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요금은 ‘깨알’ 표기…호텔 결제 눈속임 피하세요

입력 2023.08.10 (14:06) 수정 2023.08.1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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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계획을 짠다. 비행기 표는 끊었다. 이제 호텔을 예약할 차례다.

호텔 예약 플랫폼에 접속한다. 이왕이면 유명 사이트로 간다. 알만한 곳이니 믿음이 더 간다.

A 호텔로 정했다. 소개 페이지에 나온 가격은 35만 원. 비싸지만, 휴가니까 큰맘 먹고 결제한다.

문자메시지로 카드 결제액이 날아왔다. 그런데 45만 원이 찍혔다.

결제 페이지에 다시 접속한다. 다시 봐도 35만 원이다. 어찌 된 일인가. 좀 더 자세히 봤다.

'+세금 및 기타 요금 10만 원'

이걸 못 보고 놓쳤다. '깨알' 같은 글씨긴 했지만, 눈을 더 부릅뜨고 봤어야 했다. 후회가 밀려온다.

■ "눈 크게 뜨고 잘 봤어야죠"

눈속임에 당하는 이런 일은 가상 상황이 아니다. 적잖은 소비자가 자주 겪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피해만 한 해 천 건이 넘는다. 소비자원이 '글로벌 숙박 플랫폼' 관련 소비자 상담 건수를 집계해보니, 최근 4년(2019년~2022년) 동안 5,844건이었다.

설문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최근 1년 동안 글로벌 숙박 플랫폼을 이용한 500명에게 물었더니 57%(286명)가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접수된 소비자 상담의 97%가 특정 5개 플랫폼에 몰렸다. 아고다, 부킹닷컴, 호텔스닷컴, 익스피디아, 트립닷컴. 다들 알만한 호텔 예약 전문 사이트였다.

소비자원은 5개 플랫폼의 홈페이지를 직접 확인했다. 문제는 여전했다. 개선되지 않았다. 대표적 유형은 다음과 같다.

▣ 유형 1. 첫 페이지에 세금·수수료 제외 금액만 표시하기
▣ 유형 2. 결제 페이지에 추가 요금을 매우 작은 글씨로 표시하기


전형적인 눈속임 상술, 이른바 다크패턴(Dark Pattern)이다.

다크패턴 중에서도 이번 사례처럼 가격 일부만 미끼처럼 보여준 뒤, 추가 요금을 '살짝' 덧대는 방식을 순차공개 가격책정(Drip Pricing)이라고 부른다.

■ 다크패턴? 넛지?

행동경제학에 '넛지(nudge)'라는 개념이 있다. 같은 이름의 경제 서적은 한때 베스트셀러였다.

넛지란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보자. 신약이 나왔다. 환자의 90%를 치료할 수 있다. 다만, 부작용으로 10%가 사망할 수도 있다.

"100명 중 90명이 산다." vs "100명 중 10명이 죽는다."

같은 의미인데,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신약에 대한 여론은 극과 극으로 갈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업이 소비자의 선택을 유인하기 위해 넛지 기법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디지털 카메라는 셔터가 없다. 그러니 '찰칵' 소리가 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굳이 집어넣는다. '찰칵' 소리가 나야 사진을 찍었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일종의 피드백을 주면서 소비자의 효용감을 올리는 넛지 기법이다. (성범죄를 막기 위한 법적 의무이기도 하다.)

문제는 넛지 기법이 선을 넘을 때이다. '유인'을 넘어 '기만'에 이를 때다. 기만의 수준에 이르면, 다크패턴이 된다. 일종의 '흑화'된 넛지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 다크패턴 금지법은 왜 없을까

다크패턴은 유형이 다양하다. 분류법에 따라 다르지만, 10개~20개 유형이 있다고 보는 게 통상적이다. 기업들이 소비자를 유인(혹은 기만)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법성은 유형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유형은 기존 법률을 끌어오면 어찌어찌 처벌할 수 있지만, 또다른 유형은 아무리 법을 뒤져도 금지할 근거 조항이 없기도 하다.

가격 순차공개는 현행법상 어디에도 저촉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처벌하거나 소비자에게 보상해줄 근거가 없다.

다크패턴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법이나 규칙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월 다크패턴에 대한 종합 대책을 내놓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아직은 논의가 진행 중이다.

소비자원도 이번에 확인한 가격 순차공개를 개선하라고 해당 플랫폼에 요구했다. 다만, 강제력이 없는 권고다.

결국, 명시적 금지 규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뾰족한 수가 없다. 소비자가 눈을 부릅뜨고 잘 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픽 : 배동식, 김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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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3-08-10 1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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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계획을 짠다. 비행기 표는 끊었다. 이제 호텔을 예약할 차례다.

호텔 예약 플랫폼에 접속한다. 이왕이면 유명 사이트로 간다. 알만한 곳이니 믿음이 더 간다.

A 호텔로 정했다. 소개 페이지에 나온 가격은 35만 원. 비싸지만, 휴가니까 큰맘 먹고 결제한다.

문자메시지로 카드 결제액이 날아왔다. 그런데 45만 원이 찍혔다.

결제 페이지에 다시 접속한다. 다시 봐도 35만 원이다. 어찌 된 일인가. 좀 더 자세히 봤다.

'+세금 및 기타 요금 10만 원'

이걸 못 보고 놓쳤다. '깨알' 같은 글씨긴 했지만, 눈을 더 부릅뜨고 봤어야 했다. 후회가 밀려온다.

■ "눈 크게 뜨고 잘 봤어야죠"

눈속임에 당하는 이런 일은 가상 상황이 아니다. 적잖은 소비자가 자주 겪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피해만 한 해 천 건이 넘는다. 소비자원이 '글로벌 숙박 플랫폼' 관련 소비자 상담 건수를 집계해보니, 최근 4년(2019년~2022년) 동안 5,844건이었다.

설문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최근 1년 동안 글로벌 숙박 플랫폼을 이용한 500명에게 물었더니 57%(286명)가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접수된 소비자 상담의 97%가 특정 5개 플랫폼에 몰렸다. 아고다, 부킹닷컴, 호텔스닷컴, 익스피디아, 트립닷컴. 다들 알만한 호텔 예약 전문 사이트였다.

소비자원은 5개 플랫폼의 홈페이지를 직접 확인했다. 문제는 여전했다. 개선되지 않았다. 대표적 유형은 다음과 같다.

▣ 유형 1. 첫 페이지에 세금·수수료 제외 금액만 표시하기
▣ 유형 2. 결제 페이지에 추가 요금을 매우 작은 글씨로 표시하기


전형적인 눈속임 상술, 이른바 다크패턴(Dark Pattern)이다.

다크패턴 중에서도 이번 사례처럼 가격 일부만 미끼처럼 보여준 뒤, 추가 요금을 '살짝' 덧대는 방식을 순차공개 가격책정(Drip Pricing)이라고 부른다.

■ 다크패턴? 넛지?

행동경제학에 '넛지(nudge)'라는 개념이 있다. 같은 이름의 경제 서적은 한때 베스트셀러였다.

넛지란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보자. 신약이 나왔다. 환자의 90%를 치료할 수 있다. 다만, 부작용으로 10%가 사망할 수도 있다.

"100명 중 90명이 산다." vs "100명 중 10명이 죽는다."

같은 의미인데,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신약에 대한 여론은 극과 극으로 갈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업이 소비자의 선택을 유인하기 위해 넛지 기법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디지털 카메라는 셔터가 없다. 그러니 '찰칵' 소리가 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굳이 집어넣는다. '찰칵' 소리가 나야 사진을 찍었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일종의 피드백을 주면서 소비자의 효용감을 올리는 넛지 기법이다. (성범죄를 막기 위한 법적 의무이기도 하다.)

문제는 넛지 기법이 선을 넘을 때이다. '유인'을 넘어 '기만'에 이를 때다. 기만의 수준에 이르면, 다크패턴이 된다. 일종의 '흑화'된 넛지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 다크패턴 금지법은 왜 없을까

다크패턴은 유형이 다양하다. 분류법에 따라 다르지만, 10개~20개 유형이 있다고 보는 게 통상적이다. 기업들이 소비자를 유인(혹은 기만)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법성은 유형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유형은 기존 법률을 끌어오면 어찌어찌 처벌할 수 있지만, 또다른 유형은 아무리 법을 뒤져도 금지할 근거 조항이 없기도 하다.

가격 순차공개는 현행법상 어디에도 저촉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처벌하거나 소비자에게 보상해줄 근거가 없다.

다크패턴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법이나 규칙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4월 다크패턴에 대한 종합 대책을 내놓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아직은 논의가 진행 중이다.

소비자원도 이번에 확인한 가격 순차공개를 개선하라고 해당 플랫폼에 요구했다. 다만, 강제력이 없는 권고다.

결국, 명시적 금지 규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뾰족한 수가 없다. 소비자가 눈을 부릅뜨고 잘 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픽 : 배동식, 김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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