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실험·포로처형’ 수용소…“조국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파원 리포트]

입력 2023.08.24 (08:00) 수정 2023.08.2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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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 5만 명 이상 사망 …독일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독일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35km 정도 가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이 나옵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이 운영했던 강제수용소입니다.

수용소 운영 기간 동안 수감됐던 이들은 20만 명이 넘습니다. 나치 독일에 저항했던 정치범을 비롯해 독일계 유대인, 동성애자, 전쟁포로 등이 이곳에 갇혔습니다. 이 중 인체 실험에 동원되거나, 총살, 굶주림 등으로 사망한 이들은 5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아스트리드 라이 작센하우젠 수용소 기념관 부관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는 모든 강제수용소를 관리하는 중앙행정기관 바로 옆에 있었기에 강제수용소 역사 전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라며, "수용소 건설 방법과 수감자 처우 방법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독일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독일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

■ 인체실험실·가스실 보존 … 기록으로 남긴 참혹한 역사

일부 건물들은 사라졌지만, 수용소 핵심 시설들은 남아 있습니다. 특히 '전쟁 범죄'와 관련된 시설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라이 작센하우젠 수용소 기념관라이 작센하우젠 수용소 기념관

하얀 타일로 포장된 구조물은 나치가 인체 실험을 벌인 곳입니다. 기념관은 인체 실험이 진행된 과정과 담당자를 관련 문서와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전쟁 포로에 대한 대규모 처형도 이뤄졌습니다. 특히 수용소를 관리하는 나치 친위대는 다수의 전쟁 포로를 단시간에 처형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했고, 다른 수용소 지휘관들 앞에서 시연까지 했습니다.

1941년 9월부터 11월까지 13,000명 이상의 소련 전쟁 포로가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중 10,000명 이상이 '목에 총을 쏘는 시설'에서 사망했습니다

처형실은 탈의실과 의사 진료실 뒤에 있어 피해자들은 키 측정을 포함한 건강 검진을 받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앞쪽 방에 특별히 준비된 측정봉 바로 뒤에 벽에 난 구멍이 있었는데, 이 구멍을 통해 나치 친위대가 뒤쪽 방에서 치명적인 총격을 가했습니다. 옆 방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총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시끄러운 음악을 틀었습니다. 처형실 옆에는 시체실이 있었고 이동식 화장로 4개가 있었습니다.

작센하우젠에 있는 '수용소 사찰단'은 독일군과 협력하여 이러한 살인 작전을 조직했습니다. '목에 총을 쏘는 방법'은 다른 수용소의 지휘관들에게 시연되었습니다. 지휘 참모 가운데 30명 이상의 나치 친위대 요원들이 이 처형에 관여했습니다.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 전시 설명 중]


■ 딸과 함께 온 독일인 아버지 …"조국을 보여주고 싶었다"

독일 정부는 과거의 만행을 철저하게 직시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성을 위해선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관련 기록들 역시 이를 위한 목적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독일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공간이지만, 이곳을 방문한 독일인 관람객들도 많습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마르쿠스 플뢰츠너 씨는 15살인 자신의 딸 레아와 함께 왔습니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자신의 딸에게 "조국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자랑스런 조국의 모습뿐 아니라 참혹했던 과거를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의 딸 레아도 "새로운 세대로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관람객 마르쿠스 플뢰츠너·레아 플뢰츠너 부녀 인터뷰관람객 마르쿠스 플뢰츠너·레아 플뢰츠너 부녀 인터뷰

독일 묀헨글라트바흐에서 교사로 일하는 캐서린 리즈 씨는 가족들과 함께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를 찾았습니다. 캐서린 씨는 "우리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시설은 매우 중요하다"며, "사람들에게 가해진 고통과 폭력이 얼마나 컸고 인종, 사람, 성별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컸는지를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학생들이 나치 독일 관련 시설 방문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관람객 캐서린 리즈(교사) 인터뷰관람객 캐서린 리즈(교사) 인터뷰

■ 일본과 다른 독일의 반성 … 어떻게 가능했나?

독일은 수도 베를린에도 곳곳에 나치의 전쟁 범죄를 기록한 기념관을 만들고 과거사를 반성합니다.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을 기피하고, 일부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는 일본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아른트 바우어캠퍼 베를린 자유대 역사연구소 교수에게 독일의 반성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독일 정부가 과거사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이러한 책임을 감당하는 데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서독은 물론, 어느 정도 동독에서도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1970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현장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서독 내에서 이를 비판하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아른트 바우어캠퍼 베를린 자유대 역사연구소 교수

아른트 바우어캠퍼 베를린 자유대 역사연구소 교수 인터뷰아른트 바우어캠퍼 베를린 자유대 역사연구소 교수 인터뷰

하지만 유대인만 600만 명이 희생된 홀로코스트는 독일 정부가 외면하기엔 너무나 큰 대규모 학살이었고, 전쟁 이후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독일 정부가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반성하게 됐다는 겁니다. 여전히 독일 내에서 과거의 잘못을 부인하는 이들도 있지만, 주류 정치계가 굳건한 반성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기념관 설립 등 과거사 반성 노력이 오늘까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아른트 교수는 또 독일의 적극적인 과거사 반성이 2차 대전 이후 주변 국가들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라이프니츠 현대사 연구소 소장을 지낸 마틴 자브로브 교수는 KBS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독일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것은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인권 원칙에 입각한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정부 차원의 과거사 반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특히 "우리는 독일의 과거를 자부심이 아니라 고통과 수치심, 죄책감, 그리고 우리가 미래에 더 잘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생각한다" 며 "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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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체실험·포로처형’ 수용소…“조국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파원 리포트]
    • 입력 2023-08-24 08:00:46
    • 수정2023-08-24 09:2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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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 5만 명 이상 사망 …독일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독일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35km 정도 가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이 나옵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이 운영했던 강제수용소입니다.

수용소 운영 기간 동안 수감됐던 이들은 20만 명이 넘습니다. 나치 독일에 저항했던 정치범을 비롯해 독일계 유대인, 동성애자, 전쟁포로 등이 이곳에 갇혔습니다. 이 중 인체 실험에 동원되거나, 총살, 굶주림 등으로 사망한 이들은 5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아스트리드 라이 작센하우젠 수용소 기념관 부관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는 모든 강제수용소를 관리하는 중앙행정기관 바로 옆에 있었기에 강제수용소 역사 전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라며, "수용소 건설 방법과 수감자 처우 방법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독일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
■ 인체실험실·가스실 보존 … 기록으로 남긴 참혹한 역사

일부 건물들은 사라졌지만, 수용소 핵심 시설들은 남아 있습니다. 특히 '전쟁 범죄'와 관련된 시설은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라이 작센하우젠 수용소 기념관
하얀 타일로 포장된 구조물은 나치가 인체 실험을 벌인 곳입니다. 기념관은 인체 실험이 진행된 과정과 담당자를 관련 문서와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전쟁 포로에 대한 대규모 처형도 이뤄졌습니다. 특히 수용소를 관리하는 나치 친위대는 다수의 전쟁 포로를 단시간에 처형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했고, 다른 수용소 지휘관들 앞에서 시연까지 했습니다.

1941년 9월부터 11월까지 13,000명 이상의 소련 전쟁 포로가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중 10,000명 이상이 '목에 총을 쏘는 시설'에서 사망했습니다

처형실은 탈의실과 의사 진료실 뒤에 있어 피해자들은 키 측정을 포함한 건강 검진을 받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앞쪽 방에 특별히 준비된 측정봉 바로 뒤에 벽에 난 구멍이 있었는데, 이 구멍을 통해 나치 친위대가 뒤쪽 방에서 치명적인 총격을 가했습니다. 옆 방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총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시끄러운 음악을 틀었습니다. 처형실 옆에는 시체실이 있었고 이동식 화장로 4개가 있었습니다.

작센하우젠에 있는 '수용소 사찰단'은 독일군과 협력하여 이러한 살인 작전을 조직했습니다. '목에 총을 쏘는 방법'은 다른 수용소의 지휘관들에게 시연되었습니다. 지휘 참모 가운데 30명 이상의 나치 친위대 요원들이 이 처형에 관여했습니다.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기념관 전시 설명 중]


■ 딸과 함께 온 독일인 아버지 …"조국을 보여주고 싶었다"

독일 정부는 과거의 만행을 철저하게 직시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성을 위해선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관련 기록들 역시 이를 위한 목적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독일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공간이지만, 이곳을 방문한 독일인 관람객들도 많습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마르쿠스 플뢰츠너 씨는 15살인 자신의 딸 레아와 함께 왔습니다. 그는 현재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자신의 딸에게 "조국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자랑스런 조국의 모습뿐 아니라 참혹했던 과거를 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의 딸 레아도 "새로운 세대로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관람객 마르쿠스 플뢰츠너·레아 플뢰츠너 부녀 인터뷰
독일 묀헨글라트바흐에서 교사로 일하는 캐서린 리즈 씨는 가족들과 함께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를 찾았습니다. 캐서린 씨는 "우리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시설은 매우 중요하다"며, "사람들에게 가해진 고통과 폭력이 얼마나 컸고 인종, 사람, 성별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컸는지를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학생들이 나치 독일 관련 시설 방문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관람객 캐서린 리즈(교사) 인터뷰
■ 일본과 다른 독일의 반성 … 어떻게 가능했나?

독일은 수도 베를린에도 곳곳에 나치의 전쟁 범죄를 기록한 기념관을 만들고 과거사를 반성합니다. 전쟁 범죄에 대한 반성을 기피하고, 일부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는 일본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아른트 바우어캠퍼 베를린 자유대 역사연구소 교수에게 독일의 반성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독일 정부가 과거사에 대해 반성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이 이러한 책임을 감당하는 데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서독은 물론, 어느 정도 동독에서도 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1970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현장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서독 내에서 이를 비판하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아른트 바우어캠퍼 베를린 자유대 역사연구소 교수

아른트 바우어캠퍼 베를린 자유대 역사연구소 교수 인터뷰
하지만 유대인만 600만 명이 희생된 홀로코스트는 독일 정부가 외면하기엔 너무나 큰 대규모 학살이었고, 전쟁 이후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독일 정부가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반성하게 됐다는 겁니다. 여전히 독일 내에서 과거의 잘못을 부인하는 이들도 있지만, 주류 정치계가 굳건한 반성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기념관 설립 등 과거사 반성 노력이 오늘까지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아른트 교수는 또 독일의 적극적인 과거사 반성이 2차 대전 이후 주변 국가들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라이프니츠 현대사 연구소 소장을 지낸 마틴 자브로브 교수는 KBS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독일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것은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인권 원칙에 입각한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정부 차원의 과거사 반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특히 "우리는 독일의 과거를 자부심이 아니라 고통과 수치심, 죄책감, 그리고 우리가 미래에 더 잘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생각한다" 며 "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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