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기숙사 지옥’…‘안심벨’이 대책? [주말엔]

입력 2023.07.15 (07:01) 수정 2023.07.15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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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의 주인공, 중학생 은희는 친오빠로부터 상습적으로 맞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어느 날, 은희는 오빠에게 뺨을 맞아 생긴 귀 통증으로 병원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아버지뻘 의사 선생님을 만납니다. 진단서가 필요한지 묻는 의사에게 은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하자 의사 선생님이 말합니다.

"증거가 되니까, 필요하면 얘기해. 알았지?"

영화 ‘벌새’의 포스터(출처 : 배급사 엣나인필름 공식 페이스북)영화 ‘벌새’의 포스터(출처 : 배급사 엣나인필름 공식 페이스북)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과 같은 은밀한 폭력에 맞서려면 특별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의사 선생님과 같은 주변 어른의 관심 어린 말 한마디는 피해자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기적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습니다.

■ 고문에 가까운 폭행…"우울하다" 말했지만 몰랐던 학교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직접 작성한 경남 기숙형 고등학교 입학지원서.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직접 작성한 경남 기숙형 고등학교 입학지원서.

지난 3월, 직접 입학지원서를 쓸 만큼 간절히 원했던 경남의 한 기숙형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A군. 그러나 A 군은 반년 만에 이 학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학교폭력' 때문이었습니다.

A 군은 지난 3월부터 두 달 동안 2학년생 B 군 등 4명으로부터 폭행을 당했습니다. 기숙사 안에서 가해 학생들에게 죽도나 목검으로 맞았고, 흉기로 위협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밤 중 이유도 없이 '얼차려'를 당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가해 학생들은 샤워 중 A군 얼굴에 가래침을 뱉거나 몸에 소변을 누고, 차가운 물을 끼얹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을 하거나 피해자를 옷장에 들어가게 한 뒤 드라이기로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기도 했습니다. 고문에 가까운 엽기적 폭행이 이어진 것입니다.

폭행은 대부분 학교 기숙사에서 발생했지만, 학교 측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피해 학생은 선생님들에게 몇 차례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3월에 즐겁게 지내다가 4월이 되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아이들 말로 '현타'가 오는 거죠. 그래서 그 시기에 우울하다고 하는 아이들이 좀 있지만, 폭력 때문에 그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죠." -OO고등학교 교사-

견디다 못해 짐을 챙겨 기숙사를 뛰쳐나온 A 군이 부모님에게 전학을 요구한 뒤에야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 학폭위 결론, 출석정지와 학급교체?

학부모의 신고로 사건을 접수한 교육 당국은 두 차례 학교폭력심의위원회를 열었습니다. 학폭위가 B 군을 포함한 가해 학생 4명에게 내린 처분은 최대 '출석 정지', '학급 교체' 처분이었습니다.

폭행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너무 가벼운 처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 군은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친구, 선배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어가고 싶었던 공간이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제가 하루 빨리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세요. 저는 여전히 ㅇㅇ고를 사랑하고, 친구가 좋고 따뜻한 선배들이 좋습니다." - 피해 학생 A군의 진술서 일부

학폭위 처분 이후 A 군은 학부모와 교사·학생이 모두 참석하는 교내 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학교에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학교 구성원들에게 알려, 같은 피해가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공동체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준비 과정에서 학교 측은 A 군에게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A 군은 학교 측의 요구사항을 전달받은 뒤 또다시 좌절해야 했습니다.

<공동체 회의 관련 학교 측 요구사항>
- 발언 내용을 학교에 사전 제출할 것
- 학교폭력심의위원회에서 인정된 부분만 말할 것
- 가해 학생들의 실명을 언급하지 말 것

2차 가해를 막으려는 조치라는 게 학교 측의 설명이었지만, A 군 입장에서는 오히려 피해를 입막음하려는 조처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A 군은 결국 전학을 결정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했던 고등학교를 반년 만에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반면 가해 학생들은 처분이 끝나는 2학기에 학교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학교폭력 피해 학생의 기숙사 침대를 가해 학생들이 흉기로 내려친 흔적.학교폭력 피해 학생의 기숙사 침대를 가해 학생들이 흉기로 내려친 흔적.

■ 10년째 되풀이되는 기숙사 폭력

지난 3월 경남 산청의 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도 상급생 10명이 신입생 1명을 90분간 주먹으로 무차별 폭행해, 피해 학생이 전치 3주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2014년에는 경남 진주시의 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는 신입생 1명이 상급생으로부터 맞아 숨지기도 했습니다. 논란이 된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폭 사건 역시 기숙형 사립고에서 발생했습니다. 최근 5년 동안 기숙사 학교에서 발생한 학교폭력 건수만 1,110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생활 공간이 폐쇄적인 데다,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의 분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기숙형 학교의 특성상 학교 폭력의 위험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기숙형 학교에서 학교폭력 사건이 불거지면 교육 당국은 예산을 늘려 감시 장비와 인력을 늘리겠다고 합니다. 기숙형 고교에서 학생 1명이 숨진 10년 전에는 CCTV를 늘리겠다고 했고, 이번에는 '안심벨'을 늘리겠다고 말합니다.

A군이 두 달 넘게 폭행 피해를 당하면서도 신고를 하지 못했던 이유가 결코 '안심벨' 때문이 아니라는 것, 교육 당국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교육 당국이 뼈아파야 할 대목은 다른 부분에 있습니다.

두 달 넘게 상습적인 폭행이 이어지는 동안 피해자는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신고를 못 했다는 점, 피해자가 우울하다는 말로 자신의 피해가 드러나기를 마음 속 깊이 외쳤지만 교사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 가까스로 학폭위가 열렸지만 납득할 수 없는 처분 등으로 인해 피해 학생이 결국 전학을 택한 과정까지...

심각한 학교 폭력이 기숙형 학교에서 반복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하는 한, 피해자가 보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안이 공정하게 처리될 것이라는 믿음을 회복하지 못 하는 한, 아무리 '안심벨'이 늘어난다 한들 아이들을 구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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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15 07:01:58
    • 수정2023-07-15 08:15:42
    주말엔

영화 '벌새'의 주인공, 중학생 은희는 친오빠로부터 상습적으로 맞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어느 날, 은희는 오빠에게 뺨을 맞아 생긴 귀 통증으로 병원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아버지뻘 의사 선생님을 만납니다. 진단서가 필요한지 묻는 의사에게 은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하자 의사 선생님이 말합니다.

"증거가 되니까, 필요하면 얘기해. 알았지?"

영화 ‘벌새’의 포스터(출처 : 배급사 엣나인필름 공식 페이스북)
가정폭력이나 학교폭력과 같은 은밀한 폭력에 맞서려면 특별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의사 선생님과 같은 주변 어른의 관심 어린 말 한마디는 피해자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기적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습니다.

■ 고문에 가까운 폭행…"우울하다" 말했지만 몰랐던 학교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직접 작성한 경남 기숙형 고등학교 입학지원서.
지난 3월, 직접 입학지원서를 쓸 만큼 간절히 원했던 경남의 한 기숙형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A군. 그러나 A 군은 반년 만에 이 학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학교폭력' 때문이었습니다.

A 군은 지난 3월부터 두 달 동안 2학년생 B 군 등 4명으로부터 폭행을 당했습니다. 기숙사 안에서 가해 학생들에게 죽도나 목검으로 맞았고, 흉기로 위협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밤 중 이유도 없이 '얼차려'를 당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가해 학생들은 샤워 중 A군 얼굴에 가래침을 뱉거나 몸에 소변을 누고, 차가운 물을 끼얹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을 하거나 피해자를 옷장에 들어가게 한 뒤 드라이기로 뜨거운 바람을 불어 넣기도 했습니다. 고문에 가까운 엽기적 폭행이 이어진 것입니다.

폭행은 대부분 학교 기숙사에서 발생했지만, 학교 측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피해 학생은 선생님들에게 몇 차례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3월에 즐겁게 지내다가 4월이 되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아이들 말로 '현타'가 오는 거죠. 그래서 그 시기에 우울하다고 하는 아이들이 좀 있지만, 폭력 때문에 그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죠." -OO고등학교 교사-

견디다 못해 짐을 챙겨 기숙사를 뛰쳐나온 A 군이 부모님에게 전학을 요구한 뒤에야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 학폭위 결론, 출석정지와 학급교체?

학부모의 신고로 사건을 접수한 교육 당국은 두 차례 학교폭력심의위원회를 열었습니다. 학폭위가 B 군을 포함한 가해 학생 4명에게 내린 처분은 최대 '출석 정지', '학급 교체' 처분이었습니다.

폭행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너무 가벼운 처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 군은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친구, 선배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어가고 싶었던 공간이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제가 하루 빨리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세요. 저는 여전히 ㅇㅇ고를 사랑하고, 친구가 좋고 따뜻한 선배들이 좋습니다." - 피해 학생 A군의 진술서 일부

학폭위 처분 이후 A 군은 학부모와 교사·학생이 모두 참석하는 교내 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학교에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학교 구성원들에게 알려, 같은 피해가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공동체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준비 과정에서 학교 측은 A 군에게 몇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A 군은 학교 측의 요구사항을 전달받은 뒤 또다시 좌절해야 했습니다.

<공동체 회의 관련 학교 측 요구사항>
- 발언 내용을 학교에 사전 제출할 것
- 학교폭력심의위원회에서 인정된 부분만 말할 것
- 가해 학생들의 실명을 언급하지 말 것

2차 가해를 막으려는 조치라는 게 학교 측의 설명이었지만, A 군 입장에서는 오히려 피해를 입막음하려는 조처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A 군은 결국 전학을 결정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학했던 고등학교를 반년 만에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반면 가해 학생들은 처분이 끝나는 2학기에 학교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학교폭력 피해 학생의 기숙사 침대를 가해 학생들이 흉기로 내려친 흔적.
■ 10년째 되풀이되는 기숙사 폭력

지난 3월 경남 산청의 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도 상급생 10명이 신입생 1명을 90분간 주먹으로 무차별 폭행해, 피해 학생이 전치 3주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2014년에는 경남 진주시의 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는 신입생 1명이 상급생으로부터 맞아 숨지기도 했습니다. 논란이 된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폭 사건 역시 기숙형 사립고에서 발생했습니다. 최근 5년 동안 기숙사 학교에서 발생한 학교폭력 건수만 1,110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생활 공간이 폐쇄적인 데다,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의 분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기숙형 학교의 특성상 학교 폭력의 위험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기숙형 학교에서 학교폭력 사건이 불거지면 교육 당국은 예산을 늘려 감시 장비와 인력을 늘리겠다고 합니다. 기숙형 고교에서 학생 1명이 숨진 10년 전에는 CCTV를 늘리겠다고 했고, 이번에는 '안심벨'을 늘리겠다고 말합니다.

A군이 두 달 넘게 폭행 피해를 당하면서도 신고를 하지 못했던 이유가 결코 '안심벨' 때문이 아니라는 것, 교육 당국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교육 당국이 뼈아파야 할 대목은 다른 부분에 있습니다.

두 달 넘게 상습적인 폭행이 이어지는 동안 피해자는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신고를 못 했다는 점, 피해자가 우울하다는 말로 자신의 피해가 드러나기를 마음 속 깊이 외쳤지만 교사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 가까스로 학폭위가 열렸지만 납득할 수 없는 처분 등으로 인해 피해 학생이 결국 전학을 택한 과정까지...

심각한 학교 폭력이 기숙형 학교에서 반복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하는 한, 피해자가 보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안이 공정하게 처리될 것이라는 믿음을 회복하지 못 하는 한, 아무리 '안심벨'이 늘어난다 한들 아이들을 구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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