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신’이 돌아왔다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08.03 (07:00) 수정 2023.08.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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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탁신의 귀환

그는 탁월한 정치인이었다. 2001년 집권하자마자 가난한 농민들의 부채를 경감해줬다. 우리 돈 천 원 정도만 내면 국민 누구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교육을 장려했다. 중고등학교 등록금을 인하하고, 대학 학자금 융자가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렇게 일부 부유층들의 공간이었던 '병원' '은행' '대학'이 국민들에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탁신 일가는 점점 부패했다. 탁월하게 법망을 빠져나갔다. 집권 5년이 지나자 탁신 가문은 태국 최대 재벌로 성장했다. 탁신의 자녀들은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가문 기업 '친(Shin) 코퍼레이션'의 지분을 꾸준히 사들였다. 그렇게 증여세가 빠져나갔다.

정부는 슬그머니 해외 투자자가 통신사의 지분을 49%까지 소유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다. 그리고 2006년 1월, 이들 가족은 싱가포르 국부펀드에 지분 49.6%를 팔았다. 양도세 한 푼 내지 않고 19억 달러(2조 5천억 원가량)를 챙겼다. 국민들이 분노했다. 청렴의 상징이자 탁신 전 총리를 정치인으로 입문시켰던 잠롱 방콕시장은 “1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다 쓰지 못할 돈이니 차익의 1/3을 기부하라”고 조언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를 지지했던 수많은 기업인과 정치인, 언론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2006년 9월 탁신 총리가 유엔 회의 참석차 미국에 있을 때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때부터 해외를 떠돌던 탁신 전 총리가 오는 10일 태국에 돌아온다. 탁신 친나왓(74) 전 총리의 귀환은 태국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2. 군부와 탁신의 대결

지난 20여 년 동안 태국 정치는 탁신가(프아타이당)와 군부의 대결이었다. 2008년 탁신의 매제 '솜차이'가, 2009년엔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집권했지만, 모두 사회혼란과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군부에게 꾸준히 집권의 명분을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탁신가의 무능과 부패였다.

지난 5월 총선에서도 탁신은 막내딸 패통탄(37)을 내세워 프아타이당의 재집권을 시도했다. 하지만 태국 국민들은 '왕실모독죄' 개정 등 선명한 개혁을 외친 '피타 림짜른랏(42)'의 전진당(MFP)에 표를 몰아줬다. 피타의 전진당은 방콕 33개 지역구 중 32곳을 승리하며 제 1당이 됐다.

하지만 상하원이 총리를 선출하는 지난달 19일, 태국 헌법재판소가 피타의 국회의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선출되지 않고 군부의 지명으로 임명된 상원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피타의 총리 선출 투표를 무산시켰다. 이제 제2당인 탁신가의 프아타이당(FOR THE THAI)이 총리 후보를 낼 차례다.

지난 2008년, 막내딸(가운데) 패통탄의 대학 졸업식에 모인 탁신 전 총리(74)의 가족.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뒤 해외에 머물던  탁신 전 총리가 오는 10일 태국으로 돌아온다.  2008년 탁신의 매제 솜차이가, 2009년엔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집권했지만, 모두 사회 혼란과 이어진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탁신은 이후 막내딸 패통탄(37)을 내세워 이번 총선을 치렀지만 141석 확보에 그쳐 제 2당에 머물렀다. 이제 남은 방법은 자신을 쫓아낸 군부와의 연정뿐이다. 사진 로이터지난 2008년, 막내딸(가운데) 패통탄의 대학 졸업식에 모인 탁신 전 총리(74)의 가족.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뒤 해외에 머물던 탁신 전 총리가 오는 10일 태국으로 돌아온다. 2008년 탁신의 매제 솜차이가, 2009년엔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집권했지만, 모두 사회 혼란과 이어진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탁신은 이후 막내딸 패통탄(37)을 내세워 이번 총선을 치렀지만 141석 확보에 그쳐 제 2당에 머물렀다. 이제 남은 방법은 자신을 쫓아낸 군부와의 연정뿐이다. 사진 로이터

3. 군부와 탁신의 연대

프아타이당의 총리 후보가 집권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피타의 전진당과의 연정을 깨고 군부와 손을 잡으면 된다. 그럼 상원의원들의 몰표를 받아 손쉽게 총리가 된다. 그렇게 피타를 배신하고 집권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총선에서 피타를 지지한 국민들의 표는 그렇게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실제 프아타이당은 어제(8월 2일), 전진당을 배제하고 연정을 다시 꾸릴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왕실모독죄' 개정도 검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이번 총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전진당의 집권은 사실상 무산됐다. 프아타이당은 조만간 군부 정당과의 연정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탈세 등의 혐의로 이미 실형을 선고받은 탁신 전 총리가 오는 10일 급거 귀국하는 것도 군부와의 밀약설을 뒷받침한다.

귀국한 그는 교도소로 가지 않고 사면을 받은 뒤, 프아타이당 출신 새 총리의 뒷배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게 군부는 권력에서 쫓겨나지 않고, 왕실은 ‘왕실모독죄’ 개정 논의를 백지화시키고, 탁신은 다시 권좌를 얻는 시나리오다. 모두가 좋다. 피타를 지지했던 태국 국민만 빼고...

시간이 지날수록 '왕실모독죄(형법 112조)' 개정 논란은 식고, 서민들 사이에서 프아타이당의 '국민 1인당 1만바트(40만 원) 디지털 화폐 바우처 지급' 공약에 대한 기대만 커진다. 공약대로 16세 이상 국민 5천만 명에게 모두 지급할 경우 5천 6백억 비트(21조 원 가량)의 예산이 필요하다. 태국 정부의 한 해 예산은 3.2조 바트(120조원 가량)로 한 해 정부 재정의 1/6이 소요된다. 참고로 태국 경제 규모는 우리 경제의 1/3 수준이다.


지난 2019년 총선에서 개혁 공약으로 70여 석을 확보한 미래당(FFP)를 해산하라는 헌법재산소의 판결이 내려지자 방콕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청년들의 시위가 수 개월 동안 이어졌다. 해산된 미래당(FFP)를 이어받아 ‘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한 전진당(MFP)은 이번 총선에서 151석을 얻어 제 1당으로 올라섰지만, 헌재는 이번엔 전진당(MFP)의 해산을 검토중이다.지난 2019년 총선에서 개혁 공약으로 70여 석을 확보한 미래당(FFP)를 해산하라는 헌법재산소의 판결이 내려지자 방콕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청년들의 시위가 수 개월 동안 이어졌다. 해산된 미래당(FFP)를 이어받아 ‘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한 전진당(MFP)은 이번 총선에서 151석을 얻어 제 1당으로 올라섰지만, 헌재는 이번엔 전진당(MFP)의 해산을 검토중이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전진당이 내세운 '왕실모독죄' 개정 공약의 헌법 위반 여부도 심리 중이다. 헌재가 조만간 전진당(MFP)에 대한 '정당 해산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전진당은 의회에서 완전히 쫓겨날 수도 있다. 실제 2020년에도 태국 헌재는 전진당의 전신인 미래당(FFP)이 총선에서 70여 석을 얻으며 개혁 공약을 추진하자 미래당을 해산시켰다.

그러자 방콕에선 몇 달간 민주화 시위가 이어졌다. 프아타이당이 전진당과의 연정을 깨고 군부와 함께 집권하면 태국 국민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태국 속담에 “죽은 코끼리의 온 몸을 연잎으로 덮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진실은 감추기 어렵다는 뜻이다. 탁신은 이번 총선 국민들이 보여준 민심을 온몸으로 가릴 수 있을까? 지난 20여 년 동안 태국 정치의 개혁과 비리 의혹의 주인공, '탁신 친나왓'이 돌아온다.

태국 상하원은 내일(4일) 다시 총리 선출을 시도한다. 프아타이당의 '스레타 타위신(60)'이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탁신의 오랜 친구로 부동산 재벌인 그의 자산은 1조 원이 넘는다. 예상을 깨고 개혁 정당이 승리를 거둔 태국 총선은 이렇게 예상대로 다시 군부와 프아타이당의 승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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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3-08-03 10: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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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탁신의 귀환

그는 탁월한 정치인이었다. 2001년 집권하자마자 가난한 농민들의 부채를 경감해줬다. 우리 돈 천 원 정도만 내면 국민 누구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교육을 장려했다. 중고등학교 등록금을 인하하고, 대학 학자금 융자가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렇게 일부 부유층들의 공간이었던 '병원' '은행' '대학'이 국민들에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탁신 일가는 점점 부패했다. 탁월하게 법망을 빠져나갔다. 집권 5년이 지나자 탁신 가문은 태국 최대 재벌로 성장했다. 탁신의 자녀들은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가문 기업 '친(Shin) 코퍼레이션'의 지분을 꾸준히 사들였다. 그렇게 증여세가 빠져나갔다.

정부는 슬그머니 해외 투자자가 통신사의 지분을 49%까지 소유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다. 그리고 2006년 1월, 이들 가족은 싱가포르 국부펀드에 지분 49.6%를 팔았다. 양도세 한 푼 내지 않고 19억 달러(2조 5천억 원가량)를 챙겼다. 국민들이 분노했다. 청렴의 상징이자 탁신 전 총리를 정치인으로 입문시켰던 잠롱 방콕시장은 “1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다 쓰지 못할 돈이니 차익의 1/3을 기부하라”고 조언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를 지지했던 수많은 기업인과 정치인, 언론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2006년 9월 탁신 총리가 유엔 회의 참석차 미국에 있을 때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때부터 해외를 떠돌던 탁신 전 총리가 오는 10일 태국에 돌아온다. 탁신 친나왓(74) 전 총리의 귀환은 태국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2. 군부와 탁신의 대결

지난 20여 년 동안 태국 정치는 탁신가(프아타이당)와 군부의 대결이었다. 2008년 탁신의 매제 '솜차이'가, 2009년엔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집권했지만, 모두 사회혼란과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군부에게 꾸준히 집권의 명분을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탁신가의 무능과 부패였다.

지난 5월 총선에서도 탁신은 막내딸 패통탄(37)을 내세워 프아타이당의 재집권을 시도했다. 하지만 태국 국민들은 '왕실모독죄' 개정 등 선명한 개혁을 외친 '피타 림짜른랏(42)'의 전진당(MFP)에 표를 몰아줬다. 피타의 전진당은 방콕 33개 지역구 중 32곳을 승리하며 제 1당이 됐다.

하지만 상하원이 총리를 선출하는 지난달 19일, 태국 헌법재판소가 피타의 국회의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선출되지 않고 군부의 지명으로 임명된 상원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피타의 총리 선출 투표를 무산시켰다. 이제 제2당인 탁신가의 프아타이당(FOR THE THAI)이 총리 후보를 낼 차례다.

지난 2008년, 막내딸(가운데) 패통탄의 대학 졸업식에 모인 탁신 전 총리(74)의 가족.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뒤 해외에 머물던  탁신 전 총리가 오는 10일 태국으로 돌아온다.  2008년 탁신의 매제 솜차이가, 2009년엔 탁신의 여동생 잉락이 집권했지만, 모두 사회 혼란과 이어진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탁신은 이후 막내딸 패통탄(37)을 내세워 이번 총선을 치렀지만 141석 확보에 그쳐 제 2당에 머물렀다. 이제 남은 방법은 자신을 쫓아낸 군부와의 연정뿐이다. 사진 로이터
3. 군부와 탁신의 연대

프아타이당의 총리 후보가 집권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피타의 전진당과의 연정을 깨고 군부와 손을 잡으면 된다. 그럼 상원의원들의 몰표를 받아 손쉽게 총리가 된다. 그렇게 피타를 배신하고 집권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총선에서 피타를 지지한 국민들의 표는 그렇게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실제 프아타이당은 어제(8월 2일), 전진당을 배제하고 연정을 다시 꾸릴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왕실모독죄' 개정도 검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이번 총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전진당의 집권은 사실상 무산됐다. 프아타이당은 조만간 군부 정당과의 연정을 구체화할 것으로 보인다. 탈세 등의 혐의로 이미 실형을 선고받은 탁신 전 총리가 오는 10일 급거 귀국하는 것도 군부와의 밀약설을 뒷받침한다.

귀국한 그는 교도소로 가지 않고 사면을 받은 뒤, 프아타이당 출신 새 총리의 뒷배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게 군부는 권력에서 쫓겨나지 않고, 왕실은 ‘왕실모독죄’ 개정 논의를 백지화시키고, 탁신은 다시 권좌를 얻는 시나리오다. 모두가 좋다. 피타를 지지했던 태국 국민만 빼고...

시간이 지날수록 '왕실모독죄(형법 112조)' 개정 논란은 식고, 서민들 사이에서 프아타이당의 '국민 1인당 1만바트(40만 원) 디지털 화폐 바우처 지급' 공약에 대한 기대만 커진다. 공약대로 16세 이상 국민 5천만 명에게 모두 지급할 경우 5천 6백억 비트(21조 원 가량)의 예산이 필요하다. 태국 정부의 한 해 예산은 3.2조 바트(120조원 가량)로 한 해 정부 재정의 1/6이 소요된다. 참고로 태국 경제 규모는 우리 경제의 1/3 수준이다.


지난 2019년 총선에서 개혁 공약으로 70여 석을 확보한 미래당(FFP)를 해산하라는 헌법재산소의 판결이 내려지자 방콕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청년들의 시위가 수 개월 동안 이어졌다. 해산된 미래당(FFP)를 이어받아 ‘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한 전진당(MFP)은 이번 총선에서 151석을 얻어 제 1당으로 올라섰지만, 헌재는 이번엔 전진당(MFP)의 해산을 검토중이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전진당이 내세운 '왕실모독죄' 개정 공약의 헌법 위반 여부도 심리 중이다. 헌재가 조만간 전진당(MFP)에 대한 '정당 해산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전진당은 의회에서 완전히 쫓겨날 수도 있다. 실제 2020년에도 태국 헌재는 전진당의 전신인 미래당(FFP)이 총선에서 70여 석을 얻으며 개혁 공약을 추진하자 미래당을 해산시켰다.

그러자 방콕에선 몇 달간 민주화 시위가 이어졌다. 프아타이당이 전진당과의 연정을 깨고 군부와 함께 집권하면 태국 국민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태국 속담에 “죽은 코끼리의 온 몸을 연잎으로 덮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진실은 감추기 어렵다는 뜻이다. 탁신은 이번 총선 국민들이 보여준 민심을 온몸으로 가릴 수 있을까? 지난 20여 년 동안 태국 정치의 개혁과 비리 의혹의 주인공, '탁신 친나왓'이 돌아온다.

태국 상하원은 내일(4일) 다시 총리 선출을 시도한다. 프아타이당의 '스레타 타위신(60)'이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탁신의 오랜 친구로 부동산 재벌인 그의 자산은 1조 원이 넘는다. 예상을 깨고 개혁 정당이 승리를 거둔 태국 총선은 이렇게 예상대로 다시 군부와 프아타이당의 승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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