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대사에 영화가 다 담겼다”…베일 벗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입력 2023.08.01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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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서울 용산구에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주연 배우들이 기자 간담회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31일 서울 용산구에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주연 배우들이 기자 간담회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간 군상을 성실히 풍자하면서도 연민을 잃지 않은 영화. 올해 한국 영화계의 여름 대작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베일을 벗게 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한 한 줄 평입니다. 갑작스런 대지진으로 서울 전체가 폐허가 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 103동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재난영화이자 한국 사회에 대한 블랙코미디로 볼 수 있습니다. 제작진들이 스포일러(내용 누설)를 피해 달라고 신신당부한 만큼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지만, 언론시사회 앞뒤로 감독과 주연 배우들을 만나 나눈 이야기들을 담아 봅니다.

우선, 명백한 재난·종말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란 역설적 단어를 고른 이유는 뭘까요.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에서 큰 설정을 빌려왔지만, 영화는 원작 대신 다른 곳에서 이름을 찾았습니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교수의 2011년 인문학 서적 '콘크리트 유토피아'입니다. 책에서 박 교수는 아파트를 중산층의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자 '소비 사회의 소화기관'에 비유합니다. 독특한 전세 제도에 힘입은 계층 상승의 수단이자, '아파트 키즈'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독립영화 '잉투기'와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에 이어, 7년 만의 차기작으로 돌아온 엄태화 감독도 바로 이런 상징적 의미에 주목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

"원작 만화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이 한국에 있는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아포칼립스 이야기라는 거였거든요. 저를 포함해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아파트에 목을 맬까, 하고 공부를 하다가 본 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였어요. 아파트라는 게 '가성비'에 초점이 맞춰진 주거 형태면서 동시에 자산이잖아요. '먹고사니즘'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기도 하고요. 사회가 각박해지다 보니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과연 그렇게 '제로섬(Zero sum)'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의 끝은 무엇일지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엄태화 감독

원작 만화의 팬들이라면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만화의 줄거리에 크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중학생이 주인공이었던 원작과 달리,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에게 골고루 조명을 비추며 재난 상황의 난맥과 인간 군상을 그려냅니다. 대사 몇 마디 없는 단역 주민들까지 직업은 무엇이고,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성실한 '전사(前史)'를 부여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이병헌이 연기하는 902호 주민 '김영탁'입니다. 재난 초기 몸을 던진 희생정신을 보여줘 만장일치로 주민 대표가 된 영탁은, 살짝 어수룩하지만 의협심 강한 동네 아저씨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속 '나폴레옹'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인물로 변해갑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명연기를 펼치는 배우지만, 이번 작품에선 말쑥한 차림새 대신 다소 망가진 외모로 등장했는데요. 이런 설정은 이 배우 본인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거라고 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연을 맡은 이병헌 배우.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연을 맡은 이병헌 배우.

"어떤 캐릭터를 맡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분장팀, 감독님, 헤어팀과 항상 상의해서 그 캐릭터에 가장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찾으려 시도를 해요. 그러다 먼저 영탁이라는 캐릭터는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뻗쳐 나가는 스타일의 머리를 가졌을 것 같다. 아주 굵은 모발에, 머리숱도 많고. 근데 약간 'M자 탈모'가 시작되는 느낌으로 설정하면 어떨까? 그래서 해봤는데 다들 굉장히 좋아했어요. 약간 낯설기도 하고 웃겨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저에게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고. 왠지 그냥 그 느낌이 영탁이 같다는 사람들의 의견과 제 생각이 합쳐져서 그런 기괴한 스타일이 나오게 된 거죠." - 이병헌 배우

충무로 최고 배우로서 셀 수 없이 많은 시나리오를 받을 이병헌이지만, 비교적 신예 감독인 엄태화(이번이 두 번째 상업 영화입니다) 감독의 시나리오를 선택한 이유로 '신선함'을 꼽았습니다. 영화의 장르는 '재난'이 아니라 블랙코미디라고 했습니다. 깡패면 깡패, 정치면 정치 등 시류에 맞게 유행하는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영화들에 싫증을 느끼던 무렵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작품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요즘 20·30대에게는 아마도 처음 보는 장르일 수도 있겠구나…. 저 어렸을 때는 이런 블랙코미디 영화가 드물게나마 있었는데, 그래서 너무 반가웠어요."

'젊은 세대에게는 아주 새로운 장르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기대 평을 내놓은 이병헌 배우. 그러면 그 '젊은 세대'인 박보영 배우의 생각은 어떨까요? 박서준 배우와 함께 공무원·간호사 부부를 연기한 '명화'역의 박 배우는 자신의 마지막 대사에 영화의 메시지가 모두 담겨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연을 맡은 박보영 배우.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연을 맡은 박보영 배우.

"시나리오를 덮을 때 마지막 대사가 너무 좋아서 '이건 정말 꼭 하고 싶다' 생각했었고요. 재난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 재난 그 이후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둔 점에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나라면 명화처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등장인물처럼 행동할까?'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면서 시나리오를 읽었고, 관객들도 보시면서 같은 재미를 많이 느낄 거로 생각했어요. (마지막 대사의 의미가 뭔가요?) 저는 그 한 줄이 저희 영화를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박보영 배우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등 장르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극한 상황을 빌어 인간 본성과 사회 폐부를 고발하는 작품들은 이미 많으니까요. 영화는 대신 '미스트'나 '감기' 등에서 느꼈던 '복장 터짐' 지수를 확 줄이고, '살아있다'보다 행동 반경을 넓히며, (물자를 구하기 위해 주민들은 자주 밖으로 나갑니다) '부산행'이 선보였던 얄미운 인간상에 대한 풍자 한 스푼과 '기생충'처럼 한국 사회를 응집해 담아내려는 시도 한 스푼을 더해 성실하게 2시간 10분을 채웁니다. 전개 속도가 빠르고 메시지를 고래고래 외쳐대는 장면이 없는 것도 장점이지만, 세상을 놀려대는 '매운맛'에만 집중하는 대신 끝까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심을 잃지 않는 점이 다른 작품과의 차별화되는 강점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박보영이 말한 '마지막 한 줄'의 여운은 올 여름 관객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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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대사에 영화가 다 담겼다”…베일 벗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 입력 2023-08-01 08: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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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서울 용산구에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주연 배우들이 기자 간담회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간 군상을 성실히 풍자하면서도 연민을 잃지 않은 영화. 올해 한국 영화계의 여름 대작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베일을 벗게 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한 한 줄 평입니다. 갑작스런 대지진으로 서울 전체가 폐허가 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 103동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재난영화이자 한국 사회에 대한 블랙코미디로 볼 수 있습니다. 제작진들이 스포일러(내용 누설)를 피해 달라고 신신당부한 만큼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지만, 언론시사회 앞뒤로 감독과 주연 배우들을 만나 나눈 이야기들을 담아 봅니다.

우선, 명백한 재난·종말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란 역설적 단어를 고른 이유는 뭘까요. 김숭늉 작가의 웹툰 '유쾌한 왕따'에서 큰 설정을 빌려왔지만, 영화는 원작 대신 다른 곳에서 이름을 찾았습니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교수의 2011년 인문학 서적 '콘크리트 유토피아'입니다. 책에서 박 교수는 아파트를 중산층의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자 '소비 사회의 소화기관'에 비유합니다. 독특한 전세 제도에 힘입은 계층 상승의 수단이자, '아파트 키즈'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독립영화 '잉투기'와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에 이어, 7년 만의 차기작으로 돌아온 엄태화 감독도 바로 이런 상징적 의미에 주목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
"원작 만화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이 한국에 있는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아포칼립스 이야기라는 거였거든요. 저를 포함해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아파트에 목을 맬까, 하고 공부를 하다가 본 책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였어요. 아파트라는 게 '가성비'에 초점이 맞춰진 주거 형태면서 동시에 자산이잖아요. '먹고사니즘'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기도 하고요. 사회가 각박해지다 보니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과연 그렇게 '제로섬(Zero sum)'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의 끝은 무엇일지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엄태화 감독

원작 만화의 팬들이라면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만화의 줄거리에 크게 구애받지 않습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중학생이 주인공이었던 원작과 달리,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에게 골고루 조명을 비추며 재난 상황의 난맥과 인간 군상을 그려냅니다. 대사 몇 마디 없는 단역 주민들까지 직업은 무엇이고,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성실한 '전사(前史)'를 부여했다고 하는데요.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이병헌이 연기하는 902호 주민 '김영탁'입니다. 재난 초기 몸을 던진 희생정신을 보여줘 만장일치로 주민 대표가 된 영탁은, 살짝 어수룩하지만 의협심 강한 동네 아저씨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속 '나폴레옹'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인물로 변해갑니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명연기를 펼치는 배우지만, 이번 작품에선 말쑥한 차림새 대신 다소 망가진 외모로 등장했는데요. 이런 설정은 이 배우 본인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거라고 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연을 맡은 이병헌 배우.
"어떤 캐릭터를 맡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분장팀, 감독님, 헤어팀과 항상 상의해서 그 캐릭터에 가장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찾으려 시도를 해요. 그러다 먼저 영탁이라는 캐릭터는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뻗쳐 나가는 스타일의 머리를 가졌을 것 같다. 아주 굵은 모발에, 머리숱도 많고. 근데 약간 'M자 탈모'가 시작되는 느낌으로 설정하면 어떨까? 그래서 해봤는데 다들 굉장히 좋아했어요. 약간 낯설기도 하고 웃겨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저에게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고. 왠지 그냥 그 느낌이 영탁이 같다는 사람들의 의견과 제 생각이 합쳐져서 그런 기괴한 스타일이 나오게 된 거죠." - 이병헌 배우

충무로 최고 배우로서 셀 수 없이 많은 시나리오를 받을 이병헌이지만, 비교적 신예 감독인 엄태화(이번이 두 번째 상업 영화입니다) 감독의 시나리오를 선택한 이유로 '신선함'을 꼽았습니다. 영화의 장르는 '재난'이 아니라 블랙코미디라고 했습니다. 깡패면 깡패, 정치면 정치 등 시류에 맞게 유행하는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영화들에 싫증을 느끼던 무렵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작품이었다는 설명입니다. "요즘 20·30대에게는 아마도 처음 보는 장르일 수도 있겠구나…. 저 어렸을 때는 이런 블랙코미디 영화가 드물게나마 있었는데, 그래서 너무 반가웠어요."

'젊은 세대에게는 아주 새로운 장르처럼 느껴질 것'이라는 기대 평을 내놓은 이병헌 배우. 그러면 그 '젊은 세대'인 박보영 배우의 생각은 어떨까요? 박서준 배우와 함께 공무원·간호사 부부를 연기한 '명화'역의 박 배우는 자신의 마지막 대사에 영화의 메시지가 모두 담겨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주연을 맡은 박보영 배우.
"시나리오를 덮을 때 마지막 대사가 너무 좋아서 '이건 정말 꼭 하고 싶다' 생각했었고요. 재난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 재난 그 이후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둔 점에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나라면 명화처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등장인물처럼 행동할까?'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면서 시나리오를 읽었고, 관객들도 보시면서 같은 재미를 많이 느낄 거로 생각했어요. (마지막 대사의 의미가 뭔가요?) 저는 그 한 줄이 저희 영화를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박보영 배우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등 장르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극한 상황을 빌어 인간 본성과 사회 폐부를 고발하는 작품들은 이미 많으니까요. 영화는 대신 '미스트'나 '감기' 등에서 느꼈던 '복장 터짐' 지수를 확 줄이고, '살아있다'보다 행동 반경을 넓히며, (물자를 구하기 위해 주민들은 자주 밖으로 나갑니다) '부산행'이 선보였던 얄미운 인간상에 대한 풍자 한 스푼과 '기생충'처럼 한국 사회를 응집해 담아내려는 시도 한 스푼을 더해 성실하게 2시간 10분을 채웁니다. 전개 속도가 빠르고 메시지를 고래고래 외쳐대는 장면이 없는 것도 장점이지만, 세상을 놀려대는 '매운맛'에만 집중하는 대신 끝까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심을 잃지 않는 점이 다른 작품과의 차별화되는 강점이란 생각이 듭니다. 과연, 박보영이 말한 '마지막 한 줄'의 여운은 올 여름 관객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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