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보다 더 오래됐는데…철거하라고?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08.20 (10:17) 수정 2023.08.2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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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수도 파리의 센강 변을 따라 똑같은 모양으로 죽 늘어선 녹색 노천 상점들. 수레처럼 생긴 진열대에 고서나 그림, 엽서 등을 파는 노천 서점입니다. 센 강변 3km에 걸쳐 230여 개가 노천 서점 거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에펠탑과 개선문, 노트르담 성당 못지않게 파리하면 떠오르는 관광 명소이자, 역사적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이런 노천 서점 거리가 조성된 건 400여 년 전. 19세기 말인 1889년 세워진 에펠탑보다도 더 오랜, 파리의 터줏대감격인 관광 명소입니다. 그런데 이 노천 서점들이 철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내년에 개최되는 파리 올림픽 때문입니다.

■ "테러 위험 있으니 센 강변에서 철거하라"

논란의 시작은 파리 경찰청이 지난달 말 노천서점협회에 보낸 공문입니다. 내년 7월 26일 열리는 파리 올림픽이 1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입니다. 파리 경찰은 공문에서 올림픽 개막식을 위해 보안상의 이유로 노천 서점 진열대를 철거해야 한다고 통보했습니다. 공문에는 철거는 기정사실이고, 철거와 재설치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한 노천 서점 주인이 취재진에게 서점 철거 통보 내용이 담긴 파리 경찰청의 공문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한 노천 서점 주인이 취재진에게 서점 철거 통보 내용이 담긴 파리 경찰청의 공문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서적상들은 반발했습니다. 서적상들이 특히 많이 몰려있는 퐁네프 다리 인근의 노천 서점 운영자들을 만나 현재 상황과 우려되는 점들을 들어봤습니다.

22년간 센강 변에서 노천 서점을 운영해오고 있는 프루보 씨는 센강에서 열리는 파리 올림픽 개막식 특성상 노천 서점이 시야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과 보안 우려에 대해선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5백 권이 넘는 책을 어디로, 어떻게 옮길지 막막하고 그 과정에서 책이 파손되는 것도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통상 노천 서점들은 관광객이 많고 날이 풀리는 여름이 대목인데, 이 기간에 문을 닫아야 하면 재정적 손해를 볼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한 서적상이 취재진에게 서점 철거에 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 한 서적상이 취재진에게 서점 철거에 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서적상인 크리스틴 씨는 지금은 경찰의 통보에 맞서 싸우는 중이지만, 경찰이 최종 결정을 내리면 떠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또 서점 철거에 크레인이 이용된다고 들었는데, 책을 담은 진열대 상자를 그대로 옮기게 되면 부서지고 말 것이라며 역시 철거 과정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크리스틴 씨는 노천 서점을 운영해온 지난 30년간 문화 행사를 이유로 퐁네프 다리 주변에 있는 일부 서점들이 임시로 자리를 옮긴 적은 있지만 단 4시간 걸리는 올림픽 개막식을 위해 200곳이 넘는 노천 서점이 한꺼번에 몇 주간 떠나야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면서 노천 서점은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다른 서적상도 노천 서점이 올림픽에 방해된다면 가림막을 설치하는 등의 다른 방법이 있지 않냐고 제안했습니다. 경관 문제를 이유로 4시간 동안의 올림픽 행사를 위해 센강 변 나무를 베지는 않지 않냐고도 반문합니다.

■ 노천 서점이 뭐길래…유네스코 등재 추진도

노천 서점은 1600년대 초 퐁네프 다리 주변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1607년 완공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퐁네프와 노천 서점의 역사가 함께 시작된 셈입니다. 첫 노천 서점은 왕의 허가를 받은 공식 노점상으로 헌책방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18세기에는 오래된 책을 파는 사람이라는 뜻의 '부키니스트'란 용어가 처음 나왔고, 센 강변 서적상을 통칭하는 말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파리 센강 변 노천 서점. 1870년과 1901년 사이 추정. (사진 출처: 알베르트 브리쇼/카르나발레 박물관 소장 Albert Brichaut/ Musée Carnavalet)파리 센강 변 노천 서점. 1870년과 1901년 사이 추정. (사진 출처: 알베르트 브리쇼/카르나발레 박물관 소장 Albert Brichaut/ Musée Carnavalet)

이후 19세기 초, 파리시는 이 노천 서점을 공식 사업으로 승인하고, 노천 진열대 크기와 운영 시간 등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수가 19세기 중반에는 60여 개를 넘어섰고, 센강 변을 따라 더 길게 퍼져갔습니다. 이후
1900년 200개, 1957년 230개, 1991년 240여개까지 늘었다가 현재는 230여개로, 전쟁과 경제 위기, 디지털 혁명을 겪으면서도 400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노천서점협회 대표인 제롬 씨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파리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관광객에게 파리는 에펠탑, 노트르담 대성당, 서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노천 서점을 단순한 생업이 아닌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 인식하는 서적상 '부키니스트'들의 인식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 프랑스 문화부는 2019년 프랑스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노천서점 전통을 올렸습니다. 이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 지식인 비판 동참 "문화에 대한 야만성"

지식인들도 노천 서점 철거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에드가 모랭과 역사학자인 모나 오주프 등 프랑스 지식인 40여 명은 최근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에 기고문을 게재하고, "센강의 노천 서점을 강제로 이전시키려는 건 재앙적이고 비참한 결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대중 문화 유산을 보존하기는커녕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거의 없으며, 진정한 가치를 충분히 고려하거나 숙고하지 않고 있다"고 당국의 결정 과정을 지적했습니다. 또 파리시가 이론적으로는 올림픽 기간 일시적 철거라고 주장하지만, 이 자체가 침범하지 말아야 할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이들이 문제 삼는 부분은 올림픽을 이유로 문화유산을 비롯한 공공재가 희생되거나 올림픽 성공의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이번 일은 올림픽 행사를 개최하는 어느 도시나 국가에든 해당된다며, 문학을 비롯한 예술 지성은 오로지 대회 성적만을 바라보는 산업화 된 올림픽의 목표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문화에 대한 야만성이 목격되는 시기"라고 꼬집으며, 프랑스의 상징이라 할 "아름다운 자유의 정신을 부끄럽게 팔아넘기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소셜네트워크에서는 노천 서점을 철거 통보의 토대가 된 '보안법'을 규탄하는 청원에 7월 말부터 현재까지 8만 명 넘는 이들이 서명했습니다. 파리 시는 서점 철거에 대한 서적상들의 입장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8월 말 취합해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올림픽이라는 국제적 행사와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가장 프랑스적인 가치 사이에서, 파리 당국이 어떤 해법을 찾을지 주목되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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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펠탑보다 더 오래됐는데…철거하라고?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3-08-20 10:17:26
    • 수정2023-08-20 10: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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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수도 파리의 센강 변을 따라 똑같은 모양으로 죽 늘어선 녹색 노천 상점들. 수레처럼 생긴 진열대에 고서나 그림, 엽서 등을 파는 노천 서점입니다. 센 강변 3km에 걸쳐 230여 개가 노천 서점 거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에펠탑과 개선문, 노트르담 성당 못지않게 파리하면 떠오르는 관광 명소이자, 역사적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이런 노천 서점 거리가 조성된 건 400여 년 전. 19세기 말인 1889년 세워진 에펠탑보다도 더 오랜, 파리의 터줏대감격인 관광 명소입니다. 그런데 이 노천 서점들이 철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내년에 개최되는 파리 올림픽 때문입니다.

■ "테러 위험 있으니 센 강변에서 철거하라"

논란의 시작은 파리 경찰청이 지난달 말 노천서점협회에 보낸 공문입니다. 내년 7월 26일 열리는 파리 올림픽이 1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입니다. 파리 경찰은 공문에서 올림픽 개막식을 위해 보안상의 이유로 노천 서점 진열대를 철거해야 한다고 통보했습니다. 공문에는 철거는 기정사실이고, 철거와 재설치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한 노천 서점 주인이 취재진에게 서점 철거 통보 내용이 담긴 파리 경찰청의 공문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서적상들은 반발했습니다. 서적상들이 특히 많이 몰려있는 퐁네프 다리 인근의 노천 서점 운영자들을 만나 현재 상황과 우려되는 점들을 들어봤습니다.

22년간 센강 변에서 노천 서점을 운영해오고 있는 프루보 씨는 센강에서 열리는 파리 올림픽 개막식 특성상 노천 서점이 시야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과 보안 우려에 대해선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5백 권이 넘는 책을 어디로, 어떻게 옮길지 막막하고 그 과정에서 책이 파손되는 것도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통상 노천 서점들은 관광객이 많고 날이 풀리는 여름이 대목인데, 이 기간에 문을 닫아야 하면 재정적 손해를 볼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한 서적상이 취재진에게 서점 철거에 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서적상인 크리스틴 씨는 지금은 경찰의 통보에 맞서 싸우는 중이지만, 경찰이 최종 결정을 내리면 떠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또 서점 철거에 크레인이 이용된다고 들었는데, 책을 담은 진열대 상자를 그대로 옮기게 되면 부서지고 말 것이라며 역시 철거 과정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크리스틴 씨는 노천 서점을 운영해온 지난 30년간 문화 행사를 이유로 퐁네프 다리 주변에 있는 일부 서점들이 임시로 자리를 옮긴 적은 있지만 단 4시간 걸리는 올림픽 개막식을 위해 200곳이 넘는 노천 서점이 한꺼번에 몇 주간 떠나야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면서 노천 서점은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다른 서적상도 노천 서점이 올림픽에 방해된다면 가림막을 설치하는 등의 다른 방법이 있지 않냐고 제안했습니다. 경관 문제를 이유로 4시간 동안의 올림픽 행사를 위해 센강 변 나무를 베지는 않지 않냐고도 반문합니다.

■ 노천 서점이 뭐길래…유네스코 등재 추진도

노천 서점은 1600년대 초 퐁네프 다리 주변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1607년 완공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퐁네프와 노천 서점의 역사가 함께 시작된 셈입니다. 첫 노천 서점은 왕의 허가를 받은 공식 노점상으로 헌책방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18세기에는 오래된 책을 파는 사람이라는 뜻의 '부키니스트'란 용어가 처음 나왔고, 센 강변 서적상을 통칭하는 말로 지금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파리 센강 변 노천 서점. 1870년과 1901년 사이 추정. (사진 출처: 알베르트 브리쇼/카르나발레 박물관 소장 Albert Brichaut/ Musée Carnavalet)
이후 19세기 초, 파리시는 이 노천 서점을 공식 사업으로 승인하고, 노천 진열대 크기와 운영 시간 등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수가 19세기 중반에는 60여 개를 넘어섰고, 센강 변을 따라 더 길게 퍼져갔습니다. 이후
1900년 200개, 1957년 230개, 1991년 240여개까지 늘었다가 현재는 230여개로, 전쟁과 경제 위기, 디지털 혁명을 겪으면서도 400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노천서점협회 대표인 제롬 씨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파리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관광객에게 파리는 에펠탑, 노트르담 대성당, 서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노천 서점을 단순한 생업이 아닌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 인식하는 서적상 '부키니스트'들의 인식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 프랑스 문화부는 2019년 프랑스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노천서점 전통을 올렸습니다. 이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 지식인 비판 동참 "문화에 대한 야만성"

지식인들도 노천 서점 철거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에드가 모랭과 역사학자인 모나 오주프 등 프랑스 지식인 40여 명은 최근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에 기고문을 게재하고, "센강의 노천 서점을 강제로 이전시키려는 건 재앙적이고 비참한 결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대중 문화 유산을 보존하기는커녕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거의 없으며, 진정한 가치를 충분히 고려하거나 숙고하지 않고 있다"고 당국의 결정 과정을 지적했습니다. 또 파리시가 이론적으로는 올림픽 기간 일시적 철거라고 주장하지만, 이 자체가 침범하지 말아야 할 문화적 가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이들이 문제 삼는 부분은 올림픽을 이유로 문화유산을 비롯한 공공재가 희생되거나 올림픽 성공의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이번 일은 올림픽 행사를 개최하는 어느 도시나 국가에든 해당된다며, 문학을 비롯한 예술 지성은 오로지 대회 성적만을 바라보는 산업화 된 올림픽의 목표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문화에 대한 야만성이 목격되는 시기"라고 꼬집으며, 프랑스의 상징이라 할 "아름다운 자유의 정신을 부끄럽게 팔아넘기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소셜네트워크에서는 노천 서점을 철거 통보의 토대가 된 '보안법'을 규탄하는 청원에 7월 말부터 현재까지 8만 명 넘는 이들이 서명했습니다. 파리 시는 서점 철거에 대한 서적상들의 입장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8월 말 취합해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올림픽이라는 국제적 행사와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가장 프랑스적인 가치 사이에서, 파리 당국이 어떤 해법을 찾을지 주목되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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