작가는 자연스럽게 목수가 됐습니다. 2004년부터 한옥과 사찰을 매만지는 일을 시작했고, 2011년부터는 문화재청 소속 대목수로 4대 궁궐과 종묘, 사직, 왕릉의 건축물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시선과 감각으로 포착한 우리 문화유산을 사진에 담아 발표하기 시작했죠.

일승의 끈, 110 X 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서산 부석사, 2016일승의 끈, 110 X 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서산 부석사, 2016

'다른 시선'으로 포착한 정명식 사진의 독보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사찰의 범종을 사진에 담은 이는 무수히 많았겠죠. 하지만 범종을 때려 소리를 내는 당목(撞木)을, 그 당목을 붙들고 있는 저 줄을, 줄을 감싼 천에 눈길을 준 이가 과연 있었을까. 범종과 한 몸을 이뤄 긴 세월 묵묵히 소리를 울리며 조금씩 헤져 올이 풀린 저 천만큼 범종의 존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요.

2010년 뜻하지 않게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스님의 다비식에 참여한 인연이 있습니다. 불교식 장례 의식이 처음이었던 제게 망자의 시신을 태우는 행위는 무척이나 생소하게 다가왔죠. 다비(茶毘). 육신을 원래 이뤄진 곳으로 돌려보내는 불가의 예법. 사찰 문화유산 보수에도 오랫동안 참여한 목수 사진가의 눈엔 그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다비(茶毘) #5, 50×5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2019다비(茶毘) #5, 50×5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2019

정명식 작가가 2007년 이후 16년 만에 광주에서 개인전을 엽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12년 동안 궁궐과 왕릉, 사찰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포착한 내밀한 풍경들을 선보입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우리의 아름다운 궁궐의 곡선, 산사의 다비식, 범종을 매단 줄, 반가사유상의 색다른 아름다움까지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엄선한 사진 작품 34점을 전시장에 걸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AM 6:20>이란 제목의 작품입니다. 무려 사진 1천8백여 컷을 모아 구성한 가로 세로 3m의 대형 설치 작품이죠. 12년 전, 목수로 궁궐에 처음 발을 들인 그 날부터 매일 꼬박꼬박 오전 6시 20분에 촬영한 사진을 모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결정체이자 감성과 지성의 통합체죠.

AM 0620, 70×50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2011~2023AM 0620, 70×50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2011~2023

미술사학자 류승민은 이 야심만만한 작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정명식 작가는 ‘A.M.06:20’이라는 시간의 단면에 창덕궁의 수천 날을 담으며 그 시간과 배타적인 관계를 만들었는데, 그런 관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우정’의 전제가 된다. 우리는 그의 사진들에 누적된 시간을 보면서 그가 우리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특별한 관계도 찾아 보아야 한다. 그의 사진들이 늘어선 앞에 서면, 그저 사진작가와 피사체의 관계가 아닌 우정이란 작가 정명식과 창덕궁, 그 장소가 존재하는 06시 20분의 순간과 지속으로 형성된 배타적인 관계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보여주는 ‘배타적 관계, 우정’은 순간의 파편 사이에 살고 있는 듯한 우리에게 자기가 만든 관계들을 떠올리고, 자기의 우정을 찾아보도록 할 것이다. 정명식 작가, “한국을 드러내는(KOREA.UNCOVERED)” 이미지들을 대표하여 작가의 우정을 보여주려 하니, 대담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대담한 만큼 인문적 사유도 깊음을 느끼겠다. 그런 사유는 관계 이면에 있는, 누적된 시간에서 나온 것임도 틀림없을 것이다.

정명식 작가 (사진: 권혁재)정명식 작가 (사진: 권혁재)

■전시 정보
제목: 정명식 KOREA, UNCOVERED
기간: 2023년 6월 19일(월)~7월 29일(토)
장소: 예술이빽그라운드 (광주광역시 동구 구성로 204번길 1-1)
작품: 사진 34점
문의: 062-226-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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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22 11:34:26
    • 수정2023-07-26 09: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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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 60×8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3
여기,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화면 아래에서 위로 유려하게 흐르는 곡선의 기와, 그리고 그 끝에서 비로소 활짝 열리는 드넓은 공간. 박석(薄石)이라 불리는 얇고 넓적한 돌덩어리가 오밀조밀 어우러져 마치 오래된 모자이크를 보는 듯 특별한 감흥을 주는 이곳을 옛사람들은 월대(月臺)라 불렀죠. 종묘 정전 지붕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지붕에서 본 풍경. 그래서 저는 루프탑 뷰(Rooftop View)라 이름 붙이기로 했습니다. 감히 종묘 정전 지붕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은 사람은 대체 누굴까.

정명식은 궁궐 목수입니다. 궁궐과 왕릉, 사찰 등에서 우리 건축문화유산을 돌보는 일을 하죠. 그러니 지붕에 올라가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깨지고 무너져 흘러내린 지붕을 말끔하게 수리하는 작업의 마지막은 사진으로 작업의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목수의 사진은 그렇게 찍혔고, 목수가 사진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사진들은 다른 작가들에게는 없는 '궁궐목수 사진가'의 독보적인 영역이 됐죠.

비밀의 정원, 40×4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창덕궁 후원, 2019
창덕궁 후원은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비원(秘苑)으로 불렸습니다. 보기만 해도 절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비밀의 정원. 창덕궁 후원의 비경은 그 초입에 아담하게 자리한 연못 부용지(芙蓉池)를 높은 곳으로 내려다본 풍경입니다. 사람 발자국 하나 없이 고요한 어둠 속에 잠긴 공간. 궁궐의 속내를 속속들이 아는 이가 아니라면 찾아낼 수 없는 풍경. 2019년 겨울, 목수 사진가는 멀리 길을 돌아 그 비경을 가만히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정명식 작가는 자연스럽게 목수가 됐습니다. 2004년부터 한옥과 사찰을 매만지는 일을 시작했고, 2011년부터는 문화재청 소속 대목수로 4대 궁궐과 종묘, 사직, 왕릉의 건축물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시선과 감각으로 포착한 우리 문화유산을 사진에 담아 발표하기 시작했죠.

일승의 끈, 110 X 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서산 부석사, 2016
'다른 시선'으로 포착한 정명식 사진의 독보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사찰의 범종을 사진에 담은 이는 무수히 많았겠죠. 하지만 범종을 때려 소리를 내는 당목(撞木)을, 그 당목을 붙들고 있는 저 줄을, 줄을 감싼 천에 눈길을 준 이가 과연 있었을까. 범종과 한 몸을 이뤄 긴 세월 묵묵히 소리를 울리며 조금씩 헤져 올이 풀린 저 천만큼 범종의 존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요.

2010년 뜻하지 않게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스님의 다비식에 참여한 인연이 있습니다. 불교식 장례 의식이 처음이었던 제게 망자의 시신을 태우는 행위는 무척이나 생소하게 다가왔죠. 다비(茶毘). 육신을 원래 이뤄진 곳으로 돌려보내는 불가의 예법. 사찰 문화유산 보수에도 오랫동안 참여한 목수 사진가의 눈엔 그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다비(茶毘) #5, 50×5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2019
정명식 작가가 2007년 이후 16년 만에 광주에서 개인전을 엽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12년 동안 궁궐과 왕릉, 사찰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포착한 내밀한 풍경들을 선보입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우리의 아름다운 궁궐의 곡선, 산사의 다비식, 범종을 매단 줄, 반가사유상의 색다른 아름다움까지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엄선한 사진 작품 34점을 전시장에 걸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AM 6:20>이란 제목의 작품입니다. 무려 사진 1천8백여 컷을 모아 구성한 가로 세로 3m의 대형 설치 작품이죠. 12년 전, 목수로 궁궐에 처음 발을 들인 그 날부터 매일 꼬박꼬박 오전 6시 20분에 촬영한 사진을 모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결정체이자 감성과 지성의 통합체죠.

AM 0620, 70×50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한지, 2011~2023
미술사학자 류승민은 이 야심만만한 작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정명식 작가는 ‘A.M.06:20’이라는 시간의 단면에 창덕궁의 수천 날을 담으며 그 시간과 배타적인 관계를 만들었는데, 그런 관계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 ‘우정’의 전제가 된다. 우리는 그의 사진들에 누적된 시간을 보면서 그가 우리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특별한 관계도 찾아 보아야 한다. 그의 사진들이 늘어선 앞에 서면, 그저 사진작가와 피사체의 관계가 아닌 우정이란 작가 정명식과 창덕궁, 그 장소가 존재하는 06시 20분의 순간과 지속으로 형성된 배타적인 관계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보여주는 ‘배타적 관계, 우정’은 순간의 파편 사이에 살고 있는 듯한 우리에게 자기가 만든 관계들을 떠올리고, 자기의 우정을 찾아보도록 할 것이다. 정명식 작가, “한국을 드러내는(KOREA.UNCOVERED)” 이미지들을 대표하여 작가의 우정을 보여주려 하니, 대담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대담한 만큼 인문적 사유도 깊음을 느끼겠다. 그런 사유는 관계 이면에 있는, 누적된 시간에서 나온 것임도 틀림없을 것이다.

정명식 작가 (사진: 권혁재)
■전시 정보
제목: 정명식 KOREA, UNCOVERED
기간: 2023년 6월 19일(월)~7월 29일(토)
장소: 예술이빽그라운드 (광주광역시 동구 구성로 204번길 1-1)
작품: 사진 34점
문의: 062-226-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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