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터지면 전액 A/S”…불법 도박 ‘40조’ 돈 세탁소
입력 2023.09.07 (15:11)
수정 2023.09.0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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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도박 자금 세탁 조직이 불법도박사이트를 상대로 영업하며 보낸 메시지.
'통장 컨설팅 가능', '계좌공격에 강하다'
글자만 보자면 자산관리 회사 같기도 하고 금융보안 회사의 광고 같기도 한 이 문구.
20대 정 모 씨 등 일당이 운영해온 도박자금 세탁조직이 불법 도박 사이트를 상대로 영업하며 쓴 표현들입니다.
경찰은 이 조직이 2021년 7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64개 도박사이트에서 도박 자금을 받아 이를 세탁해왔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이 불법 도박 사이트와 거래한 돈은 경찰이 확인한 것만 40조 원에 달합니다. 이들은 이 돈의 1%인 4,000억 원가량을 수수료로 챙긴 걸로 보입니다.
부산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도박 자금을 관리·세탁해주고 수수료를 챙긴 혐의로 일당 24명을 붙잡아 이 가운데 총책 등 3명을 구속했습니다. 또 이들에게 이른바 '대포 통장'을 판매한 혐의를 받는 명의자 77명도 함께 입건했습니다.
범행에는 대포통장 수백 개가 이용됐는데, 들어온 도박자금을 여러 단계에 걸쳐 이체하는 '세탁' 방식으로 추적을 피했습니다.
■ 기업형 범죄조직 'A/S 망'까지 구축
불법도박 자금 세탁 조직이 범행에 활용한 대포폰.
어지간한 대기업의 매출 규모에 육박하는 돈을 다루는 만큼 조직은 기업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찾아낸 일당의 조직은 전국에 36개 지부를 두고 있고 우두머리인 총책부터 모집책, 연락책, 관리자 등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일당은 수사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수개월마다 지부 사무실을 옮겨 다니며 텔레그램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특히 금융당국의 감시를 피하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거래 계좌를 바꾸었습니다.
계좌가 지급정지될 경우를 대비한 대책을 만들어놓은 것도 특징입니다. '사고처리반'을 두고 문제가 터지면 자금세탁을 의뢰한 도박 사이트 업체 측에 '즉시' 전액을 변상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일당은 국내 거의 모든 스포츠 도박 사이트와 거래하는, 최대 규모의 자금세탁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 '압수수색 대비하라' 행동강령까지...범죄 수익 몰수 '막막'
여기에 단속에 대비한 조직원 행동강령과 매뉴얼도 구축해놓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공개한 행동강령에는 '사무실 이동을 지시하면 즉시 이동하라'거나 '대포폰, PC 등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을 대비하라'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이를 파악한 경찰은 도주와 증거인멸을 막기 위해 각 지부 사무실을 동시에 압수 수색을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지금껏 몰수 추징한 범죄수익금은 8억 3천만 원에 불과합니다. 총책의 부동산과 고가의 자동차 등 '눈에 보이는' 재산들입니다. 나머지 범죄 수익 대부분은 가상화폐로 빼돌려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사당국은 총책이 직접 운영한 도박사이트 두 곳에 대한 가상자산 범죄수익도 몰수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은 "범죄수익을 보고도 못 가져오니까 더 답답하다"고 토로했습니다.
■ "억 소리도 작다" 국내 불법 도박 자금 100조 돌파
불법도박 자금 세탁 조직 총책인 정 모 씨가 소유한 고가의 자동차들.
더 큰 문제는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불법 도박 시장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무총리 소속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펴낸 '제5차 불법도박실태조사'를 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전체 불법도박 규모는 102조 7,236억 원에 달합니다.
2008년부터 벌여온 관련 조사에서 불법 도박 자금 규모가 100조 원을 넘어선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22조 원 정도인 합법적인 사행산업 규모를 훌쩍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고 607조 원가량인 지난해 정부 본예산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는 "불법 도박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코로나 환경에서도 감소하기보다는 전자기기와 온라인이라는 도구를 활용한 이용이 증가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더욱 강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범행에 이용된 계좌 중 82%가 휴대전화로 쉽게 개설할 수 있는 비대면 계좌였다"면서 "금융감독원에 계좌 개설의 절차를 개선하고 반복되는 입출금 계좌 같은 경우에는 생체 인식을 하도록 하는 등의 제도 개선을 건의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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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 터지면 전액 A/S”…불법 도박 ‘40조’ 돈 세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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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3-09-07 15:11:34
- 수정2023-09-07 15:21:45
'통장 컨설팅 가능', '계좌공격에 강하다'
글자만 보자면 자산관리 회사 같기도 하고 금융보안 회사의 광고 같기도 한 이 문구.
20대 정 모 씨 등 일당이 운영해온 도박자금 세탁조직이 불법 도박 사이트를 상대로 영업하며 쓴 표현들입니다.
경찰은 이 조직이 2021년 7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64개 도박사이트에서 도박 자금을 받아 이를 세탁해왔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이 불법 도박 사이트와 거래한 돈은 경찰이 확인한 것만 40조 원에 달합니다. 이들은 이 돈의 1%인 4,000억 원가량을 수수료로 챙긴 걸로 보입니다.
부산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도박 자금을 관리·세탁해주고 수수료를 챙긴 혐의로 일당 24명을 붙잡아 이 가운데 총책 등 3명을 구속했습니다. 또 이들에게 이른바 '대포 통장'을 판매한 혐의를 받는 명의자 77명도 함께 입건했습니다.
범행에는 대포통장 수백 개가 이용됐는데, 들어온 도박자금을 여러 단계에 걸쳐 이체하는 '세탁' 방식으로 추적을 피했습니다.
■ 기업형 범죄조직 'A/S 망'까지 구축
어지간한 대기업의 매출 규모에 육박하는 돈을 다루는 만큼 조직은 기업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찾아낸 일당의 조직은 전국에 36개 지부를 두고 있고 우두머리인 총책부터 모집책, 연락책, 관리자 등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일당은 수사당국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수개월마다 지부 사무실을 옮겨 다니며 텔레그램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특히 금융당국의 감시를 피하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 거래 계좌를 바꾸었습니다.
계좌가 지급정지될 경우를 대비한 대책을 만들어놓은 것도 특징입니다. '사고처리반'을 두고 문제가 터지면 자금세탁을 의뢰한 도박 사이트 업체 측에 '즉시' 전액을 변상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일당은 국내 거의 모든 스포츠 도박 사이트와 거래하는, 최대 규모의 자금세탁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 '압수수색 대비하라' 행동강령까지...범죄 수익 몰수 '막막'
여기에 단속에 대비한 조직원 행동강령과 매뉴얼도 구축해놓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공개한 행동강령에는 '사무실 이동을 지시하면 즉시 이동하라'거나 '대포폰, PC 등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을 대비하라'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이를 파악한 경찰은 도주와 증거인멸을 막기 위해 각 지부 사무실을 동시에 압수 수색을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지금껏 몰수 추징한 범죄수익금은 8억 3천만 원에 불과합니다. 총책의 부동산과 고가의 자동차 등 '눈에 보이는' 재산들입니다. 나머지 범죄 수익 대부분은 가상화폐로 빼돌려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사당국은 총책이 직접 운영한 도박사이트 두 곳에 대한 가상자산 범죄수익도 몰수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은 "범죄수익을 보고도 못 가져오니까 더 답답하다"고 토로했습니다.
■ "억 소리도 작다" 국내 불법 도박 자금 100조 돌파
더 큰 문제는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불법 도박 시장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무총리 소속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펴낸 '제5차 불법도박실태조사'를 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전체 불법도박 규모는 102조 7,236억 원에 달합니다.
2008년부터 벌여온 관련 조사에서 불법 도박 자금 규모가 100조 원을 넘어선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22조 원 정도인 합법적인 사행산업 규모를 훌쩍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고 607조 원가량인 지난해 정부 본예산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는 "불법 도박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코로나 환경에서도 감소하기보다는 전자기기와 온라인이라는 도구를 활용한 이용이 증가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더욱 강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범행에 이용된 계좌 중 82%가 휴대전화로 쉽게 개설할 수 있는 비대면 계좌였다"면서 "금융감독원에 계좌 개설의 절차를 개선하고 반복되는 입출금 계좌 같은 경우에는 생체 인식을 하도록 하는 등의 제도 개선을 건의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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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규 기자 h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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