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남도의 중심지는 광주? 나주?…단발령이 가른 두 도시의 운명”

입력 2023.08.02 (11:09) 수정 2023.08.0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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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광주는 150만 명이 거주하는 남도의 중심 도시...문헌에 등장하는 490년 당시 최초 이름은 무진주"
"빛고을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사 지리지에 등장...태조 왕건의 처가인 나주가 고려 시대 남도의 중심"
"조선 시대에도 남도의 중심은 광주가 아닌 나주...1895년 나주관찰부 관찰사가 광주군 등 관할"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인 1896년 전남도청 소재지 광주로 변경...단발령이 두 도시 운명 가른 셈"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5cXLIjDT6z0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지금 광주 인구가 150만 정도 되지요? 전라도 최대의 도시인데요. 문헌에 등장하는 광주 최초의 이름은 무진주이고요. 지금은 광주광역시인데 오늘 이 시간에는 무진주에서 광주광역시까지 변화 과정 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전라도의 중심지를 놓고 나주와 광주가 어떤 변천 과정이 있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광주전남 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이라면 관심 있을 만한 그런 주제네요. 문헌에 등장하는 광주의 명칭이 무진주였는데 언제 등장한 이름인가요?

◆ 노성태: 우리나라 최초 역사서는 고려 시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인데요. 삼국사기 백제 역사를 다룬 것이 백제본기인데 거기 백제 동성왕 20년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8월 백제 동성왕이 탐라가 세금을 바치지 않자 친히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죄를 비니 이내 멈추었다"인데 세금을 내지 않는 탐라를 정벌하기 위해 도착했던 곳이 무진주라고 나오는데 그 무진주가 오늘의 광주이고요. 이 기록이 나오는 것이 490년도 기록입니다.

◇ 윤주성: 탐라는 오늘의 제주지요?

◆ 노성태: 제주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강진, 해남 쪽 나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 윤주성: 문헌에 등장하는 광주 최초의 명칭 무진주, 어찌 보면 광주라는 이름의 뿌리인데요. 오늘날 흔적이 남아있을까요?

◆ 노성태: 문헌에 보이는 광주의 첫 이름 무진주. 오늘 광주 그 흔적이 없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광주 남구에 무진중학교가 있는데 학교명에 광주의 명칭이 남아있을 뿐이지요.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 윤주성: 광주의 첫 명칭이 무진주였고 그러면 지금 불리는 광주는 언제 등장한 이름인가요?

◆ 노성태: 고려를 건국한 분이 태조 왕건인데요. 왕건은 잘 아는 것처럼 광주에서 거병했던 견훤과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그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 역사를 담은 책이 고려사인데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태조 23년 칭광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태조 23년에 광주라고 칭했다"고 하는 것인데 그때가 940년이니까 오늘 우리가 쓰는 빛고을 광주라는 이름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일이지요.

◇ 윤주성: 광주라는 명칭이 고려 태조 때 처음 불렸던 이름인데요. 고려 시대 광주의 위상은 어땠습니까?

◆ 노성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전국을 9주로 나누는 지금의 광주전남은 무주라고 불리었고 그리고 무진주였던 광주가 지금의 도청 소재지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 신라 시대 광주는 우리 지역 남도의 중심지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고려가 되면서 나주는 고려 왕건의 처가이면서 2대 왕 혜종의 탄생지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그래서 광주를 대신해서 고려 시대 나주는 남도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018년도에 이름이 지어진 전라도라고 하는 명칭인데 전라도는 다 아시는 것처럼 전주와 나주의 앞 자를 딴 이름이고, 이는 남도의 중심지가 고려 시대 때 광주가 아닌 나주였음을 보여줍니다.

◇ 윤주성: 통일 신라 시대에는 광주가 나주보다 그리고 고려 시대는 나주가 광주보다 더 중요한 중심지가 됐는데 그러면 조선 시대 광주의 모습은 나주와 비교해서는 어땠습니까?

◆ 노성태: 조선 시대까지도 여전히 남도의 중심지는 나주였습니다. 조선 시대 당시 나주는 내내 정3품 벼슬아치였던 목사가 내려와서 다스렸던 목사 고을이었고요. 그런데 광주는 나주처럼 목사가 다스리기도 했지만 무진군 광산현으로 강릉이 되기도 해서 3품 품계의 목사가 아닌 4품의 군수나 5품인 현령이 통치하는 그래서 격이 나주보다 낮은 고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조선 시대 내내 광주는 나주보다는 격이 낮은 단계의 고을이었던 셈이지요.

◇ 윤주성: 조선 시대 나주는 내내 나주목을 유지했지만 광주는 무진군, 광산현 등으로 강등이 되기도 했군요. 왜 강등이 됐는지 궁금한데요?

◆ 노성태: 세종대왕 12년이면 1430년인데요. 이때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이 됩니다. 광주 읍민이었던 노흥준이 당시 광주 목사 신보안를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고 그때 목사 신보안이 그 사건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조선 시대 가장 중요한 질서 중 하나가 충효를 바탕으로 한 강상의 질서였는데 읍민이 목사를 구타해서 숨지게 했잖아요. 이는 자식이 아버지를 구타해서 숨지게 한 것과 다름없는 이런 사건이었고, 그래서 광주목이 벌을 받게 되는데 무진군으로 강등이 그 벌이었습니다.

◇ 윤주성: 읍민이 목사를 구타했는데 광주목이 처벌받았다는 오늘날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데요?

◆ 노성태: 오늘날에는 개인만 처벌했겠지요.

◇ 윤주성: 그러면 무진군은 언제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이 됩니까?

◆ 노성태: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했을 때 지금 광주 필문로라고 하는 거리가 있는데 주인공 필문 이선제 등이 중심이 되어서 광주목으로 복귀를 위해 조정에 상소를 했고 그 결과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됩니다. 그때가 문종 즉위년 1451년인데 무진군으로 강등된 지 31년 만이었습니다. 다시 광주목으로의 승격을 축하하기 위해서 당시 광주의 객사였던 광산관 입구에 루가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그 루 이름을 기쁘고 경사스럽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희경루라고 짓게 되는데 지금 광주공원에 복원되고 있는 희경루가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 윤주성: 조선 시대에는 나주가 광주보다 더 큰 고을이었는데요. 나주에 광주 등을 관할 하는 관찰부 치소가 존재했던 시절도 있었다고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가 8도였잖아요. 이것을 23부로 재편하게 됩니다. 23부 중에 오늘 전라도에 3부가 존재했었는데 그것이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였습니다. 3부에는 오늘의 도지사에 해당되는 관찰사가 파견돼서 다스렸는데 그 통치 치소가 지금 말씀드린 전주, 나주, 남원이었습니다. 따라서 나주에는 나주와 그 일원을 관찰하는 나주 관찰부라고 하는 치소가 생겨났고 광주는 나주 관찰부 소속의 광주군이었는데 1896년 전라남도가 생겨나면서 도청 소재기가 나주에서 광주로 이전하기까지 잠시였지만 광주는 나주부에 소속되기도 했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나주 관찰사가 근무했던 나주 관찰부 청사가 있었던 입구 문인 나주의 정수루에는 지금 당시 23부 중 하나였던 나주 관찰부임을 확인하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윤주성: 그러면 나주보다 광주가 더 행정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 그 시점이 1896년부터인 것이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1895년 전국이 8도에서 23부로 바뀌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광주를 포함한 전남 서남부는 나주 관찰부 관할이었지만 1896년 다시 전국이 13도제로 바뀌게 됩니다. 13도제로 바뀌면서 전라도는 둘로 나눠지지요. 전라남도, 전라북도.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는 예전처럼 전주가 차지했지만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는 나주 대신 광주가 차지하게 됩니다. 광주가 나주 대신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광주는 이후 나주를 제치고 남도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늘 광주광역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 윤주성: 광주가 이렇게 남도의 중심지가 되어서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분기점이 되었던 해가 있다고요?

◆ 노성태: 1896년이지요. 아까 말씀을 드렸던. 1895년이 을미년입니다. 이때 일어났던 중요 사건 중 하나가 다 아시는 것처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고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근대적 개혁을 우리는 을미개혁이라고 하는데 을미개혁 중의 하나가 단발령이었고 그 단발령에 가장 반대한 지역 중 하나가 나주였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1950년대 광산동 시절 광주시청)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1950년대 광산동 시절 광주시청)

나주에서 개화파였던 참사관 안종수가 스스로 단발했고 나주 관찰사 등 100여 명의 상투를 강제로 잘랐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나주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안종수가 피살이 됩니다. 후임 나주 관찰사는 무서워서 나주에 부임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로 개편할 때 개화파 정권에 밉보였던 나주 대신 광주가 도청 소재지가 되는데요. 아무튼, 1895년에 단발령이 광주와 나주 두 도시의 가른 셈에 됐지요.

◇ 윤주성: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로 100회째를 맞았습니다.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 노성태: 만 2년 이렇게 한 것 같은데요. 애청자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 윤주성: 2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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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등의 아침] “남도의 중심지는 광주? 나주?…단발령이 가른 두 도시의 운명”
    • 입력 2023-08-02 11:09:22
    • 수정2023-08-02 14:02:11
    광주
"광주는 150만 명이 거주하는 남도의 중심 도시...문헌에 등장하는 490년 당시 최초 이름은 무진주"<br />"빛고을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사 지리지에 등장...태조 왕건의 처가인 나주가 고려 시대 남도의 중심"<br />"조선 시대에도 남도의 중심은 광주가 아닌 나주...1895년 나주관찰부 관찰사가 광주군 등 관할"<br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인 1896년 전남도청 소재지 광주로 변경...단발령이 두 도시 운명 가른 셈"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윤주성 앵커
■ 출연 :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 원장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김영조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5cXLIjDT6z0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 윤주성 앵커(이하 윤주성): 남도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어보는 시간 노성태의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도 남도역사 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윤주성: 오늘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지금 광주 인구가 150만 정도 되지요? 전라도 최대의 도시인데요. 문헌에 등장하는 광주 최초의 이름은 무진주이고요. 지금은 광주광역시인데 오늘 이 시간에는 무진주에서 광주광역시까지 변화 과정 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전라도의 중심지를 놓고 나주와 광주가 어떤 변천 과정이 있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윤주성: 광주전남 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이라면 관심 있을 만한 그런 주제네요. 문헌에 등장하는 광주의 명칭이 무진주였는데 언제 등장한 이름인가요?

◆ 노성태: 우리나라 최초 역사서는 고려 시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인데요. 삼국사기 백제 역사를 다룬 것이 백제본기인데 거기 백제 동성왕 20년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8월 백제 동성왕이 탐라가 세금을 바치지 않자 친히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죄를 비니 이내 멈추었다"인데 세금을 내지 않는 탐라를 정벌하기 위해 도착했던 곳이 무진주라고 나오는데 그 무진주가 오늘의 광주이고요. 이 기록이 나오는 것이 490년도 기록입니다.

◇ 윤주성: 탐라는 오늘의 제주지요?

◆ 노성태: 제주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강진, 해남 쪽 나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 윤주성: 문헌에 등장하는 광주 최초의 명칭 무진주, 어찌 보면 광주라는 이름의 뿌리인데요. 오늘날 흔적이 남아있을까요?

◆ 노성태: 문헌에 보이는 광주의 첫 이름 무진주. 오늘 광주 그 흔적이 없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광주 남구에 무진중학교가 있는데 학교명에 광주의 명칭이 남아있을 뿐이지요. 조금은 안타깝습니다.

◇ 윤주성: 광주의 첫 명칭이 무진주였고 그러면 지금 불리는 광주는 언제 등장한 이름인가요?

◆ 노성태: 고려를 건국한 분이 태조 왕건인데요. 왕건은 잘 아는 것처럼 광주에서 거병했던 견훤과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그 왕건이 세운 나라 고려 역사를 담은 책이 고려사인데 고려사 지리지에 보면 태조 23년 칭광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태조 23년에 광주라고 칭했다"고 하는 것인데 그때가 940년이니까 오늘 우리가 쓰는 빛고을 광주라는 이름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일이지요.

◇ 윤주성: 광주라는 명칭이 고려 태조 때 처음 불렸던 이름인데요. 고려 시대 광주의 위상은 어땠습니까?

◆ 노성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전국을 9주로 나누는 지금의 광주전남은 무주라고 불리었고 그리고 무진주였던 광주가 지금의 도청 소재지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 신라 시대 광주는 우리 지역 남도의 중심지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고려가 되면서 나주는 고려 왕건의 처가이면서 2대 왕 혜종의 탄생지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그래서 광주를 대신해서 고려 시대 나주는 남도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018년도에 이름이 지어진 전라도라고 하는 명칭인데 전라도는 다 아시는 것처럼 전주와 나주의 앞 자를 딴 이름이고, 이는 남도의 중심지가 고려 시대 때 광주가 아닌 나주였음을 보여줍니다.

◇ 윤주성: 통일 신라 시대에는 광주가 나주보다 그리고 고려 시대는 나주가 광주보다 더 중요한 중심지가 됐는데 그러면 조선 시대 광주의 모습은 나주와 비교해서는 어땠습니까?

◆ 노성태: 조선 시대까지도 여전히 남도의 중심지는 나주였습니다. 조선 시대 당시 나주는 내내 정3품 벼슬아치였던 목사가 내려와서 다스렸던 목사 고을이었고요. 그런데 광주는 나주처럼 목사가 다스리기도 했지만 무진군 광산현으로 강릉이 되기도 해서 3품 품계의 목사가 아닌 4품의 군수나 5품인 현령이 통치하는 그래서 격이 나주보다 낮은 고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반적으로 조선 시대 내내 광주는 나주보다는 격이 낮은 단계의 고을이었던 셈이지요.

◇ 윤주성: 조선 시대 나주는 내내 나주목을 유지했지만 광주는 무진군, 광산현 등으로 강등이 되기도 했군요. 왜 강등이 됐는지 궁금한데요?

◆ 노성태: 세종대왕 12년이면 1430년인데요. 이때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이 됩니다. 광주 읍민이었던 노흥준이 당시 광주 목사 신보안를 구타했던 사건이 있었고 그때 목사 신보안이 그 사건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조선 시대 가장 중요한 질서 중 하나가 충효를 바탕으로 한 강상의 질서였는데 읍민이 목사를 구타해서 숨지게 했잖아요. 이는 자식이 아버지를 구타해서 숨지게 한 것과 다름없는 이런 사건이었고, 그래서 광주목이 벌을 받게 되는데 무진군으로 강등이 그 벌이었습니다.

◇ 윤주성: 읍민이 목사를 구타했는데 광주목이 처벌받았다는 오늘날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데요?

◆ 노성태: 오늘날에는 개인만 처벌했겠지요.

◇ 윤주성: 그러면 무진군은 언제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이 됩니까?

◆ 노성태: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했을 때 지금 광주 필문로라고 하는 거리가 있는데 주인공 필문 이선제 등이 중심이 되어서 광주목으로 복귀를 위해 조정에 상소를 했고 그 결과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됩니다. 그때가 문종 즉위년 1451년인데 무진군으로 강등된 지 31년 만이었습니다. 다시 광주목으로의 승격을 축하하기 위해서 당시 광주의 객사였던 광산관 입구에 루가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그 루 이름을 기쁘고 경사스럽다" 이런 의미를 담아서 희경루라고 짓게 되는데 지금 광주공원에 복원되고 있는 희경루가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 윤주성: 조선 시대에는 나주가 광주보다 더 큰 고을이었는데요. 나주에 광주 등을 관할 하는 관찰부 치소가 존재했던 시절도 있었다고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가 8도였잖아요. 이것을 23부로 재편하게 됩니다. 23부 중에 오늘 전라도에 3부가 존재했었는데 그것이 전주부, 나주부, 남원부였습니다. 3부에는 오늘의 도지사에 해당되는 관찰사가 파견돼서 다스렸는데 그 통치 치소가 지금 말씀드린 전주, 나주, 남원이었습니다. 따라서 나주에는 나주와 그 일원을 관찰하는 나주 관찰부라고 하는 치소가 생겨났고 광주는 나주 관찰부 소속의 광주군이었는데 1896년 전라남도가 생겨나면서 도청 소재기가 나주에서 광주로 이전하기까지 잠시였지만 광주는 나주부에 소속되기도 했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
나주 관찰사가 근무했던 나주 관찰부 청사가 있었던 입구 문인 나주의 정수루에는 지금 당시 23부 중 하나였던 나주 관찰부임을 확인하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 윤주성: 그러면 나주보다 광주가 더 행정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 그 시점이 1896년부터인 것이지요?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1895년 전국이 8도에서 23부로 바뀌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광주를 포함한 전남 서남부는 나주 관찰부 관할이었지만 1896년 다시 전국이 13도제로 바뀌게 됩니다. 13도제로 바뀌면서 전라도는 둘로 나눠지지요. 전라남도, 전라북도.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는 예전처럼 전주가 차지했지만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는 나주 대신 광주가 차지하게 됩니다. 광주가 나주 대신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광주는 이후 나주를 제치고 남도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늘 광주광역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 윤주성: 광주가 이렇게 남도의 중심지가 되어서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분기점이 되었던 해가 있다고요?

◆ 노성태: 1896년이지요. 아까 말씀을 드렸던. 1895년이 을미년입니다. 이때 일어났던 중요 사건 중 하나가 다 아시는 것처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고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에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근대적 개혁을 우리는 을미개혁이라고 하는데 을미개혁 중의 하나가 단발령이었고 그 단발령에 가장 반대한 지역 중 하나가 나주였습니다.

사진 출처: 남도역사연구원(1950년대 광산동 시절 광주시청)
나주에서 개화파였던 참사관 안종수가 스스로 단발했고 나주 관찰사 등 100여 명의 상투를 강제로 잘랐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나주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안종수가 피살이 됩니다. 후임 나주 관찰사는 무서워서 나주에 부임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로 개편할 때 개화파 정권에 밉보였던 나주 대신 광주가 도청 소재지가 되는데요. 아무튼, 1895년에 단발령이 광주와 나주 두 도시의 가른 셈에 됐지요.

◇ 윤주성: 스토리로 듣는 남도역사 오늘로 100회째를 맞았습니다.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 노성태: 만 2년 이렇게 한 것 같은데요. 애청자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 윤주성: 2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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