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관동대지진” 사할린 조선인 학살 기밀 문서 입수

입력 2023.08.15 (10:00) 수정 2023.08.1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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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은 비극의 시작

일왕의 항복 선언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지만 화태(현재 러시아 사할린)에서 광복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해방을 맞은 사할린 미즈호 마을. 광복 전까지 강제 동원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과 정착한 일본인들은 이웃으로 지냈지만 광복이 되자 상황은 360도 달라졌다. 1945년 8월 20일부터 미즈호 마을은 엿새 동안 생지옥으로 변했다. 일본인 민간인들은 한인들이 '소련의 스파이 짓'을 해서 전쟁에 졌다며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해방둥이인 6개월 된 갓난 아기 등 무고한 조선인들이 희생양이 됐다.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나서 소련의 사체 발굴 작업과 조사가 진행됐다. 소련의 재판 기록에 남아 있던 흐릿한 사진 특히 6달 아기 등 일가족 살해 사건의 현장 사진들은 대부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어 복원 작업을 해야만 했다.



■KBS, 러 기밀 해제 문서 단독 입수… 진상 규명 탄력


광복 직후 러시아 사할린에 강제 동원된 한인들은 사할린 곳곳에서 일본 경찰과 군,민간인 등에 집단 학살됐다. 10여 년 전 정부가 일부 진상 규명을 했다. 하지만 일제의 조직적인 개입 등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추적하고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사건 발생 75년이 지나 학살 사건 심문 조서와 재판 기록물 등의 문건들이 기밀 해제됐고 사할린 한인회 등이 이를 입수했다. KBS는 2019년 당시 광복절 특집 탐사 다큐멘터리였던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를 제작하면서 전문가들과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했다. 이번에 관련 사실들을 뒷받침하는 구 소련 정부의 비밀 공식 문서가 나오면서 진상 규명 작업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가운데 수풀 사이에서 발견된 희생자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3장도 처음 세상에 공개됐다. 광복 직후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조선인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사할린 옛 에스토르 지구의 서해안 어촌 마을인 우씨로 마을에서 발생했다.

또 조선인들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운 혐의자의 체포 결정서와 일본 경찰 밀정의 한자 이름도 문서들에서 잇따라 발견됐다. 당시 KBS와 다큐 제작 과정에서 협업했던 사할린 향토박물관 진 율리아 박사는 기밀 해제된 문서를 입수하고 분석 작업을 진행하면서 "사할린에서 학살된 무명의 모든 한인 희생자들의 이름을 밝혀내고 이런 사건들을 연구하면서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앞서 KBS가 끈질긴 추적을 통해 미즈호 마을의 학살 희생자가 정부 조사 결과인 27명보다 많은 최소 35명이 넘는다는 증거들도 확인해 이번 문서들과 함께 철저한 규명이 필요하다.

특히 사할린 카미시스카에서 일본 경찰이 조선인 18명을 살해했다는 문서와 일본군의 방화와 살해 등 문건도 추가 입수됐다. 과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할린 학살 사건의 조사 책임자였던 방일권 교수는 "(학살 이유는)일본 군국주의와(패전)마지막 상황에서 일본 식민 체계의 여러 가지 잘못들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있는 것"이고 "스파이설이나 민족적 차별,군국주의적 작동 체계 이런 것들이(대량 학살에)작용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탄압을 당했던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저항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고 치안 유지와 국가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학살 사건이 발생했지만 관련 기록에서 이들이 반성하는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카미시스카 학살 사건 등 곳곳 학살 증언…진상 규명 '지지부진'


일본이 패망 직후 사할린 한인들을 학살한 대표적인 사건은 미즈호와 카미시스카 사건이 있다. 모두 무고한 조선인들을 잔혹하게 무차별 살해했다. 제노사이드였다. 카미시스카 학살 사건은 국경 인근에서 피난길에 올랐던 조선인 등 18명을 카미시스카(엣 레오니도보)파출소에서 일본 경찰들이 총살하고 불까지 지른 사건이다. 특히 재판 기록 가운데 학살을 주도했던 일본 경찰들에 대한 체포명령서까지 발견됐지만 그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일본 경찰들의 행방은 7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오리무중이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앞서 KBS는 4년 전 다큐 제작 과정에서 현장 추적 등을 통해 학살 관련 증언을 하거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취재원들을 한국과 일본, 러시아 모스크바와 사할린 등지에서 수소문했다.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러시아 연방 기록관리청과 연방 보안국 FSB(구 KGB)등을 상대로 전문가들과 함께 정보공개청구까지 진행했다. 2년 넘게 기다렸지만 허사였다.때문에 이번에 추가 입수된 미즈호와 카미시스카 사건 문건들을 통해 단서를 찾아 진상 규명의 실마리가 풀렸으면 한다. 아직도 사할린 한인 학살 사건의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확인되지 않고 진실은 묻혀 있다. 그래서 사할린 한인 학살 사건의 성격을 100년 전 발생한 '제2의 관동대지진"과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형 지진이라는 재난의 공포 속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고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헛소문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학살 이유는? "조선인은 스파이"…전면 재조사 시급

오랫동안 묻혀 있던 이런 기록 등이 발견되면서 그동안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 소문처럼 떠돌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그동안 봉인된 진실이었다. 학살 가해자들이 심문 조서 등을 통해 밝힌 살해 이유는 조선인들이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재판 기록만으로는 희생자의 정확한 명부도 파악할 수 없고 유족들의 추적도 힘든 상황이다. KBS는 국내는 물론 러시아와 일본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 일제의 조직적 개입 여부 등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고 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는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최소 만 6천여 명. 다른 지역보다 행방불명 등 미귀환 비율이 34.3%로 매우 높다. 일부는 징벌방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이중 징용까지 당했다. 당시 소련 민정국도 일본 군경에 의한 한인 살해를 사할린 인구 감소의 주된 요인으로 조사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의 강제 동원과 귀향길을 막은 소련, 이들을 외면한 조국 때문에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 동서 냉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조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도 사할린 곳곳에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남아 있다. 이산과 망향의 섬 사할린. 우리 역사의 질곡과 슬픔의 틈새 공간이지만 우리들의 기억에서 쉽게 잊혀졌다. 오늘도 사할린에서 행방불명된 부모 등 가족을 찾는 이들의 피 울음이 이어지고 있다.이제 국가는 더 늦기 전에 응답해야 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힐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을 추적하면서 비국민과 역적이라며 살해 위협까지 당했던 역사의 치열한 기록자 일본 하야시 에이다이 작가는 "과거의 역사에 눈을 감으면 잘못은 되풀이된다"고 강조했다. 더 늦기 전에 국가 차원의 전면 재조사를 통해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밝히고 이름을 호명해야 한다.

[다시보기] 광복절 특집 다큐/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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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은 비극의 시작

일왕의 항복 선언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지만 화태(현재 러시아 사할린)에서 광복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해방을 맞은 사할린 미즈호 마을. 광복 전까지 강제 동원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과 정착한 일본인들은 이웃으로 지냈지만 광복이 되자 상황은 360도 달라졌다. 1945년 8월 20일부터 미즈호 마을은 엿새 동안 생지옥으로 변했다. 일본인 민간인들은 한인들이 '소련의 스파이 짓'을 해서 전쟁에 졌다며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해방둥이인 6개월 된 갓난 아기 등 무고한 조선인들이 희생양이 됐다.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나서 소련의 사체 발굴 작업과 조사가 진행됐다. 소련의 재판 기록에 남아 있던 흐릿한 사진 특히 6달 아기 등 일가족 살해 사건의 현장 사진들은 대부분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어 복원 작업을 해야만 했다.



■KBS, 러 기밀 해제 문서 단독 입수… 진상 규명 탄력


광복 직후 러시아 사할린에 강제 동원된 한인들은 사할린 곳곳에서 일본 경찰과 군,민간인 등에 집단 학살됐다. 10여 년 전 정부가 일부 진상 규명을 했다. 하지만 일제의 조직적인 개입 등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추적하고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사건 발생 75년이 지나 학살 사건 심문 조서와 재판 기록물 등의 문건들이 기밀 해제됐고 사할린 한인회 등이 이를 입수했다. KBS는 2019년 당시 광복절 특집 탐사 다큐멘터리였던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를 제작하면서 전문가들과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를 진행했다. 이번에 관련 사실들을 뒷받침하는 구 소련 정부의 비밀 공식 문서가 나오면서 진상 규명 작업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가운데 수풀 사이에서 발견된 희생자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3장도 처음 세상에 공개됐다. 광복 직후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조선인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사할린 옛 에스토르 지구의 서해안 어촌 마을인 우씨로 마을에서 발생했다.

또 조선인들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운 혐의자의 체포 결정서와 일본 경찰 밀정의 한자 이름도 문서들에서 잇따라 발견됐다. 당시 KBS와 다큐 제작 과정에서 협업했던 사할린 향토박물관 진 율리아 박사는 기밀 해제된 문서를 입수하고 분석 작업을 진행하면서 "사할린에서 학살된 무명의 모든 한인 희생자들의 이름을 밝혀내고 이런 사건들을 연구하면서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앞서 KBS가 끈질긴 추적을 통해 미즈호 마을의 학살 희생자가 정부 조사 결과인 27명보다 많은 최소 35명이 넘는다는 증거들도 확인해 이번 문서들과 함께 철저한 규명이 필요하다.

특히 사할린 카미시스카에서 일본 경찰이 조선인 18명을 살해했다는 문서와 일본군의 방화와 살해 등 문건도 추가 입수됐다. 과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할린 학살 사건의 조사 책임자였던 방일권 교수는 "(학살 이유는)일본 군국주의와(패전)마지막 상황에서 일본 식민 체계의 여러 가지 잘못들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이 있는 것"이고 "스파이설이나 민족적 차별,군국주의적 작동 체계 이런 것들이(대량 학살에)작용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탄압을 당했던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저항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고 치안 유지와 국가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학살 사건이 발생했지만 관련 기록에서 이들이 반성하는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카미시스카 학살 사건 등 곳곳 학살 증언…진상 규명 '지지부진'


일본이 패망 직후 사할린 한인들을 학살한 대표적인 사건은 미즈호와 카미시스카 사건이 있다. 모두 무고한 조선인들을 잔혹하게 무차별 살해했다. 제노사이드였다. 카미시스카 학살 사건은 국경 인근에서 피난길에 올랐던 조선인 등 18명을 카미시스카(엣 레오니도보)파출소에서 일본 경찰들이 총살하고 불까지 지른 사건이다. 특히 재판 기록 가운데 학살을 주도했던 일본 경찰들에 대한 체포명령서까지 발견됐지만 그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일본 경찰들의 행방은 7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오리무중이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앞서 KBS는 4년 전 다큐 제작 과정에서 현장 추적 등을 통해 학살 관련 증언을 하거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취재원들을 한국과 일본, 러시아 모스크바와 사할린 등지에서 수소문했다.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러시아 연방 기록관리청과 연방 보안국 FSB(구 KGB)등을 상대로 전문가들과 함께 정보공개청구까지 진행했다. 2년 넘게 기다렸지만 허사였다.때문에 이번에 추가 입수된 미즈호와 카미시스카 사건 문건들을 통해 단서를 찾아 진상 규명의 실마리가 풀렸으면 한다. 아직도 사할린 한인 학살 사건의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확인되지 않고 진실은 묻혀 있다. 그래서 사할린 한인 학살 사건의 성격을 100년 전 발생한 '제2의 관동대지진"과 비슷하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형 지진이라는 재난의 공포 속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고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헛소문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학살 이유는? "조선인은 스파이"…전면 재조사 시급

오랫동안 묻혀 있던 이런 기록 등이 발견되면서 그동안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 소문처럼 떠돌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그동안 봉인된 진실이었다. 학살 가해자들이 심문 조서 등을 통해 밝힌 살해 이유는 조선인들이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재판 기록만으로는 희생자의 정확한 명부도 파악할 수 없고 유족들의 추적도 힘든 상황이다. KBS는 국내는 물론 러시아와 일본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 일제의 조직적 개입 여부 등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고 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는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 최소 만 6천여 명. 다른 지역보다 행방불명 등 미귀환 비율이 34.3%로 매우 높다. 일부는 징벌방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이중 징용까지 당했다. 당시 소련 민정국도 일본 군경에 의한 한인 살해를 사할린 인구 감소의 주된 요인으로 조사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의 강제 동원과 귀향길을 막은 소련, 이들을 외면한 조국 때문에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 동서 냉전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조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도 사할린 곳곳에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남아 있다. 이산과 망향의 섬 사할린. 우리 역사의 질곡과 슬픔의 틈새 공간이지만 우리들의 기억에서 쉽게 잊혀졌다. 오늘도 사할린에서 행방불명된 부모 등 가족을 찾는 이들의 피 울음이 이어지고 있다.이제 국가는 더 늦기 전에 응답해야 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힐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을 추적하면서 비국민과 역적이라며 살해 위협까지 당했던 역사의 치열한 기록자 일본 하야시 에이다이 작가는 "과거의 역사에 눈을 감으면 잘못은 되풀이된다"고 강조했다. 더 늦기 전에 국가 차원의 전면 재조사를 통해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밝히고 이름을 호명해야 한다.

[다시보기] 광복절 특집 다큐/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9-0138&program_id=PS-2019135669-01-000&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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