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국가산단 50주년 ‘창원, 공업계의 꿈의 도시가 되다’

입력 2023.07.31 (19:15) 수정 2023.07.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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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74년 상공에서 본 창원국가산업단지입니다.

창원대로를 중심으로 2만 5천여 ㎡의 땅에는 세계적인 첨단기계 산업단지를 목표로 한 공단이 들어섰습니다.

입주기업이 첫 가동이 시작한 지 내년이면 50년이 되는 창원산단!

대기업과 협력사, 중소기업까지 기계산업 생태계 토대이자, 창원은 물론 국가 경제 성장을 이끈 일등공신으로 꼽힙니다.

KBS는 경제 성장의 기수로서 반세기 동안 쉼 없이 달려온 창원산단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 50년의 성장동력을 설계하는 연중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공업계의 강남'으로 일컬을 만큼 기계공업 중심지로 거듭난 창원국가산단의 성장사를 짚어봅니다.

윤경재 기자입니다.

[리포트]

입주 기업 2천900여 곳.

종사자 11만 6천여 명.

생산액 전국 국가산단 3위, 51조 6천억 원.

수출액 전국 국가산단 5위, 154억 달러.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대표, 창원국가산단입니다.

1978년 볼보의 전신 삼성중공업에 입사한 용접 기능장 김규동 씨.

강원도에서 나고 자라 부산기계공고를 거쳐 일자리를 찾아 창원에 자리 잡은 뒤, 43년을 일한 창원국가산단 역사의 산증인입니다.

[김규동/용접 기능장/창원국가산단 은퇴자 : "정부에서 이제 74년부터 공단에 대기업들 유치하기 위해서 굵직굵직한 기업 들을 오라고 했겠죠. 우리는 공장 생겼을 때 그냥 삼성 갈래, 현대 갈래 하는데…."]

김 씨처럼 1970~80년대 정부가 전략적으로 육성한 전국의 공업 인재들에게 창원국가산단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임동진/정밀가공 분야 대한민국 명장/충남 부여 출신/1988년 창원국가산단 입성 :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이쪽 경상남도 쪽으로 왔었는데 도로도 잘 되어 있고 또 사람들도 많고. '한국중공업'이라는 곳은 잘 몰랐지만 '창원이라고 하는 곳의 대기업'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입사를 지원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창원의 반전을 일궈냈습니다.

공단 조성 20년 만에 수출액 4천485배·생산액 6천925배라는,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그들의 땀서린 작업복은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박현근/비파괴검사 분야 대한민국 명장/강원도 홍천 출신/1983년 창원국가산단 입성 : "그 당시에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어디 식당이나 어디 술집 같은 데 가더라도 이 작업복 하나가 그냥 신용을 말해주는 정도의 그것이 있었습니다."]

1974년 3월 세운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중화학공업 육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울산과 거제, 여수를 잇는 남동임해안 공업벨트,

평평한 분지 지형에 견고한 지반, 낙동강의 용수 공급과 마산의 무역항, 공항·고속도로와 인접한 물류 교통, 충분한 인력 등 공단 조성에 최적의 요건을 갖춘 창원은 그 가운데서도 중심이 됐습니다.

[백시출/창원상공회의소 부회장 : "창원은 거의 100%로 정부가 주도해서 성장시킨 도시라고 보면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9차례 정도 직접 창원에 내려와서 현장을 답사하고 조금 부족한 부분 예를 들어서 도로가 협소하면 이거 더 넓히라. 뭐 이런 것까지 구체적으로 다 지시를 했다…."]

1970~80년대 '중공업 진출을 꿈꾸는 대기업은 반드시 창원에 공장 하나를 둬라'는 정부의 주도 아래, 당시 내로라하는 삼성, 금성, 대우, 한화 같은 대기업의 이른바 '창원 러시'가 이어졌습니다.

이후 업종별 하청·중소기업들이 촘촘히 들어서면서 공단 존재의 이유이자 목표인 '집적화'를 이뤄냈습니다.

[박병규/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본부장 : "창원에서 A에서 Z까지 다 할 수 있다. (완성품 하나를 만든다 치면) 제대로 그 구성을 찾으면 어떠한 부분도 다 만들 수 있다고 봐 집니다."]

또 정밀기계, 전자, 화학, 자동차 등 다양한 업종이 포진한 '산업 포트폴리오' 덕분에 석유파동과 IMF 같은 대형 위기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백시출/창원상공회의소 부회장 : "예를 들어서 옛날 대우자동차가 쓰러질 때 부평은 도시 전체가 휘청합니다. 근데 창원은 큰 영향을 안 받아요. (창원국가산단에서) 한 그룹이 차지하는 포지션이 5% 미만이에요. 여기는. 그러니까 5%만 충격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95%가 돌아가니까 시민들도 보고도 별 감흥이 없어…."]

그 영향력은 지금도 기업가들이 창원국가산단을 '공업계의 강남'으로 부를 정도로 굳건합니다.

[박병규/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본부장 : "누가 이렇게까지 예상을 했을까 싶습니다. 동시다발형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공장 용지 조성은 공장 용지대로 조성하면서 또 기반시설대로 하고 그리고 근로자 아파트 공사도 별도로 짓고…."]

창원·경남 경제의 역사이자 우리나라 공업의 발전사로 축약되는 창원국가산업단지는 기업가와 노동자에게 꿈과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김규동/용접 기능장/창원국가산단 은퇴자 : "창원공단은 내 삶의 활주로였다. 힘들고 어렵고 막 이렇게 해도 어쩌든지 그래도 그 속에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대로 살아 가지고 그걸 활주로 삼아서…."]

KBS 뉴스 윤경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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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국가산단 50주년 ‘창원, 공업계의 꿈의 도시가 되다’
    • 입력 2023-07-31 19:15:50
    • 수정2023-07-31 20:16:49
    뉴스7(창원)
[앵커]

1974년 상공에서 본 창원국가산업단지입니다.

창원대로를 중심으로 2만 5천여 ㎡의 땅에는 세계적인 첨단기계 산업단지를 목표로 한 공단이 들어섰습니다.

입주기업이 첫 가동이 시작한 지 내년이면 50년이 되는 창원산단!

대기업과 협력사, 중소기업까지 기계산업 생태계 토대이자, 창원은 물론 국가 경제 성장을 이끈 일등공신으로 꼽힙니다.

KBS는 경제 성장의 기수로서 반세기 동안 쉼 없이 달려온 창원산단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 50년의 성장동력을 설계하는 연중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공업계의 강남'으로 일컬을 만큼 기계공업 중심지로 거듭난 창원국가산단의 성장사를 짚어봅니다.

윤경재 기자입니다.

[리포트]

입주 기업 2천900여 곳.

종사자 11만 6천여 명.

생산액 전국 국가산단 3위, 51조 6천억 원.

수출액 전국 국가산단 5위, 154억 달러.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대표, 창원국가산단입니다.

1978년 볼보의 전신 삼성중공업에 입사한 용접 기능장 김규동 씨.

강원도에서 나고 자라 부산기계공고를 거쳐 일자리를 찾아 창원에 자리 잡은 뒤, 43년을 일한 창원국가산단 역사의 산증인입니다.

[김규동/용접 기능장/창원국가산단 은퇴자 : "정부에서 이제 74년부터 공단에 대기업들 유치하기 위해서 굵직굵직한 기업 들을 오라고 했겠죠. 우리는 공장 생겼을 때 그냥 삼성 갈래, 현대 갈래 하는데…."]

김 씨처럼 1970~80년대 정부가 전략적으로 육성한 전국의 공업 인재들에게 창원국가산단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임동진/정밀가공 분야 대한민국 명장/충남 부여 출신/1988년 창원국가산단 입성 :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이쪽 경상남도 쪽으로 왔었는데 도로도 잘 되어 있고 또 사람들도 많고. '한국중공업'이라는 곳은 잘 몰랐지만 '창원이라고 하는 곳의 대기업'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입사를 지원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창원의 반전을 일궈냈습니다.

공단 조성 20년 만에 수출액 4천485배·생산액 6천925배라는,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그들의 땀서린 작업복은 자부심의 상징이었습니다.

[박현근/비파괴검사 분야 대한민국 명장/강원도 홍천 출신/1983년 창원국가산단 입성 : "그 당시에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어디 식당이나 어디 술집 같은 데 가더라도 이 작업복 하나가 그냥 신용을 말해주는 정도의 그것이 있었습니다."]

1974년 3월 세운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는 중화학공업 육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울산과 거제, 여수를 잇는 남동임해안 공업벨트,

평평한 분지 지형에 견고한 지반, 낙동강의 용수 공급과 마산의 무역항, 공항·고속도로와 인접한 물류 교통, 충분한 인력 등 공단 조성에 최적의 요건을 갖춘 창원은 그 가운데서도 중심이 됐습니다.

[백시출/창원상공회의소 부회장 : "창원은 거의 100%로 정부가 주도해서 성장시킨 도시라고 보면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9차례 정도 직접 창원에 내려와서 현장을 답사하고 조금 부족한 부분 예를 들어서 도로가 협소하면 이거 더 넓히라. 뭐 이런 것까지 구체적으로 다 지시를 했다…."]

1970~80년대 '중공업 진출을 꿈꾸는 대기업은 반드시 창원에 공장 하나를 둬라'는 정부의 주도 아래, 당시 내로라하는 삼성, 금성, 대우, 한화 같은 대기업의 이른바 '창원 러시'가 이어졌습니다.

이후 업종별 하청·중소기업들이 촘촘히 들어서면서 공단 존재의 이유이자 목표인 '집적화'를 이뤄냈습니다.

[박병규/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본부장 : "창원에서 A에서 Z까지 다 할 수 있다. (완성품 하나를 만든다 치면) 제대로 그 구성을 찾으면 어떠한 부분도 다 만들 수 있다고 봐 집니다."]

또 정밀기계, 전자, 화학, 자동차 등 다양한 업종이 포진한 '산업 포트폴리오' 덕분에 석유파동과 IMF 같은 대형 위기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백시출/창원상공회의소 부회장 : "예를 들어서 옛날 대우자동차가 쓰러질 때 부평은 도시 전체가 휘청합니다. 근데 창원은 큰 영향을 안 받아요. (창원국가산단에서) 한 그룹이 차지하는 포지션이 5% 미만이에요. 여기는. 그러니까 5%만 충격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95%가 돌아가니까 시민들도 보고도 별 감흥이 없어…."]

그 영향력은 지금도 기업가들이 창원국가산단을 '공업계의 강남'으로 부를 정도로 굳건합니다.

[박병규/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본부장 : "누가 이렇게까지 예상을 했을까 싶습니다. 동시다발형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공장 용지 조성은 공장 용지대로 조성하면서 또 기반시설대로 하고 그리고 근로자 아파트 공사도 별도로 짓고…."]

창원·경남 경제의 역사이자 우리나라 공업의 발전사로 축약되는 창원국가산업단지는 기업가와 노동자에게 꿈과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김규동/용접 기능장/창원국가산단 은퇴자 : "창원공단은 내 삶의 활주로였다. 힘들고 어렵고 막 이렇게 해도 어쩌든지 그래도 그 속에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대로 살아 가지고 그걸 활주로 삼아서…."]

KBS 뉴스 윤경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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