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또다른 비극의 공간’, 형무소…어느 교도관의 기억
입력 2023.06.25 (08:00)
수정 2023.06.25 (14:3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73년 전 오늘(1950년 6월 25일)은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날입니다.
당시 스무 살의 나이로 광주형무소에 근무했던 청년 교도관은 아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비참한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역자'로 몰려 감옥살이했던 날도, 형무소를 습격한 좌익세력에 맞서다 동료를 잃었던 날도, 동료 교도관이 탈옥하던 수감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걸 지켜봤던 날도 있었습니다.
전쟁 시기 교도소는 가해와 피해가 늘 뒤섞이는 비극의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정찬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위원은 "전쟁 직후 전국의 형무소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당시 군사재판이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진행됐기 때문에, 좌익세력이 아니더라도 형무소에 갇혀 희생당한 민간인도 많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형무소에서 좌익에 의한 학살과 우익에 의한 학살이 같이 일어났는데, 규모 면에서는 군경에 의한 학살 규모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젠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은 비극의 공간을, 어느 교도관의 증언으로 되짚어봅니다.
당시 스무 살의 나이로 광주형무소에 근무했던 청년 교도관은 아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비참한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역자'로 몰려 감옥살이했던 날도, 형무소를 습격한 좌익세력에 맞서다 동료를 잃었던 날도, 동료 교도관이 탈옥하던 수감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걸 지켜봤던 날도 있었습니다.
전쟁 시기 교도소는 가해와 피해가 늘 뒤섞이는 비극의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정찬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위원은 "전쟁 직후 전국의 형무소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당시 군사재판이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진행됐기 때문에, 좌익세력이 아니더라도 형무소에 갇혀 희생당한 민간인도 많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형무소에서 좌익에 의한 학살과 우익에 의한 학살이 같이 일어났는데, 규모 면에서는 군경에 의한 학살 규모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젠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은 비극의 공간을, 어느 교도관의 증언으로 되짚어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6.25 또다른 비극의 공간’, 형무소…어느 교도관의 기억
-
- 입력 2023-06-25 08:00:05
- 수정2023-06-25 14:31:37
73년 전 오늘(1950년 6월 25일)은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날입니다.
당시 스무 살의 나이로 광주형무소에 근무했던 청년 교도관은 아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비참한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역자'로 몰려 감옥살이했던 날도, 형무소를 습격한 좌익세력에 맞서다 동료를 잃었던 날도, 동료 교도관이 탈옥하던 수감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걸 지켜봤던 날도 있었습니다.
전쟁 시기 교도소는 가해와 피해가 늘 뒤섞이는 비극의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정찬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위원은 "전쟁 직후 전국의 형무소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당시 군사재판이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진행됐기 때문에, 좌익세력이 아니더라도 형무소에 갇혀 희생당한 민간인도 많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형무소에서 좌익에 의한 학살과 우익에 의한 학살이 같이 일어났는데, 규모 면에서는 군경에 의한 학살 규모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젠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은 비극의 공간을, 어느 교도관의 증언으로 되짚어봅니다.
당시 스무 살의 나이로 광주형무소에 근무했던 청년 교도관은 아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비참한 풍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역자'로 몰려 감옥살이했던 날도, 형무소를 습격한 좌익세력에 맞서다 동료를 잃었던 날도, 동료 교도관이 탈옥하던 수감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걸 지켜봤던 날도 있었습니다.
전쟁 시기 교도소는 가해와 피해가 늘 뒤섞이는 비극의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정찬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위원은 "전쟁 직후 전국의 형무소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당시 군사재판이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진행됐기 때문에, 좌익세력이 아니더라도 형무소에 갇혀 희생당한 민간인도 많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형무소에서 좌익에 의한 학살과 우익에 의한 학살이 같이 일어났는데, 규모 면에서는 군경에 의한 학살 규모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젠 기억하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은 비극의 공간을, 어느 교도관의 증언으로 되짚어봅니다.
-
-
이희연 기자 hear@kbs.co.kr
이희연 기자의 기사 모음
-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
좋아요
0
-
응원해요
0
-
후속 원해요
0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