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고와 두 명의 죽음, 남겨진 세 사람의 극복기

입력 2023.06.25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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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대개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다.

거실에 앉아 느긋하게 파김치를 담그던 명지(박하선 분)에게도 그런 식으로 불행이 급습한다.

그가 전화를 받고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시신 안치실이다. 숨이 멎은 남편 도경(전석호)이 하얀 천을 덮은 채 명지를 기다리고 있다. 명지의 시선은 퉁퉁 불어 결혼반지도 빼내기 어려워 보이는 도경의 손으로 향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명지는 스스로를 감금한다. 그는 남편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잃기 싫은 듯 암막 커튼을 치고 집안에서만 지낸다. 도경의 모습이 꿈과 현실을 오가며 아른거린다.

김희정 감독의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소개된 이 영화는 김애란 작가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실린 동명 단편을 바탕으로 했다.

김 감독은 201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 당시 김 작가에게서 직접 이 책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리며 완독할 만큼 울림이 컸다고 김 감독은 회상했다.

그래서인지 김 감독은 원작에 실린 문장 대부분을 영화에 가져왔다.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해 김 작가가 쓴 미문이 그대로 전달된다.

달라진 점도 있다. 영화에서 명지가 동굴 같은 집을 나와 향한 곳은 소설 속 스코틀랜드 에든버러가 아닌 바르샤바다. 그는 얼마간 집을 비우니 쉬다 가라는 사촌 언니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낯선 도시 바르샤바로 간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도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후회와 추억이 뒤섞인 꿈을 꾸고, 업무를 해치우듯 끼니를 해결한다.

바르샤바에서 유학 중인 대학 동창 현석(김남희)을 만날 때면 잠시나마 도경이 이젠 없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 좋다. 현석은 도경이 죽은 걸 모르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사인 도경은 계곡에 빠진 제자 지용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지용도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용의 누나 지은(정민주)은 정신적 충격으로 몸이 마비된다. 그 역시 곡기를 끊고 병원에 누워만 있는다.

지은은 소설에서는 명지에게 보낸 편지로 겨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지만, 영화에선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바뀌었다.

원작에는 없는 해수(문우진)라는 캐릭터도 등장한다. 그는 절친한 친구 지용을 잃었지만, 더 큰 슬픔에서 허우적대는 지은을 달랜다.

명지와 지은, 해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명지는 지은이 보낸 편지에서부터, 지은은 병원을 찾는 해수의 발걸음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 꼬리잡기하듯 위로를 건네자 눌렸던 감정이 비로소 분출된다.

극의 중심부에 선 지은과 해수의 서사에서는 김 감독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어쩌면 명지보다 더 절망적일 지은을 위해 해수를 선물한 것처럼 느껴진다. 동생 말고는 곁에 아무도 없는 지은이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소설 원작 영화의 고질적 문제가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 아쉬움을 남긴다. 글로 봤을 때 전해지던 감동이 영상을 통해서는 좀처럼 잘 전달되지 않는다. 소설 특유의 문어체를 입으로 듣다 보니 다소 어색하기도 하다. 잦은 플래시백과 음악의 사용, 쉽게 섞이지 않는 두 개의 서사는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다.

7월 5일 개봉. 104분. 12세 관람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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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의 사고와 두 명의 죽음, 남겨진 세 사람의 극복기
    • 입력 2023-06-25 08:09:35
    연합뉴스
불행은 대개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다.

거실에 앉아 느긋하게 파김치를 담그던 명지(박하선 분)에게도 그런 식으로 불행이 급습한다.

그가 전화를 받고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시신 안치실이다. 숨이 멎은 남편 도경(전석호)이 하얀 천을 덮은 채 명지를 기다리고 있다. 명지의 시선은 퉁퉁 불어 결혼반지도 빼내기 어려워 보이는 도경의 손으로 향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명지는 스스로를 감금한다. 그는 남편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잃기 싫은 듯 암막 커튼을 치고 집안에서만 지낸다. 도경의 모습이 꿈과 현실을 오가며 아른거린다.

김희정 감독의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소개된 이 영화는 김애란 작가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실린 동명 단편을 바탕으로 했다.

김 감독은 201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 당시 김 작가에게서 직접 이 책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리며 완독할 만큼 울림이 컸다고 김 감독은 회상했다.

그래서인지 김 감독은 원작에 실린 문장 대부분을 영화에 가져왔다.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해 김 작가가 쓴 미문이 그대로 전달된다.

달라진 점도 있다. 영화에서 명지가 동굴 같은 집을 나와 향한 곳은 소설 속 스코틀랜드 에든버러가 아닌 바르샤바다. 그는 얼마간 집을 비우니 쉬다 가라는 사촌 언니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낯선 도시 바르샤바로 간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도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후회와 추억이 뒤섞인 꿈을 꾸고, 업무를 해치우듯 끼니를 해결한다.

바르샤바에서 유학 중인 대학 동창 현석(김남희)을 만날 때면 잠시나마 도경이 이젠 없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어 좋다. 현석은 도경이 죽은 걸 모르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사인 도경은 계곡에 빠진 제자 지용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지용도 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용의 누나 지은(정민주)은 정신적 충격으로 몸이 마비된다. 그 역시 곡기를 끊고 병원에 누워만 있는다.

지은은 소설에서는 명지에게 보낸 편지로 겨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지만, 영화에선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바뀌었다.

원작에는 없는 해수(문우진)라는 캐릭터도 등장한다. 그는 절친한 친구 지용을 잃었지만, 더 큰 슬픔에서 허우적대는 지은을 달랜다.

명지와 지은, 해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명지는 지은이 보낸 편지에서부터, 지은은 병원을 찾는 해수의 발걸음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 꼬리잡기하듯 위로를 건네자 눌렸던 감정이 비로소 분출된다.

극의 중심부에 선 지은과 해수의 서사에서는 김 감독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어쩌면 명지보다 더 절망적일 지은을 위해 해수를 선물한 것처럼 느껴진다. 동생 말고는 곁에 아무도 없는 지은이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소설 원작 영화의 고질적 문제가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 아쉬움을 남긴다. 글로 봤을 때 전해지던 감동이 영상을 통해서는 좀처럼 잘 전달되지 않는다. 소설 특유의 문어체를 입으로 듣다 보니 다소 어색하기도 하다. 잦은 플래시백과 음악의 사용, 쉽게 섞이지 않는 두 개의 서사는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다.

7월 5일 개봉. 104분. 12세 관람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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