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은 어떻게 북한에 갔나?…첫 남북 회담의 막전막후

입력 2023.07.06 (14:24)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972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박성철 북한 부수상. / 통일부 제공1972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박성철 북한 부수상. / 통일부 제공

1971년 11월 20일은 분단 후 남북 당국 간의 첫 공식 회담이 열린 날입니다. 전날이었던 19일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 측 제안으로 성사됐는데, 이를 포함한 총 11번의 실무자 간 비밀 접촉은 이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졌습니다. 통일부가 오늘 공개한 1971년 11월부터 1979년2월까지 정치 분야 남북회담문서 2권에 적혀 있는 회담들의 막전막후를 들여다봅니다.

■ '신임장' 두고 실랑이…"남측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북측은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11차례의 비밀 접촉 중에는 '신임장'이 관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분단 27년 만에 시도하는 '적지' 방문인 만큼, 초기에 북측은 남북 간 중요 대화를 위해 고위급의 신임장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남측은 문서 없이도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5차 실무자 접촉서 남측은 "우리가 책임지고 상호 대화를 전달하고 책임 있는 회답을 들려줄 신임하는 분, 즉 우리들을 각기 신임하는 웃어른으로리 측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귀측은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으로 확정해야겠다"고 북측에 제안했습니다.

김영주 당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보낸 ‘신변 안전 보장 각서’ / 통일부 제공김영주 당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보낸 ‘신변 안전 보장 각서’ / 통일부 제공

이들은 각각 남북한 권력의 2인자들로, 그러면서 남한 측은 "'중앙정보부장 귀하로 된 김영주 신임장을 가진 사람은 우리 측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이후 상대방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고 회담 첫 전체회의에서 신임장을 교환하는 절차를 거치는 형식은 지금도 남북 회담의 관행으로 남아 있습니다.

■ 이후락 부장, 김일성 동생 만나 "우리가 남북관계 해결의 주역이 되자"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평양에 방문한 이후락 부장. 1972년 5월 2일 평양의 주암초대소에서 김영주 부장과의 1차 회담을 갖습니다. 이 부장은 "(남북 간의)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점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 친한 친구도 말렸지만 김영주 선생의 정치적 역량을 믿고 왔다"며 "윗분의 신임이 두터운 김영주 선생과 내가 남북관계를 해결하는 주역이 되자"며 대화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후 김 부장은 "이 부장과 내가 정치 협상을 하는 만치 이 급에서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야 한다, 우리 당 총비 동지(김일성)와 박정희 대통령 간에 정치 협상을 열어야 한다"며 곧바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장은 "처음부터 김일성 수상과 박 대통령이 회담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며 신중론을 펼쳤습니다.

회담 내내 견해차는 좁히지 못했지만 남북은 ▲외세 간섭 없는 자주통일 ▲무력 사용을 배제하는 평화통일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의 단결 도모라는 '조국 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락·김일성 대화록은 비공개…3년 뒤엔 공개될까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이후락 부장과 김일성 주석의 대화록 내용은 이번 공개 문서에서는 빠졌습니다. 이 부장은 1972년 5월 당시 김일성 주석, 김영주 부장과 각각 두 차례씩 회담했는데, 회담문서공개심의회 검토 결과 김영주 부장과의 면담 내용만 공개하기로 한 겁니다.

하지만 당시 김 주석의 일부 발언은 이후락 부장의 언급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 주석은 1968년 공작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에 침투한 1·21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이후에는 6·25 전쟁 등의 동족상장의 비극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1972년 5월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과 김일성 주석이 악수하는 모습 / 통일부 제공1972년 5월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과 김일성 주석이 악수하는 모습 / 통일부 제공

그 뒤 이 부장은 1972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를 통해서도 "지난번 (김일성) 수상께서 '좌경 맹동분자들의 책동(1·21 사태)'을 나무란 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 부장 - 김 주석의 대화록을 공개하지 않는 배경으로 "이는 간접적이라도 정상 간 대화이기 때문에, 현행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공개했다"며 "발표 뒤 3년이 지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경우 재검토를 통해 공개 여부를 다시 결정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보공개법 제9조는 "국가안전보장·국방·통일·외교 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이후락은 어떻게 북한에 갔나?…첫 남북 회담의 막전막후
    • 입력 2023-07-06 14:24:08
    심층K
1972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박성철 북한 부수상. / 통일부 제공
1971년 11월 20일은 분단 후 남북 당국 간의 첫 공식 회담이 열린 날입니다. 전날이었던 19일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 측 제안으로 성사됐는데, 이를 포함한 총 11번의 실무자 간 비밀 접촉은 이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졌습니다. 통일부가 오늘 공개한 1971년 11월부터 1979년2월까지 정치 분야 남북회담문서 2권에 적혀 있는 회담들의 막전막후를 들여다봅니다.

■ '신임장' 두고 실랑이…"남측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북측은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11차례의 비밀 접촉 중에는 '신임장'이 관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분단 27년 만에 시도하는 '적지' 방문인 만큼, 초기에 북측은 남북 간 중요 대화를 위해 고위급의 신임장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남측은 문서 없이도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5차 실무자 접촉서 남측은 "우리가 책임지고 상호 대화를 전달하고 책임 있는 회답을 들려줄 신임하는 분, 즉 우리들을 각기 신임하는 웃어른으로리 측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귀측은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으로 확정해야겠다"고 북측에 제안했습니다.

김영주 당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보낸 ‘신변 안전 보장 각서’ / 통일부 제공
이들은 각각 남북한 권력의 2인자들로, 그러면서 남한 측은 "'중앙정보부장 귀하로 된 김영주 신임장을 가진 사람은 우리 측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이후 상대방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고 회담 첫 전체회의에서 신임장을 교환하는 절차를 거치는 형식은 지금도 남북 회담의 관행으로 남아 있습니다.

■ 이후락 부장, 김일성 동생 만나 "우리가 남북관계 해결의 주역이 되자"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평양에 방문한 이후락 부장. 1972년 5월 2일 평양의 주암초대소에서 김영주 부장과의 1차 회담을 갖습니다. 이 부장은 "(남북 간의)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점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 친한 친구도 말렸지만 김영주 선생의 정치적 역량을 믿고 왔다"며 "윗분의 신임이 두터운 김영주 선생과 내가 남북관계를 해결하는 주역이 되자"며 대화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후 김 부장은 "이 부장과 내가 정치 협상을 하는 만치 이 급에서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야 한다, 우리 당 총비 동지(김일성)와 박정희 대통령 간에 정치 협상을 열어야 한다"며 곧바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 부장은 "처음부터 김일성 수상과 박 대통령이 회담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며 신중론을 펼쳤습니다.

회담 내내 견해차는 좁히지 못했지만 남북은 ▲외세 간섭 없는 자주통일 ▲무력 사용을 배제하는 평화통일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의 단결 도모라는 '조국 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락·김일성 대화록은 비공개…3년 뒤엔 공개될까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이후락 부장과 김일성 주석의 대화록 내용은 이번 공개 문서에서는 빠졌습니다. 이 부장은 1972년 5월 당시 김일성 주석, 김영주 부장과 각각 두 차례씩 회담했는데, 회담문서공개심의회 검토 결과 김영주 부장과의 면담 내용만 공개하기로 한 겁니다.

하지만 당시 김 주석의 일부 발언은 이후락 부장의 언급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 주석은 1968년 공작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에 침투한 1·21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이후에는 6·25 전쟁 등의 동족상장의 비극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1972년 5월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과 김일성 주석이 악수하는 모습 / 통일부 제공
그 뒤 이 부장은 1972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를 통해서도 "지난번 (김일성) 수상께서 '좌경 맹동분자들의 책동(1·21 사태)'을 나무란 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 부장 - 김 주석의 대화록을 공개하지 않는 배경으로 "이는 간접적이라도 정상 간 대화이기 때문에, 현행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공개했다"며 "발표 뒤 3년이 지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경우 재검토를 통해 공개 여부를 다시 결정하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보공개법 제9조는 "국가안전보장·국방·통일·외교 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