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본 홍범도…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뉴스를 만나다]

입력 2023.09.03 (21:15) 수정 2023.09.0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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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 한 주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지요.

육군사관학교는 결국 '이전' 결정을 내렸고, 그에 대한 반발 여론도 거셉니다.

<뉴스를 만나다>, 오늘(3일)은 홍범도 장군을 연구해온 학계 최고 권위자 한 분을 모시고 이 문제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역사학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나와주셨습니다.

어서오십시오.

홍범도 장군이 누구인지, 독립투사로서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는 이제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워낙 요 며칠 얘기가 많이 나와서, 그 부분 설명은 생락하도록 하고요, 곧바로 쟁점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소련 공산당' 이력, 이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답변]

공산주의자로서 또는 볼세비키로서 이렇게 입당한 건 아니고요.

1927년이면, 29년부터 연금 생활에 들어가니까 그런 개인적인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생활상의 문제가 있고 또 당시에는 홍범도 장군이 집단 농장 요새말로 콜호스라고 그러는데 거기서 자기 독립군 부하들을 데리고, 소련 당국하고 이제 또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 토지를 부여받는다든가 농사에 필요한 농수로 농기구를 이렇게 제공 받는가 이런 여러 가지 이제 행정적인 문제가 있어서 (이제) 한 거기 때문에 우리 흔히 얘기하듯이 혁명을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지금 아방가르드처럼 지하 공작을 하거나 사회주의를 홍보하거나 선전하거나 이런 그런 일반적인 그런 전위정당 같은 거하고는 좀 다르죠.

(그에 앞서)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군들은 이제 청산리 전투를 치르고 일본군의 어떤 그런 추격, 토벌을 피해서 이제 (러시아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고 또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도 역시 연해주에서 득세를 하고 있던 일본 출병군이죠, 보통 일본군의 어떤 그런 걸(공격을) 받아서 피해서 이제 좀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원동공화국 역내인 자유시로 이제 만주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 있는 독립군들이 집결을 하게 된 겁니다.

[앵커]

또 하나 쟁점이 된 것이, 1921년 발생한 '자유시 참변' 입니다.

당시 독립군이 목숨을 잃는 과정에 홍 장군이 관여했다는 취지로 국방부는 설명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답변]

이 분은 간도에서 간 분이기 때문에 이 결정 과정, 군 통합의 결정 과정에 이런 것에 대해서는 관여할 수가 없었고 그런 위치에도 없었고 더군다나 특히 극단적인 그런 방법인 무장 해제 이 부분에서는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보통 이제 우리가 동족상잔이라고 이제 자유시 참변을 표현하는데, 동족상잔이라기보다는 러시아 쪽의 군인들이 이제 동원된 거고 우리 한인 병사들은 일부러 러시아 쪽에서는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이제 일부의 회상록에 나온 거지만 이제 홍 장군이 장교들하고 자유시 주변에서 무장해제 됐다는 참극 소식을 듣고 장교들하고 이제 솔밭에서 이제 땅을 치면서 이제 통곡했다, 이제 그런 회고도 남아 있죠.

[앵커]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했다", 국방부는 이 부분도 부각을 시켰는데, 이 때의 '빨치산'은 어떤 개념일까요?

[답변]

그 부분이 이제 아주 기본적인 용어의 문제인데 좀 이게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빨치산이라는 건 이제 영어로 파르티샨이고 이제 러시아어로 파르티잔인데 이게 의용병이라는 뜻이거든요.

의용병, 자발적인 비정규군인데, 의병이죠.

이게 홍범도 장군이 왜 파르티산에 있냐 그랬더만, 이 분은 이제 러시아에 들어갈 때 쓰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조사표가 있잖아요.

앙케이트에 보면 거기에 이제 직업이 뭐냐 그랬더니 의병이라고 그랬어요.

근데 의병을 보면 번역된 걸 옆에 러시아말로 보면은 파르티잔이라 돼 있어요.

[앵커]

흉상 이전에 찬성하는 육사 원로들도, 홍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몇 분, 전화로 취재를 해봤는데요, 위인으로서 존경은 하되, 흉상은 옮겨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박종선/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장 : "독립군에서 역할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높게 평가를 하게 되는 겁니다. 다만 생도들이 모든 것에 사표로 삼을 만한 그런 역할은 (안) 되지 않느냐... 오히려 김좌진 장군이나 이범석 장군 같은 경우에는 소련 요구에 분연히 반대를 하고 만주로 돌아가서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을 흔들림 없이 하셨잖아요. 일부는 (홍 장군이) 호구지책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느니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생도들의 사표로, 롤모델로 삼는데는 다소 제한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주은식/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 "육사생도들에게,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어떻게 보면 이념적으로 변절을 하신 거거든요. 그런 분을 이렇게 독립투사인 것은 맞지만 본보기로 삼으라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체제 싸움에서 대한민국이 완승을 거두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게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나서는 한반도에서의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주체가 누구냐 하는 이런 문제가 다시 점화가 된 겁니다."]

반 교수님,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답변]

(그래서) 참 역사가로서 역사학자로서 상당히 자괴감을 느낍니다.

이게(홍 장군을 알리는 게) 많이 부족했구나, 하는 걸 느끼는데...

좀 이렇게 신중하게 좀 처리를 했으면 좋겠어요.

이 역사 해석에 있어서는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라든가 또 이 부분의 어떤 개인적인 여러 가지 사정들을 다각도로 좀 평가하면서 해석을 하면서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제 너무 단선적으로 연결 시켜가지고 소련 공산당 하면 지금 반공 북한 체제 연결시키고 스탈린 체제 연결시키고 이런 문제들이 있어요.

특히 고려인들의 경우에 지금 상당히 분노한 상태입니다, 분노한 상태...

뭐냐면 자기들과 동일시하면서 정신적인 지주로 했던 홍범도 장군이 이렇게 한국에서 이렇게 매도된 거, 그리고 자기들의 어떤 자신이 어떤 매도되고 모멸되고 무시당하는 것, 정신적으로 엄청난 상처를 받고 제가 많이 항의 전화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 분이 거기에 소련 공산당 가입했다고 그래가지고 소련 행정 소비에트 정부나 또는 소련공산당 무슨 직책을 맡아가지고 그 사람들이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혀 아니거든요.

그냥 평범한 고려인들처럼 그냥 생활한 거예요.

이제 90루블 연금 갖고 이제 부족하니까 이 분이 병원에서 한 3개월 정도 경비로 일하기도 하고 전혀 이분이 고려인 사회에서 무슨 소련으로부터 무슨 소련 정부가 어떤 특혜를 받거나 이런 거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 자체도 상당히 어려웠던 거예요.

1895년도에 의병 투쟁에 나섰던 이후로 정말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던 자기 가족들이 다 이게 희생당하지 않았습니까?

부인부터 두 아들까지 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됐던 건데, 의병 투쟁 과정에서...

그래서 이분의 어떤 삶 자체가 그리고 말년까지도 한시도 자기 개인적인 영달이라든가 부귀영화 위해서 산 분이 아닙니다.

[앵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반 교수님 오늘 자세한 말씀 고맙습니다.

영상편집:양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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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학자가 본 홍범도…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뉴스를 만나다]
    • 입력 2023-09-03 21:15:42
    • 수정2023-09-03 21: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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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난 한 주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지요.

육군사관학교는 결국 '이전' 결정을 내렸고, 그에 대한 반발 여론도 거셉니다.

<뉴스를 만나다>, 오늘(3일)은 홍범도 장군을 연구해온 학계 최고 권위자 한 분을 모시고 이 문제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역사학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나와주셨습니다.

어서오십시오.

홍범도 장군이 누구인지, 독립투사로서 어떤 업적을 세웠는지는 이제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워낙 요 며칠 얘기가 많이 나와서, 그 부분 설명은 생락하도록 하고요, 곧바로 쟁점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소련 공산당' 이력, 이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답변]

공산주의자로서 또는 볼세비키로서 이렇게 입당한 건 아니고요.

1927년이면, 29년부터 연금 생활에 들어가니까 그런 개인적인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생활상의 문제가 있고 또 당시에는 홍범도 장군이 집단 농장 요새말로 콜호스라고 그러는데 거기서 자기 독립군 부하들을 데리고, 소련 당국하고 이제 또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 토지를 부여받는다든가 농사에 필요한 농수로 농기구를 이렇게 제공 받는가 이런 여러 가지 이제 행정적인 문제가 있어서 (이제) 한 거기 때문에 우리 흔히 얘기하듯이 혁명을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지금 아방가르드처럼 지하 공작을 하거나 사회주의를 홍보하거나 선전하거나 이런 그런 일반적인 그런 전위정당 같은 거하고는 좀 다르죠.

(그에 앞서)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군들은 이제 청산리 전투를 치르고 일본군의 어떤 그런 추격, 토벌을 피해서 이제 (러시아로) 이동하는 경우가 있고 또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도 역시 연해주에서 득세를 하고 있던 일본 출병군이죠, 보통 일본군의 어떤 그런 걸(공격을) 받아서 피해서 이제 좀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원동공화국 역내인 자유시로 이제 만주 지역과 연해주 지역에 있는 독립군들이 집결을 하게 된 겁니다.

[앵커]

또 하나 쟁점이 된 것이, 1921년 발생한 '자유시 참변' 입니다.

당시 독립군이 목숨을 잃는 과정에 홍 장군이 관여했다는 취지로 국방부는 설명했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답변]

이 분은 간도에서 간 분이기 때문에 이 결정 과정, 군 통합의 결정 과정에 이런 것에 대해서는 관여할 수가 없었고 그런 위치에도 없었고 더군다나 특히 극단적인 그런 방법인 무장 해제 이 부분에서는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보통 이제 우리가 동족상잔이라고 이제 자유시 참변을 표현하는데, 동족상잔이라기보다는 러시아 쪽의 군인들이 이제 동원된 거고 우리 한인 병사들은 일부러 러시아 쪽에서는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이제 일부의 회상록에 나온 거지만 이제 홍 장군이 장교들하고 자유시 주변에서 무장해제 됐다는 참극 소식을 듣고 장교들하고 이제 솔밭에서 이제 땅을 치면서 이제 통곡했다, 이제 그런 회고도 남아 있죠.

[앵커]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했다", 국방부는 이 부분도 부각을 시켰는데, 이 때의 '빨치산'은 어떤 개념일까요?

[답변]

그 부분이 이제 아주 기본적인 용어의 문제인데 좀 이게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빨치산이라는 건 이제 영어로 파르티샨이고 이제 러시아어로 파르티잔인데 이게 의용병이라는 뜻이거든요.

의용병, 자발적인 비정규군인데, 의병이죠.

이게 홍범도 장군이 왜 파르티산에 있냐 그랬더만, 이 분은 이제 러시아에 들어갈 때 쓰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조사표가 있잖아요.

앙케이트에 보면 거기에 이제 직업이 뭐냐 그랬더니 의병이라고 그랬어요.

근데 의병을 보면 번역된 걸 옆에 러시아말로 보면은 파르티잔이라 돼 있어요.

[앵커]

흉상 이전에 찬성하는 육사 원로들도, 홍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몇 분, 전화로 취재를 해봤는데요, 위인으로서 존경은 하되, 흉상은 옮겨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박종선/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장 : "독립군에서 역할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높게 평가를 하게 되는 겁니다. 다만 생도들이 모든 것에 사표로 삼을 만한 그런 역할은 (안) 되지 않느냐... 오히려 김좌진 장군이나 이범석 장군 같은 경우에는 소련 요구에 분연히 반대를 하고 만주로 돌아가서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을 흔들림 없이 하셨잖아요. 일부는 (홍 장군이) 호구지책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느니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생도들의 사표로, 롤모델로 삼는데는 다소 제한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주은식/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 "육사생도들에게, 소련공산당에 가입한, 어떻게 보면 이념적으로 변절을 하신 거거든요. 그런 분을 이렇게 독립투사인 것은 맞지만 본보기로 삼으라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체제 싸움에서 대한민국이 완승을 거두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게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나서는 한반도에서의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주체가 누구냐 하는 이런 문제가 다시 점화가 된 겁니다."]

반 교수님,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답변]

(그래서) 참 역사가로서 역사학자로서 상당히 자괴감을 느낍니다.

이게(홍 장군을 알리는 게) 많이 부족했구나, 하는 걸 느끼는데...

좀 이렇게 신중하게 좀 처리를 했으면 좋겠어요.

이 역사 해석에 있어서는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라든가 또 이 부분의 어떤 개인적인 여러 가지 사정들을 다각도로 좀 평가하면서 해석을 하면서 이렇게 해야 되는데 이제 너무 단선적으로 연결 시켜가지고 소련 공산당 하면 지금 반공 북한 체제 연결시키고 스탈린 체제 연결시키고 이런 문제들이 있어요.

특히 고려인들의 경우에 지금 상당히 분노한 상태입니다, 분노한 상태...

뭐냐면 자기들과 동일시하면서 정신적인 지주로 했던 홍범도 장군이 이렇게 한국에서 이렇게 매도된 거, 그리고 자기들의 어떤 자신이 어떤 매도되고 모멸되고 무시당하는 것, 정신적으로 엄청난 상처를 받고 제가 많이 항의 전화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 분이 거기에 소련 공산당 가입했다고 그래가지고 소련 행정 소비에트 정부나 또는 소련공산당 무슨 직책을 맡아가지고 그 사람들이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혀 아니거든요.

그냥 평범한 고려인들처럼 그냥 생활한 거예요.

이제 90루블 연금 갖고 이제 부족하니까 이 분이 병원에서 한 3개월 정도 경비로 일하기도 하고 전혀 이분이 고려인 사회에서 무슨 소련으로부터 무슨 소련 정부가 어떤 특혜를 받거나 이런 거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 자체도 상당히 어려웠던 거예요.

1895년도에 의병 투쟁에 나섰던 이후로 정말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헌신했던 자기 가족들이 다 이게 희생당하지 않았습니까?

부인부터 두 아들까지 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됐던 건데, 의병 투쟁 과정에서...

그래서 이분의 어떤 삶 자체가 그리고 말년까지도 한시도 자기 개인적인 영달이라든가 부귀영화 위해서 산 분이 아닙니다.

[앵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반 교수님 오늘 자세한 말씀 고맙습니다.

영상편집:양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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