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때 행방불명 이재몽…차초강 씨는 아들을 찾을 수 있을까? [영상채록 5·18]

입력 2023.07.06 (08:00) 수정 2023.07.0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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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행방불명자 이재몽의 비 (국립5·18민주묘지)5·18 행방불명자 이재몽의 비 (국립5·18민주묘지)

뼈라도 찾아서 나 살았을 때 묻어주고 가면 좋겠다 했는데, 이제 재몽이 아버지도 가버리고 없고 나도 이제 팔십 다섯을 먹었더니 언제 갈지도 모르고. 내가 돌아다닐 수 있을 때만이라도 찾아서 묻는 데라도 보고 유골이라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1980년 20살이던 이재몽. 당시 광주시 대인시장 근처에서 계엄군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5·18 관련 공식 인정된 '행방불명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재몽은 할머니와 함께 마늘을 광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지게를 짊어지고 담양 대전면의 집에서 광주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그게 어머니 차초강 씨가 아들을 본 마지막이 됐습니다.

행방불명자 이재몽의 어머니 차초강 씨 (왼쪽은 이재몽의 어릴 적 사진, 2023년 6월 19일)행방불명자 이재몽의 어머니 차초강 씨 (왼쪽은 이재몽의 어릴 적 사진, 2023년 6월 19일)

차 씨는 큰 아들 이재몽의 아기 때 사진만 갖고 있습니다. 실종됐을 당시 나이가 20살, 제대로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면 이제 63살,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입니다.

차 씨는 4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혹시나 하는 기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들을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차초강 씨를 만났습니다.

■ 5·18이 일어난 줄도 몰랐던 농촌 마을

이재몽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중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은 탓에 농사일을 거들었고,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마늘을 팔러 가기도 한 겁니다. 80년 5월 그날도 그랬습니다. 담양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가 왜 끊겼는지도 모른 채 걸어서 당시 신역으로 부르던 광주역 근처 공판장까지 지게를 짊어지고 걸어간 겁니다.

전남 담양군 자택에서 인터뷰 중인 차초강 씨전남 담양군 자택에서 인터뷰 중인 차초강 씨

그날 마늘 팔러 가려고 버스를 타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버스 안 다닌다고 그래요. 왜 안 다니냐고 물어보니까 "광주 난리 났는데 모르냐?"고 그래요. 우리는 모른다고 그랬죠.

■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만난 계엄군

이재몽과 함께 마늘을 팔러 광주에 갔던 시어머니는 집에 혼자 돌아왔습니다. 차초강 씨는 시어머니로부터 재몽이가 누군가에게 끌려갔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광주 시내 시장 근처에서 지게를 빼앗더니 재몽이를 잡아서 차에 태우고 가버렸다는 겁니다. 시어머니는 '시퍼런 차'가 와서 그런 짓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시어머니한테 왜 재몽이를 안 데리고 오시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어떤 놈들이 잡아가버렸다" 그래요. "시퍼런 차가 와서 아이 지게를 뺏어 버리고 팔을 끄집고 차에 태워서 가버리더라."
어머니도 느닷없이 잡아서 끌고 가니까 어안이 벙벙했겠죠, 무슨 일인가 하고.

차초강 씨는 그날만 해도 아들 재몽이가 계엄군에 끌려갔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재몽이의 친구들이 데려간 것일 수 있다고 여기고, 그냥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시어머니가 '시퍼런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데려갔다고 했지만 광주에 계엄군이 깔리고 이른바 '난리'가 난 줄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 행방이 묘연해진 집안의 장남

차초강 씨는 아들이 실종된 직후 적극적으로 찾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정보가 없었고, 형편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또, 과거에도 오랫동안 광주에 가서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었기에 기약 없이 기다린 겁니다. 나중에서야 주변 사람들로부터 5·18 때문에 끌려간 것 같다고 신고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손주 이재몽과 함께 광주에 갔다가 혼자 돌아온 할머니. 누구보다 상심이 컸을 할머니는 큰 손주를 애타게 기다리다 영영 보지 못한 채 5년 뒤 돌아가셨습니다.

한 달, 두 달 지나고 일 년 넘어도 영영 안 들어오고 말아버리니까.
나는 벌어 먹고 살려고 일 다니고 하느라 몰랐는데, 할머니가 너무나 애통해하셨어요. 항상 문만 바라다보고 오늘이나 오려나 내일이나 오려나 하면서. "이놈의 새끼가 오늘도 안 오는구나" 그러시고. 그렇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돌아가셨어요.

■ 1985년 아들 사망신고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아들 이재몽. 가족들은 결국 1985년 사망신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20대 나이인데 군대에 안 갔으니 병역 기피자로 의심받은 겁니다. 당시 군인들까지 집에 들이닥쳐 이재몽을 찾는다며 집안을 들쑤셨습니다.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가족들을 두 번 울린 셈입니다.

재몽이를 감춰놓고 안 내놓은 줄 알고 군인들이 막 집을 뒤지고 했어요. 그냥 막 난리가 났어요. 그러니까 애 아버지가 무서워서 사망신고를 내버렸어요.

■ 기약 없는 기다림

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5·18 당시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이후 지난해 9월 이 유골들 가운데 1구가 5·18 당시 실종된 행방불명자와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42년 만의 암매장과 행방불명자 관련 첫 확인입니다.

차초강 씨는 지난해 잠깐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전에 유전자 검사도 다 해놓은 데다 확인된 유골이 아들 재몽과 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별다른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속만 답답해 죽겠어요. 혹시, 혹시 내일이라도 소식이 오려나 내일이라도 소식이 오려나 이렇게 무한정 기다리고만 있으니. 누가 이렇게 오면 '혹시나 무슨 소식 갖고 오나' 하고 문 열어보고.

이재몽 비 옆에 놓인 사진 (5·18민주묘지 10구역)이재몽 비 옆에 놓인 사진 (5·18민주묘지 10구역)

차초강 씨는 올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5·18민주묘지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들 비가 있는 곳은 1묘역의 가장 오른쪽 끝의 10구역. 행방불명자 구역입니다. 찾을 때마다 속이 상하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40년 넘게 흘러도 마찬가지입니다.

■ "보고 싶은데 꿈에도 안 나와"

차초강 씨는 "아들이 너무 보고 싶은데 꿈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며 한탄합니다. 1940년생 만 나이로 83살,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이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걷고 돌아다닐 수 있을 때만이라도 아들을 찾아 묻어주고 싶다는 말을 취재진에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어머니는 인터뷰가 끝나고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취재진을 배웅하러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인터뷰하러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는 아드님 찾으시면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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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행방불명자 이재몽의 비 (국립5·18민주묘지)
뼈라도 찾아서 나 살았을 때 묻어주고 가면 좋겠다 했는데, 이제 재몽이 아버지도 가버리고 없고 나도 이제 팔십 다섯을 먹었더니 언제 갈지도 모르고. 내가 돌아다닐 수 있을 때만이라도 찾아서 묻는 데라도 보고 유골이라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1980년 20살이던 이재몽. 당시 광주시 대인시장 근처에서 계엄군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5·18 관련 공식 인정된 '행방불명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재몽은 할머니와 함께 마늘을 광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지게를 짊어지고 담양 대전면의 집에서 광주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그게 어머니 차초강 씨가 아들을 본 마지막이 됐습니다.

행방불명자 이재몽의 어머니 차초강 씨 (왼쪽은 이재몽의 어릴 적 사진, 2023년 6월 19일)
차 씨는 큰 아들 이재몽의 아기 때 사진만 갖고 있습니다. 실종됐을 당시 나이가 20살, 제대로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면 이제 63살,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입니다.

차 씨는 4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혹시나 하는 기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들을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KBS광주「영상채록 5·18」취재진이 차초강 씨를 만났습니다.

■ 5·18이 일어난 줄도 몰랐던 농촌 마을

이재몽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중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은 탓에 농사일을 거들었고,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마늘을 팔러 가기도 한 겁니다. 80년 5월 그날도 그랬습니다. 담양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가 왜 끊겼는지도 모른 채 걸어서 당시 신역으로 부르던 광주역 근처 공판장까지 지게를 짊어지고 걸어간 겁니다.

전남 담양군 자택에서 인터뷰 중인 차초강 씨
그날 마늘 팔러 가려고 버스를 타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버스 안 다닌다고 그래요. 왜 안 다니냐고 물어보니까 "광주 난리 났는데 모르냐?"고 그래요. 우리는 모른다고 그랬죠.

■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만난 계엄군

이재몽과 함께 마늘을 팔러 광주에 갔던 시어머니는 집에 혼자 돌아왔습니다. 차초강 씨는 시어머니로부터 재몽이가 누군가에게 끌려갔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광주 시내 시장 근처에서 지게를 빼앗더니 재몽이를 잡아서 차에 태우고 가버렸다는 겁니다. 시어머니는 '시퍼런 차'가 와서 그런 짓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시어머니한테 왜 재몽이를 안 데리고 오시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어떤 놈들이 잡아가버렸다" 그래요. "시퍼런 차가 와서 아이 지게를 뺏어 버리고 팔을 끄집고 차에 태워서 가버리더라."
어머니도 느닷없이 잡아서 끌고 가니까 어안이 벙벙했겠죠, 무슨 일인가 하고.

차초강 씨는 그날만 해도 아들 재몽이가 계엄군에 끌려갔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재몽이의 친구들이 데려간 것일 수 있다고 여기고, 그냥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시어머니가 '시퍼런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데려갔다고 했지만 광주에 계엄군이 깔리고 이른바 '난리'가 난 줄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 행방이 묘연해진 집안의 장남

차초강 씨는 아들이 실종된 직후 적극적으로 찾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정보가 없었고, 형편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또, 과거에도 오랫동안 광주에 가서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었기에 기약 없이 기다린 겁니다. 나중에서야 주변 사람들로부터 5·18 때문에 끌려간 것 같다고 신고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손주 이재몽과 함께 광주에 갔다가 혼자 돌아온 할머니. 누구보다 상심이 컸을 할머니는 큰 손주를 애타게 기다리다 영영 보지 못한 채 5년 뒤 돌아가셨습니다.

한 달, 두 달 지나고 일 년 넘어도 영영 안 들어오고 말아버리니까.
나는 벌어 먹고 살려고 일 다니고 하느라 몰랐는데, 할머니가 너무나 애통해하셨어요. 항상 문만 바라다보고 오늘이나 오려나 내일이나 오려나 하면서. "이놈의 새끼가 오늘도 안 오는구나" 그러시고. 그렇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돌아가셨어요.

■ 1985년 아들 사망신고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은 아들 이재몽. 가족들은 결국 1985년 사망신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20대 나이인데 군대에 안 갔으니 병역 기피자로 의심받은 겁니다. 당시 군인들까지 집에 들이닥쳐 이재몽을 찾는다며 집안을 들쑤셨습니다. 행방불명된 아들을 찾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가족들을 두 번 울린 셈입니다.

재몽이를 감춰놓고 안 내놓은 줄 알고 군인들이 막 집을 뒤지고 했어요. 그냥 막 난리가 났어요. 그러니까 애 아버지가 무서워서 사망신고를 내버렸어요.

■ 기약 없는 기다림

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지에서 5·18 당시 암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이후 지난해 9월 이 유골들 가운데 1구가 5·18 당시 실종된 행방불명자와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42년 만의 암매장과 행방불명자 관련 첫 확인입니다.

차초강 씨는 지난해 잠깐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전에 유전자 검사도 다 해놓은 데다 확인된 유골이 아들 재몽과 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별다른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속만 답답해 죽겠어요. 혹시, 혹시 내일이라도 소식이 오려나 내일이라도 소식이 오려나 이렇게 무한정 기다리고만 있으니. 누가 이렇게 오면 '혹시나 무슨 소식 갖고 오나' 하고 문 열어보고.

이재몽 비 옆에 놓인 사진 (5·18민주묘지 10구역)
차초강 씨는 올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5·18민주묘지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들 비가 있는 곳은 1묘역의 가장 오른쪽 끝의 10구역. 행방불명자 구역입니다. 찾을 때마다 속이 상하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40년 넘게 흘러도 마찬가지입니다.

■ "보고 싶은데 꿈에도 안 나와"

차초강 씨는 "아들이 너무 보고 싶은데 꿈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며 한탄합니다. 1940년생 만 나이로 83살, 건강도 예전 같지 않고 이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걷고 돌아다닐 수 있을 때만이라도 아들을 찾아 묻어주고 싶다는 말을 취재진에 몇 번이고 반복했습니다.


어머니는 인터뷰가 끝나고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취재진을 배웅하러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인터뷰하러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는 아드님 찾으시면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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