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정치인들의 시계에 무슨 일이?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06.25 (08:00)
수정 2023.06.2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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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쁘라윗 웡수완 prawit wongsuwan' 부총리
시작은 이 한장의 사진에서부터입니다. '쁘라윗 웡수완' 부총리. 국방부장관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의 군 선배입니다. 군부의 큰형님이자 막후 실세입니다. 2014년 쿠데타 성공 이후 줄곧 부총리 자리를 지켰습니다. 쁘라윳 총리보다 더 친근하고 유연해서 오히려 더 정치인답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2017년 12월 4일, 쁘라윗 부총리는 장관들과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른손으로 햇빛을 가리려다 그의 시계가 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리차드 밀레'라는 시계로 250만바트(1억원 정도)짜리였습니다. 다이아몬드가 5캐럿 넘게 들어간 반지도 함께 포착됐습니다.
태국의 부자들은 (다른 개발도상국 부자들이 그러듯) 자신의 부를 잘 감추지 않습니다. 수퍼카를 번갈아타며 출근을 하고, 수억 원짜리 시계를 보란듯이 차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냥 그런 가십성 뉴스로 그치나 싶었는데, 기자들이 과거 그의 사진을 뒤져서 시계를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20개가 넘는 고가 시계들이 확인됐습니다. 2~3천만 원짜리 저렴한(?) 시계에서 1억 2천만 원이 넘는 시계도 있었습니다. 결국 "한달 수백만 원의 월급으로 이들 시계를 어떻게 구입했는가?", "왜 이들 고가의 시계를 공직자 재산목록에 신고하지 않았는가"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태국 공직자법은 공직자가 3천바트(12만원 정도)이상의 금품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쁘라윗부총리는 "친구에게 빌려서 10년 가까이 차고 있으며, 돌려주려고 했는데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고 답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친구인 '파타왓 석스리웡'은 실제 시계 논란이 번지기 열 달 전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쁘라윗부총리의 중학교 동창으로 '컴링크'라는 기업의 오너였습니다. 광섬유 케이블과 여러 장비를 정부에 납품해 왔습니다. 쁘라윗부총리는 허위 재산신고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CSI-LA 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 블로거가 분석한 쁘라윗 부총리의 시계들. 2014년 5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모두 22개로 2천여만 원 짜리부터 1억 2천만 원이 넘는 것도 있다. 사진 CSI-LA
2.국가부패방지위원회(NACC)의 결론은?
2018년 12월, 국가부패방지위원회(NACC)는 '쁘라윗 부총리가 시계를 모두 돌려줬으며, 고의로 재산을 은폐하려했던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쁘라윗 부총리가 고위직에 있으면서 시계를 빌려준 친구 회사에 어떤 혜택을 줬을 거라는 의혹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러자 '사건'지(The Matter)의 '퐁피팟 반차농' 기자가 태국 행정법원에
1)사건 기각의 구체적인 이유
2)기각 당시 NACC의원들 각각의 결정 내용
3)사건조사보고서
4)각 시계의 브랜드 이름과 일련번호, 가격
5)쁘라윗 부총리처럼 파타왓에게 시계를 빌린 다른 친구들의 이름을 공개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해당 사건은 결국 대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첫 보도 이후 5년이 지난 이달 중순, 태국 대법원은 이 모든 자료를 15일 이내에 퐁피탓 반차농기자에게 공개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비로소 '부총리 시계 사건'의 진실을 밝혀질까. SNS에는 총선에서 군부여당이 크게 패하자 이제서야 '공개' 판결이 내려졌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퐁피탓 반차농 기자는 지난 22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NACC 위원들은 절반 이상 군부에 의해 임명됐고, 이들은 절대 같은 편을 공격하지 않는다. 쁘라윗 부총리는 시계를 빌려줬다는 친구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는데, 친구가 죽을 때까지 시계를 반납하지 않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201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 출신의 쁘라윳 짠오차(69/왼쪽) 총리와 쁘라윗 웡수완(77) 부총리는 이번 총선에서 각각 친(親)군부 정당인 루엄타이쌍찻당(RTSC)과 팔랑쁘라차랏당(PPRP)을 이끌었지만, 전진당 등 야권 개혁세력의 1/4 의석을 얻는데 그쳤다. 2017년 12월 이후 쁘라윗 부총리(오른쪽)는 좀처럼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다. 사진 연합
3. 피타의 시계와 패통탄의 목걸이
이번 태국 총선에서 예상을 뒤집고 제 1당이 된 전진당(151석)의 피타 림짜른랏(42) 대표. '왕실모독죄' 등 사회현안을 직격하며 단숨에 태국 정치 개혁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고가의 시계를 여러차례 착용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100,000바트(우리돈 7천8백만 원 정도)짜리 시계도 있었습니다.
네티즌들은 탁신 전 총리의 딸이자 야당인 푸아타이당 총리 후보인 패통탄 친나왓(37)이 유세 도중 착용한 59만바트(2천2백만 원 정도)짜리 목걸이도 찾아냈습니다. 이들 개혁정치인들의 손과 목에 매달린 값비싼 액세사리는 쁘라윗 부총리의 시계와는 결이 다른 태국의 또다른 문제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은 정치지도자가 되기 힘든 태국 사회의 현실이 드러납니다.
이번 총선에서 152석을 얻으며 단번에 제 1당이 된 전진당의 피타 림짜른랏(42) 대표의 시계와 141석을 얻어 제 2당이 된 푸아타이당의 총리후보 패통탄 친나왓(탁신 전 총리의 딸/37)이 유세에 차고 나온 목걸이. 부자들의 정치가 익숙한 태국에서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사진 SNS
부의 격차가 워낙 크고, 더 부유한 계층으로의 사다리가 취약한 태국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국회의원이 된 뒤, 정치 지도자로 발돋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난한데 출세한 사람은 '리사(블랙핑크)'밖에 없다"는 우수갯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실제 피타 대표도 정치명문가 출신입니다. 부유한 기업인의 아들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자랐고, 하버드대와 MIT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태국의 유일한 전국 정당이자 야당인 푸아타이당도 과거 재벌가였던 탁신 가문이 이끌고 있습니다.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총리는 과거 태국 최대 통신회사 AIS의 대주주였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도 푸아타이당의 후보들은 비교적 넉넉한 재정으로 선거를 치른 반면, 군부 여당의 후보들은 재정난에 시달렸습니다. "(당에서 돈이 오지않아) 후보를 사퇴한다"는 후보도 있었습니다.
4. 태국 정치인들의 시계가 말하는 것
쿠데타가 반복되며 늘 경제의 발목을 잡는 태국 정치는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부정부패 척결과 극심한 사회 격차의 해소입니다. 우연히 드러난 태국 정치지도자들의 값비싼 시계는 이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숨지면 보통 민사 보상금으로 100만바트(4천만원 정도)가 지급되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1억 원짜리 시계를 보란듯이 차고 다닙니다.
방콕의 대졸 신입사원 월급 10년치를 고스란히 모아야 살 수 있는 쁘라윗 부총리의 시계는 태국의 정치인이 유권자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총선에서 패배한 쁘라윗 부총리(77)는 이대로 연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권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계문제로 사법처리될 것으로 믿는 태국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총선 패배 이후 거취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쁘라윗 부총리는 "정치를 그만두는 것은 생각도 안해봤다"고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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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3-06-25 08:00:05
- 수정2023-06-25 08:10:33
1. '쁘라윗 웡수완 prawit wongsuwan' 부총리
시작은 이 한장의 사진에서부터입니다. '쁘라윗 웡수완' 부총리. 국방부장관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의 군 선배입니다. 군부의 큰형님이자 막후 실세입니다. 2014년 쿠데타 성공 이후 줄곧 부총리 자리를 지켰습니다. 쁘라윳 총리보다 더 친근하고 유연해서 오히려 더 정치인답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2017년 12월 4일, 쁘라윗 부총리는 장관들과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른손으로 햇빛을 가리려다 그의 시계가 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리차드 밀레'라는 시계로 250만바트(1억원 정도)짜리였습니다. 다이아몬드가 5캐럿 넘게 들어간 반지도 함께 포착됐습니다.
태국의 부자들은 (다른 개발도상국 부자들이 그러듯) 자신의 부를 잘 감추지 않습니다. 수퍼카를 번갈아타며 출근을 하고, 수억 원짜리 시계를 보란듯이 차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냥 그런 가십성 뉴스로 그치나 싶었는데, 기자들이 과거 그의 사진을 뒤져서 시계를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20개가 넘는 고가 시계들이 확인됐습니다. 2~3천만 원짜리 저렴한(?) 시계에서 1억 2천만 원이 넘는 시계도 있었습니다. 결국 "한달 수백만 원의 월급으로 이들 시계를 어떻게 구입했는가?", "왜 이들 고가의 시계를 공직자 재산목록에 신고하지 않았는가"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태국 공직자법은 공직자가 3천바트(12만원 정도)이상의 금품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쁘라윗부총리는 "친구에게 빌려서 10년 가까이 차고 있으며, 돌려주려고 했는데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고 답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친구인 '파타왓 석스리웡'은 실제 시계 논란이 번지기 열 달 전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쁘라윗부총리의 중학교 동창으로 '컴링크'라는 기업의 오너였습니다. 광섬유 케이블과 여러 장비를 정부에 납품해 왔습니다. 쁘라윗부총리는 허위 재산신고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2.국가부패방지위원회(NACC)의 결론은?
2018년 12월, 국가부패방지위원회(NACC)는 '쁘라윗 부총리가 시계를 모두 돌려줬으며, 고의로 재산을 은폐하려했던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쁘라윗 부총리가 고위직에 있으면서 시계를 빌려준 친구 회사에 어떤 혜택을 줬을 거라는 의혹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러자 '사건'지(The Matter)의 '퐁피팟 반차농' 기자가 태국 행정법원에
1)사건 기각의 구체적인 이유
2)기각 당시 NACC의원들 각각의 결정 내용
3)사건조사보고서
4)각 시계의 브랜드 이름과 일련번호, 가격
5)쁘라윗 부총리처럼 파타왓에게 시계를 빌린 다른 친구들의 이름을 공개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해당 사건은 결국 대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첫 보도 이후 5년이 지난 이달 중순, 태국 대법원은 이 모든 자료를 15일 이내에 퐁피탓 반차농기자에게 공개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비로소 '부총리 시계 사건'의 진실을 밝혀질까. SNS에는 총선에서 군부여당이 크게 패하자 이제서야 '공개' 판결이 내려졌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퐁피탓 반차농 기자는 지난 22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NACC 위원들은 절반 이상 군부에 의해 임명됐고, 이들은 절대 같은 편을 공격하지 않는다. 쁘라윗 부총리는 시계를 빌려줬다는 친구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는데, 친구가 죽을 때까지 시계를 반납하지 않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3. 피타의 시계와 패통탄의 목걸이
이번 태국 총선에서 예상을 뒤집고 제 1당이 된 전진당(151석)의 피타 림짜른랏(42) 대표. '왕실모독죄' 등 사회현안을 직격하며 단숨에 태국 정치 개혁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고가의 시계를 여러차례 착용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100,000바트(우리돈 7천8백만 원 정도)짜리 시계도 있었습니다.
네티즌들은 탁신 전 총리의 딸이자 야당인 푸아타이당 총리 후보인 패통탄 친나왓(37)이 유세 도중 착용한 59만바트(2천2백만 원 정도)짜리 목걸이도 찾아냈습니다. 이들 개혁정치인들의 손과 목에 매달린 값비싼 액세사리는 쁘라윗 부총리의 시계와는 결이 다른 태국의 또다른 문제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은 정치지도자가 되기 힘든 태국 사회의 현실이 드러납니다.
부의 격차가 워낙 크고, 더 부유한 계층으로의 사다리가 취약한 태국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국회의원이 된 뒤, 정치 지도자로 발돋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난한데 출세한 사람은 '리사(블랙핑크)'밖에 없다"는 우수갯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실제 피타 대표도 정치명문가 출신입니다. 부유한 기업인의 아들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자랐고, 하버드대와 MIT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태국의 유일한 전국 정당이자 야당인 푸아타이당도 과거 재벌가였던 탁신 가문이 이끌고 있습니다.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총리는 과거 태국 최대 통신회사 AIS의 대주주였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도 푸아타이당의 후보들은 비교적 넉넉한 재정으로 선거를 치른 반면, 군부 여당의 후보들은 재정난에 시달렸습니다. "(당에서 돈이 오지않아) 후보를 사퇴한다"는 후보도 있었습니다.
4. 태국 정치인들의 시계가 말하는 것
쿠데타가 반복되며 늘 경제의 발목을 잡는 태국 정치는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부정부패 척결과 극심한 사회 격차의 해소입니다. 우연히 드러난 태국 정치지도자들의 값비싼 시계는 이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숨지면 보통 민사 보상금으로 100만바트(4천만원 정도)가 지급되는 나라에서, 정치인들이 1억 원짜리 시계를 보란듯이 차고 다닙니다.
방콕의 대졸 신입사원 월급 10년치를 고스란히 모아야 살 수 있는 쁘라윗 부총리의 시계는 태국의 정치인이 유권자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총선에서 패배한 쁘라윗 부총리(77)는 이대로 연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권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계문제로 사법처리될 것으로 믿는 태국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총선 패배 이후 거취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쁘라윗 부총리는 "정치를 그만두는 것은 생각도 안해봤다"고 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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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장 기자 kim9@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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